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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데로샤 Dec 15. 2019

북한이탈주민의 행복한 정착을 위해 노력했던 시간들

나의 적십자 다이어리

하나원은 북한이탈주민이 대한민국에 입국하여 일정기간 조사를 마친 후 입소하는 기관이다.


2009년 7월, 나는 충북적십자사 구호복지팀으로 부서를 옮겼다. 맡게 된 업무는 구호였는데, 북한이탈주민의 정착지원에 관한 업무도 있었다. 하나원을 퇴소한 뒤 충북지역에서 살게 될 북한이탈주민의 신병을 인수하고, 봉사원을 정착도우미로 지정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하나원이 여기라고요?"


알고 보니 하나원이 안성시에 있는 게 아닌가. 안성이 큰 도시도 아니고, 이 곳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부모님도 계시는데 하나원이 안성에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게다가 하나원은 외갓집이 있는 동네와 차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다음부터는 하나원에 간다고 하면 별 것도 아닌데 마치 고향집 지나는 것처럼 정감을 느꼈다.  




북한이탈주민은 말 그대로 북한을 탈출해 북한 외의 나라에 체류하는 사람들이다. 한국도 그중의 한 나라다. 타 지역으로 전학만 가도 적응이 안 돼 죽겠는데, 타국에서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부대껴 가며 살아야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지난 7월 북한이탈주민 모자가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사망한 지 3개월이 지나 발견된 일이 있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처럼 다수의 북한이탈주민은 어려운 형편 속에서 산다.


내가 구호업무를 하던 시기, 적십자는 북한이탈주민의 정착지원을 돕는 활동을 주도적으로 했다. 우리는 이런 활동을 담당하는 적십자봉사원을 '정착도우미'라고 불렀다. 자체적으로 보드미라고도 했다. 북한이탈주민 1세대마다 정착도우미 봉사원 2명이 담당을 했다. 봉사원들은 하나원을 퇴소하는 북한이탈주민이 오기 전에 집안 청소를 하고, 먹을 것도 준비해 주었다. 그리고 북한이탈주민의 삶의 멘토로서 지역 적응을 열심히 도왔다. 때로는 어머니처럼, 아버지처럼, 언니처럼, 오빠처럼.


이렇게 전국적인, 정책적인 사업의 수행을 무난히 수행할 수 있는 조직이 있을까. 적십자가 그 역할을 했다. 북한이탈주민은 서울, 부산, 광주, 대전, 대구, 제주 등 전국 어디에나 있었다. 전국 14개 시도에 지사가 자리하고, 훈련된 봉사원을 갖추고 있으며, 남북문제의 민간가교 역할을 수행하는 인도주의 기관이기 때문에 적십자는 2005년부터 이 사업을 동행했던 것이다.  


당시 충북적십자는 한 단계 더 전문성을 갖춘 기관으로 도약하기로 결정했다. 2010년 북한이탈주민을 위한 지역적응교육과 취업지원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북한이탈주민지역적응센터(충북하나센터)가 각 도별로 개설된다는 소식을 듣고 자천타천으로 지원했다. 그렇게 우리는 충북하나센터의 위탁을 따냈다.


나는 충북하나센터의 개소 준비를 했다.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해야 했다. 사무실 공간을 확보하고, 전담인력을 뽑고, 사무기기를 하나씩 들였다. 그렇게 수개월 간의 준비과정을 거쳐 충북하나센터는 2010년 5월 14일 충북적십자사 1층에 문을 열었다.


하지만 운영상에 있어서 어려움이 많았다. 하드웨어는 갖춰졌지만 그 내부 운영이 복잡했다. 문서작성 및 결재방식, 회계프로그램, 시설 및 장비 사용 등 기존 규정이나 전산시스템에서 풀어야 할 부분이 많았으나 하나씩 해결해 나갔다.


가장 큰 문제는 충북하나센터가 청주에 있다 보니 북부지역(충주, 제천)에 거주하는 북한이탈주민이 오기가 힘들었다. 같은 도내라지만 당시 제천은 청주에서 차를 타고 2시간을 가야 하는 거리로 시간상 서울보다 더 먼 곳이었다. 북한이탈주민이 4시간 이상을 왕복해야 하는데, 매일 청주교육장에 온다는 것만도 어려운 일이었다. 심지어 하나원을 퇴소하고 첫 주말을 보내자마자 서울이나 타 도시로 말없이 떠나 버리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 보니 하나센터 직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육실적이 좋을 리가 없었다.

        충북하나센터에서 마련한 남북한 명절음식 나누기 행사




반면에 재밌는 일도 있었다.


