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포데로샤 Nov 10. 2019

부모의 고향으로 영주귀국한 사할린동포

나의 적십자 다이어리

큰어머니 병문안을 가기 위해 청주푸르미체육관 주차장에서 부모님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막간을 이용해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때마침 내 앞을 지나가는 아는 어른이 계셔서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운동하고 가시나 봐요?"


그분은 앞을 보고 가다가 갑자기 아는 체를 하는 나를 돌아보시더니 잠시 누군지 떠올리시고는 웃으며 말했다.


"아하. 적십자요."


이 분은 2008년 사할린에서 충북 오송으로 영주귀국한 김인자 님이다. 한국에 오신 지 어느새 11년이 되었다. 2009년 7월 내가 구호업무를 맡게 되면서 사할린인들이 사는 오송 아파트를 자주 찾았다. 그곳에서 남편인 김정욱 사할린동포 회장님과 함께 자주 만났었다. 한 번은 집으로 가자고 하셔서 들어갔는데, 빵이랑 캐비어랑 러시아 음식을 내주셨던 기억이 난다.  




어릴 적 부산에 살 때 방학이 되면 안성 외갓집에 놀러 가곤 했다. 지금이야 고속철도가 있어서 서울 부산도 하루에 왕복한다지만, 그때만 해도 무궁화 타고 부산을 출발해 경기도 안성시 외곽에 있는 외갓집까지 가려면 하루가 꼬박 걸렸다. 외갓집에는 나이 많은 어른들이 계셨다. 증조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그리고 큰할머니로 불리는 어른이 한 분 계셨다. 아주 작은 체구셨는데, 얼굴 주름은 깊고 허리는 구부정했다. 알고 보니 큰할머니는 외할아버지의 형수님이셨다.


큰할머니는 일제 시절 남편이 사할린으로 떠나고 딸과 함께 시부모님 집에서 줄곧 사셨다. 외할아버지는 형님을 대신해 집안의 장남 역할을 하셨고, 작은 외삼촌은 아들 없는 큰할머니네 양아들이 되어 기일마다 제사를 올렸다. 가족들은 사할린에 계신 큰할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현지에서 큰할아버지를 알고 지냈다는 분을 어렵사리 찾아 큰할아버지가 사할린에서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곳이 어디인지는 끝내 알지 못했다.


그래서인가. 나는 사할린이라는 지명이 낯설지가 않았다. 집안 내력상 어릴 적부터 들어왔던 지명이기 때문이리라. 내가 근무하는 충북지역으로 사할린동포들이 영주귀국 온다는 계획을 들었을 때에도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하고 더욱 관심이 갔다.




충북지역에는 총 세 번에 걸쳐 사할린동포들이 영주귀국했다. 2008년 10월 충북 청주시 오송읍 (30세대 60명), 2009년 11월 음성군 음성읍 신천리 (35명 70명), 2010년 2월 제천시 영천동 (60세대 120명) 순으로 영주귀국은 진행되었다. 이 기간 나는 음성과 제천지역의 사할린동포 영주귀국 업무를 맡게 되었다. 총 세 번 중에 두 번이라니 일복도 많다. 오송지역은 적십자 충북지사 인근에 위치해 있어 봉사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자주 방문했다.


오송 영주귀국은 내가 캐나다 단기연수를 갔다가 귀국하던 기간에 실시됐다. 지금은 오송에 공공기관도 많이 들어오고 교통편도 확충되고 기반시설이 잘 갖춰져 있지만, 당시만 해도 오송의 정주여건은 좋지 않았다.


지역에서의 첫 영주귀국이다 보니 주변의 관심은 컸다. 그러나 준비과정에서 사무국, 봉사회, 외부단체와의 연계가 매끄럽지 못해 다소간의 미비점들이 있었다고 평가되었다. 그런 점들을 참고하면서 나는 음성지역 영주귀국 준비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영주귀국 과정에서 적십자의 역할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사할린동포가 오게 될 공공 아파트가 확정되면 봉사원들이 각 세대 내부 청소를 하고 세부일정에 따라 가구, 비품이 들어오는 것을 확인한다. 둘째, 정착지원 캠프를 3개월 운영해 신분증 발급, 기초수급 신청, 계좌 개설, 건강검진, 마을 안내, 시장 보기 등이 하나하나 마무리되도록 지원한다. 이민과 다를 바 없다. 셋째, 캠프 종료 후에는 봉사회와 연계하여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현지 적응을 돕는다.


