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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데로샤 Jan 10. 2020

캄보디아로 떠났던 첫 해외봉사

나의 적십자 다이어리

"누군가에게 기쁨을 선사하는 행위는 자신까지도 기쁨으로 충만하게 만든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우리의 양손에, 가슴에 기쁨이 가득할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이다. 봉사자는 이웃에게 행복을 전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이타적인 마음으로 봉사하면서 이웃에게 기쁨을 선사하며 이를 통해 자신을 채워나간다. 봉사자들에게 이웃은 어디까지일까. 미디어가 발달하고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봉사자의 관심은 이제 국내를 넘어 국제사회로 뻗어가고 있다. 자연스럽게 해외봉사에 대한 바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2011년은 특별한 해였다. KBS와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매년 진행하던 방송모금을 대한적십자사가 한 해 맡게 되었다. 기존 적십자회비 외에 방송 기부금이 생겨 본사를 비롯해 각 지사는 새롭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추가로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신규 봉사프로그램을 여러 개 기획하고 있는데 봉사회 충북지사협의회에서 해외봉사를 제안해 왔다. 해외로 가는 봉사자의 참가비는 개별로 낼 테니, 방송 모금액에서 사업비를 지원받아 해외봉사를 추진해 보자는 제안이었다. 방송 모금액에서 해외봉사 참가비를 크게 지원한다면 뒷말이 나올 수 있겠지만 이 경우는 자발적 각출이다 보니 오해의 소지가 없었다. 해외봉사를 통해 우리는 사업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봉사자에게는 견문도 넓히고 새로운 동기를 얻는 계기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럼 어느 나라로 가지?"


처음이자 단기간 실시되는 해외봉사이다 보니 볼런투어 프로그램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볼런투어란 자원봉사를 뜻하는 볼런티어(Volunteer)와 여행의 투어(Tour)가 결합된 신조어다. 동남아시아 국가 중 여러 나라를 고려하다가 캄보디아를 해외봉사지로 낙점했다.


인터넷으로 '해외봉사'를 검색해 봤다. 블로그 글과 기사를 여러 개 읽어봤는데, 생색내기용으로 진행했을 것 같은 프로그램들이 엿보였다. 그래서는 안 될 일이었고, 우리의 취지와도 맞지 않아 보였다. 충북지사협의회 손한두 사무국장과 실무적으로 협의하면서 현지에서의 시간을 봉사활동으로 의미 있게 보내자는데 이견이 없었다.


계획안에는 캄보디아에서 충북으로 시집온 다문화여성과 가족의 친정방문도 포함시켰다. 기금 승인을 받기 위해서 '캄보디아 다문화가정 모국방문 및 해외봉사' 기획안을 만들어 지역사업국인 KBS청주방송총국에 제출하였다. 프로그램 기획안이 통과되었다. KBS청주 직원 5명(방송스태프 2명 포함)도 함께 해외봉사에 동참하기로 결정되었다.


8월에 출발하기로 일정을 확정했다. 남은 준비기간은 6개월. 사전답사를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준비에 빈틈이 발생하지 않도록 치밀한 준비를 해야 했다. 현지 적십자사 방문 및 견학(봉사) 프로그램은 본사 국제협력팀을 통해서 추진했다. 기타 봉사프로그램(우물, 급식 등)은 현지에서 오랫동안 활동 중인 비영리단체를 통해서 알아보았다. 일정들이 하나씩 확정되었다. 모국을 방문할 다문화가정은 지역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추천받은 대상자 가운데 최근 방문 기간, 가계소득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최종 4가구를 선정했다.