청주에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친다는 한 미국인의 연락을 받았다. 북한이탈주민에 대해 관심이 많으며, 봉사활동으로 영어를 가르치고 싶다고 했다. 미국 친구가 북한이탈주민을 위해서 봉사하겠다고 하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타 지역으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고 했다. 야심 찬 프로젝트가 이대로 무산되는구나 싶었는데, 그가 한 친구를 소개해 주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에이미입니다."

그녀는 풀브라이트 재단 장학생으로, 청주의 한 공립고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미국 뉴욕 출신으로 예일대학을 졸업한 수재였는데, 북한이탈주민의 인권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녀는 자라면서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알고 보니 어머니가 유엔본부에 근무해서 어릴 적부터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했다. 한국에 오기 전에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을 만나본 적이 있다고 하였는데, 반기문 총장이 충북적십자사 청소년적십자(RCY) 출신이라고 하였더니 무척이나 반가워하였다.


2010년 11월 5일  <북한이탈주민 영어배움교실>은 그렇게 탄생했다.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 두 번 수업을 열었다. 에이미로 시작해 원어민 영어교사는 여섯 명으로 늘어났다. 에이미를 비롯해 앨리슨, 클라라, 라라, 질리 등 자원봉사자들은 2명씩 짝을 이뤄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에이미와 클라라가 주로 많이 왔지만, 일이 있는 경우 돌아가면서 방문했다.


그런데 학생이 적다는 게 문제였다. 북한이탈주민은 외래어에도 어려움을 토로하는 사람들이다. 생활교육에도 교육생의 참여가 저조한데, 영어수업을 들으러 올 사람은 더욱 드물었다. 처음에는 북한이탈주민 2명에 원어민 교사 3명이 함께 1시간 30분 영어수업을 하였는데, 그다음은 한 학생이 안 와 북한이탈주민 1명을 위해 원어민 교사 2명이 영어수업을 하였다.


영어를 공부하는 한국사람이라면 원어민 영어강사에게 돈을 내고 배운다. 그런데 원어민 영어교사가 2명씩 꼭 와서 영어를 무료로 가르쳐 주겠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수업을 들을만한 북한이탈주민을 찾기가 어려웠다. 마지막 남은 1명의 학생도 대학 진학이 결정되면서 <북한이탈주민 영어배움교실>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김없이 봉사하러 와 주는 원어민 영어교사들이 너무나 고마웠다. 영어교실은 부득이하게 운영할 수 없지만, 한국에 있는 동안 적십자 활동도 보여주고 북한이탈주민과의 만남도 경험시켜주고 싶었다.


때마침 장미적십자봉사회가 10주년을 맞이해 <북한이탈주민과 함께하는 행복동행> 프로그램으로 강원도 삼척, 강릉지역 견학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었다. 취지를 공감해 주신 장미적십자봉사회 임원들 덕분에 원어민 영어교사들도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행사일인 2011년 4월 30일 날 새벽부터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는데, 그 비를 뚫고 3명의 친구들이 왔다.


참가자들은 강릉에 도착해서 북한 잠수함도 보고, 정동진 바다가 보이는 멋진 식당에서 맛있는 식사도 하고, 정동진 백사장에서 게임도 즐겁게 하였다. 바닷가 백사장에서 북한이탈주민과 원어민 영어교사, 봉사원들이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달려 반환점을 돌아오는 게임을 하였는데, 모두들 열심히 신나게 하였다. 언어가 달라도, 외모가 달라도, 국적이 달라도 서로 따뜻한 마음으로 통하는 것이 있구나 싶었다. 지나서도 이때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장미적십자봉사회 10주년을 맞아 열린 <북한이탈주민과 지역주민의 행복동행>




그렇지만 북한이탈주민 사업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쉽게도 충북하나센터는 3년간의 위탁기간이 끝난 뒤 2013년부터 산남종합사회복지관에서 맡게 되었다. 대한적십자사가 2005년부터 수행하던 북한이탈주민 정착도우미 사업도 정책적으로 종료되면서 개별 봉사활동을 제외한 활동은 마감하게 되었다.


나는 이 사업을 거치면서 여러모로 많은 경험을 했다. 충북하나센터를 준비하고 북한이탈주민과 관련기관 담당자들을 만나며 겪은 경험은 훗날 다른 업무를 할 때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감사업무 시 위탁사업에 대한 평가가 엇갈릴 때 기존 발전전략에 근거해 평가하고, 현장의 노력과 목소리를 정리해 보고할 수 있었던 것도 이때의 경험 덕분이다.


적십자가 북한이탈주민 사업에 앞장섰던 것은 정부의 보조자로서의 역할, 통일시대를 대비하는 역할, 남북을 잇는 역할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이탈주민 지원사업은 누가 맡더라도 계속될 수밖에 없다. 지금도 멈추지 않고 북한이탈주민의 정착지원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분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북한이탈주민의 더 나은 삶의 질 향상이 이루어지길 응원하고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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