음성지역 영주귀국은 지역 봉사회의 적극적인 협조 덕분에 순조롭게 잘 마무리되었다. 모두가 합심하고 노력한 결과였다. 내게 있어서는 그중에서 기억되는 사람이 있다. 당시 총무부장을 맡고 있던 서오석 적십자봉사원이다. 그는 사할린동포와 관련된 일이라면 밤낮없이 앞장섰다. 영주귀국 이후에 장례, 병원 입원 등 사할린동포에게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해결사 역할을 했다.


전국적인 행사도 개최했다. 2010년 3월 음성군 문화예술회관에서 전국 600여 명의 사할린동포이 참여한 가운데 <사할린동포와 함께하는 한마음대회>가 처음으로 열렸다. 안산, 파주, 김포, 오산, 남양주, 화성, 양산 등 전국의 사할린동포들이 충북의 음성을 찾았다. 2011년에는 음성군 품바축제기간에 전국에 사는 1,200여 명의 사할린동포를 초청해 우정과 교류의 한마음대회를 열었다. 그 한마음대회가 계속 이어져 올해로 10회를 맞았다. 연세든 어르신들이 행사에 오고 싶어도 장거리 차를 탈 수 없어 못 온다는 점이 아쉬운 대목이다.  


음성에서 열린 <제4회 사할린동포와 함께하는 한마음대회>



제천지역 사할린동포 영주귀국사업은 음성의 경험을 살리고 미비점을 보완해 훌륭하게 진행되었다. 무엇보다 사무국, 지자체, 봉사회의 협업이 가장 좋았다. 삼박자의 조화는 결국 사할린동포의 삶의 질 향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2010년 1월 제천시청에서 사할린동포 정착지원 캠프 활동 안내를 위한 설명회를 가졌다. 2월 8일에는 강저 휴먼시아 아파트 2층에 캠프를 개설했다. 박귀녀 나눔봉사회장이 캠프장을 맡았고, 제천지구협의회 소속 각 봉사회별로 입주자 전담을 맡아 빠짐없이 준비해 갔다. 드디어 2월 26일 인천공항의 짙은 안개로 당초 예정된 시간보다 늦은 밤 11시경 사할린동포들은 제천에 도착하였다. 제천지역 봉사회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인지 제천을 제2의 고향으로 삼은 사할린동포들의 현지 만족도가 매우 높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2010년 1월 29일 제천시청 사회복지과에서 있었던 영주귀국 사할린동포 지원캠프 활동안내를 위한 설명회


제천에 도착한 사할린동포를 환영하기 위해 모인 적십자봉사원


먼저 배송된 화물을 찾아 각 가정으로 옮기고 있는 적십자 봉사원들


나는 제천으로 영주귀국하는 사할린동포들을 모셔 오기 위해 사할린을 처음 방문했다. 큰할아버지가 계신 곳. 동토의 땅 사할린에서 정말 한국에서 보지 못했던 엄청난 양의 눈을 봤던 것 같다. 왜 사할린을 동토의 땅이라고 부르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사할린에서 한국으로, 인천공항에서 제천시까지 오는 여정이 무탈하게 끝나 감사했다. 적십자의 일원이 아니었다면 경험해 볼 수 없었을 일이었다.




오랜만에 그때의 이야기도 생생하게 들을 겸 음성에 계시는 서오석 봉사원님에게 전화했다. 한참 통화하는데, 음성지역 사할린동포들이 11월 5일날 처음 왔었다고 알려 주셨다.


"어. 11월 5일이면 오늘이네요"


1년 전 오늘 내가 뭘 했는지 기억하는 사람이 몇 있을까. 2년 전, 5년 전 오늘은 어떻고. 하물며 10년 전 오늘이라면. 그러나 난 10년 전 오늘 내가 어디에 있었고, 누구와 함께 있었고,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봉사원님과의 통화를 통해 기억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힘들지만 행복한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오늘 밤 기분이 더 좋다.








일제강점기 "국가총동원령"에 의해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되었다가 종전 후에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계속 사할린에 거주하고 있는 4만 3천여 명의 한인을 사할린동포라고 부른다.


1989년 7월 14일 한일 적십자사간 '사할린거주 한인지원 공동사업체 협정'을 체결되면서 사할린 잔류 한인을 대상으로 한 지원사업이 실시되었다. 1990년 1월 3일 대한적십자사는 정부로부터 사할린 한인 지원사업을 수임하였다. 대한적십자사는 현재 국내 거주하는 사할린동포 현재 영주귀국, 일시모국방문, 귀국자 역방문, 2~3세 모국방문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가자! 재난이 있는 곳으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