남의 집을 방문할 때 빈손으로 가지 않는 게 우리네 예의다. 봉사회 충북지사협의회는 현지인들에게 지원할 수 있는 기부물품을 주변으로부터 알아보기 시작했다. 무더운 나라이다 보니 두꺼운 옷은 필요가 없지만, 속옷은 현지에서 얼마든지 입을 수 있다. 봉사회의 노력으로 1000여 벌의 속옷세트가 후원품으로 접수되었다. 또한 가정상비약 등 간편 의약품도 후원받았다. 초, 중, 고 RCY(Red Cross Youth) 단원들이 연말에 제작한 우정의 선물상자(문구류, 공책 등) 100세트도 캄보디아 아이들을 위해 전달할 물품으로 확정되었다.

 



2011년 8월 24일 충북적십자사 강당에서 봉사원과 직원 19명, KBS 봉사원 5명, 다문화가족 4가구 14명으로 구성된 충북적십자 63년 역사상 첫 해외봉사단 발대식을 가졌다. 무더운 날씨였지만 먼 길을 떠나는 봉사자들을 격려하고 응원해주기 위해 많은 분들이 자리해 주셨다. 발대식이 끝나고 해외봉사단은 그동안 준비했던 구호품들을 모두 버스에 옮겨 싣고 인천국제공항으로 출발했다.


내가 적십자에 근무하고 있기 때문일까. 나는 적십자 조끼를 입으면 자존감이 올라가는 기분을 느낀다. 봉사원은 전통의 노란 봉사원복을 입고 있을 때 가장 아름다워 보인다. 해외봉사단이 똑같은 봉사원복에 모자를 쓰고 인천국제공항에 등장하니 여기저기서 호기심 있게 쳐다봤다. 적십자는 만국 공통의 브랜드라 외국인이 보아도 '아 해외봉사 가는구나' 생각하지 않았을까. 굳이 긴 설명이 필요 없다. 그렇게 우리는 인천국제공항을 떠나 5시간의 비행을 거쳐 캄보디아 프놈펜에 무사히 도착했다. 첫날은 이렇게 이동하는 여정으로 마무리됐다.


둘째 날 아침 해외봉사단은 숙소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프놈펜밥퍼공동체를 향해 출발했다. 근방까지는 쉽게 찾아갔다. 현지 가이드, 현지인 운전기사까지 있었지만 프놈펜밥퍼공동체를 정확히 찾아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여러 차례 전화를 하고 나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우리나라는 주소체계가 잘 갖춰져 있다. 내비게이션에서 나오는 여성의 말만 잘 들으면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다. 캄보디아와의 차이를 실감할 수 있었다.


현지 목사님이 운영하는 프놈펜밥퍼공동체에서 해외봉사단은 급식을 준비했다. 봉사원들은 한국에서도 매주, 매달 급식봉사를 꾸준히 해 오던 차라 일이 척척 진행되었다. 프놈펜밥퍼공동체가 빈민촌과 붙어 있다 보니 식사가 준비되는 사이 주변에 사는 아이들과 부모들이 모여들었다. 급식조가 아닌 봉사원들은 상처 난 아이들에게 간단한 치료도 해 주고, 아이들 머리도 감겨주었다. 아이들 머리에 이가 많았다. 우리도 어릴 적에 이가 다 있지 않았나. 나에게도 어릴 적 어머님이 참빗으로 이를 털어내 손톱으로 톡 잡아 주시던 기억이 있다. 그럼에도 까무스름한 피부에 맑은 눈망울을 가진 아이들이 참 이뻤다.  

무릎에 난 상처를 소독하는 최인석 봉사원


식사 준비가 끝났다. 봉사원들은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을 식판에 담았고, 무릎을 낮춰 아이들의 눈 높이에서 줄을 선 아이들 한 명씩 점심을 전달했다. 아동용 속옷세트와 사탕도 함께 주었다. 봉사원들의 얼굴에는 구슬땀이 흘렀지만, 표정은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급식봉사를 마친 뒤에는 다문화가족 중 킴스레앙씨 고향집을 방송팀과 방문했다. 신경 쓰지 말라고 하였는데도 바나나, 코코아, 현지 음식을 대접해 주셨다. 감사했다. 현지 주거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킴스레앙씨에게 남은 시간도 가족과 즐겁게 보내시라고 인사하고 작별했다.



