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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데로샤 Jan 24. 2021

어머니의 험난한 첫 연말정산

아이를 씻기고 욕실에서 나왔다. 그 사이 어머니가 두 통이나 전화하신 걸 알았다. 무슨 일이시지? 곧바로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회사에서 연말정산 서류를 떼오라고 설명서를 줬는데 도통 알 수가 있어야지 말이지."


칠순이 넘으신 어머니는 오래전부터 요양보호사로 일하시고 계신다. 작은 센터에서 일하시다가 작년에 시청에서 위탁받은 센터로 자리를 옮기셨는데, 그곳에서는 시급제가 아닌 월급제로 근무하고 계시기 때문에 연말정산 서류를 처음으로 요청받은 것이었다.


어머니는 전화 외에도 문자메시지를 보내셨다. 그 안에는 회사 직원이 준 설명서 사진이 들어 있었다. 손으로 사진을 확대해 보니 국세청 홈택스에 접속해 연말정산 간소화서비스에 등록된 개인자료를 다운로드하여 회사 담당자에게 이메일로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나도 직장인인지라 대충 봐도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어머니의 요청을 해결해 드리는 게 나의 몫이다. 하지만 우리 앞에는 허들이 너무 많았다. 우선 설명서에 나와 있는 화면까지 접근하는 일이 문제였다. 내가 어머니 곁에만 있다면 5분, 아니 3분 안에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을 텐데... 어머니께 전화로 하는 방법을 일일이 설명하고, 어머니가 그 설명에 따라 단계 단계 넘어가는 것. 그 자체가 고난이도였다.


우리는 스피커폰으로 전환하고 대화를 이어갔다. 나는 포털에서 홈택스를 치면 나오는 화면, 연말정산간소화 서비스 바로가기를 누르기 전과 후의 화면까지 각각 찍어서 어머니께 보내 드렸다. 시간은 걸렸어도 어머니는 여기까지 잘 따라오셨다.


연말정산 로그인 서비스 화면


다음은 제일 중요한 '로그인' 화면이다.


공인인증서로 로그인 시도를 해 보기로 했다. 어머니는 평소 공인인증서를 USB에 담아다니고 계셨다. 그런데 아차 아차차.. 정책상 1달 전 공인인증서가 공식 폐지되었다. 브라우저에 공인인증서가 등록되어 있지 않다는 메시지가 계속 뜬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가능한 경로를 계속 설명해 드렸지만 글씨도 잘 안 보이고 모르는 게 나오다 보니 어머니는 계속 같은 자리에서 맴돌기만 하셨다.


방법을 바꾸자. 그래서 간편서명 로그인으로 해 보기로 했다.


간편서명 창으로 들어갔다. 카드사, 통신사, 금융사, 카카오톡 서비스가 있었다. 어머니에게 카카오톡으로 접근을 권했다. 인증 요청까지는 잘 됐다. 그런데 휴대폰으로 비밀번호를 넣고 본인 확인하는 절차에서 막혔다. 뭔 지갑이 없다는 데 그건 또 무슨 말이냐고 말씀하셨다. 오호통재라.. 말로 하는 설명도 한계다. 내 속도 조금씩 끓기 시작했고, 어머니도 답답해하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내일 지인에게 물어보겠다고 하시면서 전화를 끊었다.


원격 접속 솔루션으로 해결해 보려 하였으나 그것도 쉽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책상에 앉아 있다가 늦은 밤이지만 컴퓨터 일을 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친구에게 저간의 사정을 얘기하고 “혹시 원격 조정하는 프로그램 없니?”하고 물어보니 Teamviewer를 소개해 줬다. 친구가 알려주는 대로 내 컴에 프로그램을 먼저 다운로드하고, 다시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어머니께 화면에 나오는 글자 하나하나 읽어드리고 버튼을 누르시고 실행해서 들어오라고 안내했다. 어머니도 잘 따라오셨는데 막판에 영어도 나오고 ID와 PW 단계에서 막혀 실패했다.

(다음을 위해 이 프로그램은 본가에 가서 어머니 컴퓨터에 깔아 두어야겠다)


그렇게 2시간이 다 되도록 시간을 쏟아부었지만 우리는 연말정산 간소화서비스에 로그인하지 못했다. 연말정산을 편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이트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쉽지 않은 벽이었다. 이럴 때 나에게 순간 이동이나 슈퍼맨처럼 날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하는 아쉬운 생각만 들었다.


다음 날 어머니와 통화를 하였는데 새벽 2시까지 해서 다운로드에 성공했고 사무실에 보냈다고 하셨다. 어머니께 고생하셨다고 말씀은 드렸지만 잘하셨다고 칭찬해 드려야 할 일인지, 응원해 드려야 할 일인지 모르겠다. 어머니가 투자한 시간에 비해 정말 연말정산 환급이 얼마나 나올는지도 알 수 없다.


기차에 타면 어른들은 서서 가고, 아이들은 앉아서 간다는 글을 봤던 적이 있다. 실제 서울로 발령받아 갔을 때 회사가 서울역 근처라 KTX를 자주 이용했었는데, 매표창구 앞에 노인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기술이 발전하고 세상이 편해지는 건 분명 좋은 일이지만 디지털 환경에서 사는 어른들에게는 하나하나가 어려움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이번 일을 계기로 디지털 환경에서 노인이 어려움을 겪는 일이 남의 집 문제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깊게 느끼게 되었다.



<사진: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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