이해할 수 없음을 이해해 가는 중년의 공부
오늘 아침, 서른세 해를 함께해 온 지기와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즘 우리 대화의 종착지는 유독 인간이 가진 근원적인 고독으로 향하곤 한다.
아이들이 사춘기에 접어들고, 특히 나의 경우 딸아이가 청년기가 되어 부모의 품을 떠나 제 삶을 일구어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릴 때는 물고 빨며 키웠던 아이들인데 어느 순간부터 분리가 시작된다.
자기만의 생각이 생기고, 자기만의 세계가 견고해지며, 부모의 영향권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간다.
머리로는 지극히 당연하고 대견한 과정임을 알지만, 마음은 자꾸만 빈둥지의 서늘함을 느낀다.
너는 내가 될 수 없고, 나는 네가 될 수 없다
요즘 유독 뼈저리게 느끼는 건 ‘다름’이다.
우리는 결국 자신의 어린 시절을 기준으로 세상을 이해하려 든다.
나라는 사람의 비교 대상은 결국 과거의 나 자신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타인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곤 한다.
그 잣대 사이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간극은
더 깊고 아득해진다.
어쩌면 이것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결코 이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타인이라면 애초에 그렇게 깊이 이해하려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기대도 덜했을 테니까.
하지만 자식은 다르다.
내 몸에서 나간 존재이기에
상실감은 더 깊고
분리의 고통은 더 외롭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살았던 그 시대를 기준으로 세상을 보지만
아이들은 전혀 다른 공기,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결국
너는 내가 될 수 없고
나는 네가 될 수 없다.
그 자명한 사실.
지기와 구구절절 나누며 공감했던 그 지독한 고독은
아마 중년의 부모들이 한 번쯤 깊이 통과해야 할 관문 같은 것일 게다.
‘서로를 이해하면서도 잘 지내는 방법’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아직도 그 질문은
답 없이 내 안에 남아 있다.
거창한 깨달음보다 강한 일상의 힘
이유도 모르게, 터무니없이
고독이 밀려오는 날이 있다.
오늘이 그랬다.
그런데 그런 날
나를 지탱해 주는 것은 거창한 철학이나 깨달음이 아니었다.
대신 일상의 튼실함이 나를 붙잡았다.
언제나처럼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길로 출근했다.
어린이집의 귀여운 아이들과 실컷 웃으며 놀았고
퇴근 후에는 귀찮음을 이겨내고
매일의 습관처럼 헬스장으로 직행했다.
땀을 흘리고 돌아와
남편 김기사의 저녁밥을 짓고
도시락을 쌌다.
마침 알배추가 싸고 달기에
겉절이도 담갔다.
소금에 절인 배추를 버무려 통에 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삶이 우리를 버티게 하는 방식은
이렇게나 단순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거창한 정답을 찾아 헤매는 대신
같은 길로 출근하고
아이들과 웃고
운동을 하고
저녁밥을 짓고
겉절이를 담그는 것.
그렇게 하루를
하루답게 성실히 살아내는 것.
오늘도 그 평범하고도 위대한 일상이
나를 지탱해 주었다.
고독은 여전히 내 방 한구석에 머물러 있지만
내 손에 묻은 양념 냄새와
단단해진 근육의 피로감이
나에게 말해주는 것 같다.
오늘도 잘 살아냈노라고.
그거면 충분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