셋째 날 해외봉사단은 캄보디아적십자사 프놈펜지사와 맬리스 심리사회적지지센터(PSSC)를 차례로 방문했다. 야외 봉사활동 시에는 그런 게 없지만, 기관 방문 시에는 갖춰야 할 최소한의 격식이 있기 때문에 약간 긴장이 됐다. 우리가 캄보디아 말을 아는 것도 아니고 영어로 의사소통을 진행해야 하는 것도 부담이었다. 우리는 프놈펜지사에서 캄보디아적십자사가 하는 사업들을 소개받았다. 우리는 준비해 간 CPR키트 3세트, 의약품, 속옷세트, 우정의선물상자 100세트를 전달하였다.  

캄보디아적십자사 프놈펜지사를 방문한 충북적십자 봉사원


다음으로 맬리스 심리사회적지지센터(PSSC)를 갔다. 맬리스 센터는 프랑스적십자사와 캄보디아적십자사가 프랑스 해외개발 원조기구의 지원을 받아 설립한 시설로 심리적지지, 도서관 운영, 문화활동을 담당하고 있었다. 고아원 아이들 350여 명을 관리하고 있는데, 이날은 70여 명의 아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는 프랑스적십자사 대표단 2명과 인사하고 기관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해외봉사단은 이곳 시설을 견학하고, 아이들의 캄보디아 전통춤 공연을 보고 나서 학용품을 전달하였다. 이곳 아이들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알고 있을까? 우리는 대한적십자사 소개 영상과 충청북도에서 제작한 관광영상 CD을 틀어주고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소개했다.


넷째 날은 우물 전달식이 있는 날이었다. 프놈펜에서 차를 타고 남쪽으로 쉬지 않고 2시간을 달려가 Kampot주 Banteaymeas군 VoatAngk면 Kandal마을에 도착했다. 하늘이 정말 맑았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버스가 들어가기 어려운 비포장도로에선 트럭을 개조한 차량에 옮겨 타고 들어갔다. 봉사원들은 이곳 마을을 보더니 마치 한국의 60~70년대 같다고 말했다. 전기가 들어오지도, 수도가 들어오지도 않는 낙후된 곳인데, 한 집만 그런 게 아니라 다들 그렇게 살고 있었다.

트럭을 개조한 차량을 타고 이동하다


캄보디아에서는 물을 잘못 먹으면 배탈이 난다고 한다. 석회질이 많기 때문이다. 물이 식수로 적합하지 않으니 영유아 사망률도 높다. 그래서인지 비가 올 때마다 물을 받아 쓰거나 마시는 용도로 쓰는 항아리가 집집마다 보였다. 정말 우물이 필요해 보였다. 장비가 좋으면 관정을 깊게 파서 전기로 물을 끌어올리면 되겠지만, 장비가 접근할 수 있는 도로상태도 아닐뿐더러 고장 났을 때에도 쉽게 고칠 수가 없다. 적정 수준의 우물이 요구되는 이유다.


해외봉사단은 현지에서 우물 마무리 작업을 함께 시공한 뒤 전달식을 가졌다. 그리고 인근 학교로 이동하여 마을 주민들과의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운동장에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 꽉 찼다. 봉사단은 준비한 과자와 속옷을 전달했다. 한 번의 관심과 방문만이 아니라 지속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삼 일간 쉬지 않고 해외봉사를 마무리했다.


우물 마무리 작업 2


다섯째 날은 현지 문화를 체험하는 시간을 가졌다. 킬링필드라는 잔혹한 역사에 가슴이 아팠고, 앙코르와트라는 훌륭한 세계문화유산에 감탄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모든 걸 뒤로 한채 귀국을 위해 프놈펜 공항으로 다시 이동했다. 육로를 이용하다 보니 이동시간이 참 많이 걸렸다.


공항에 도착하니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로 가득했다. 무슨 비상사태라도 생긴 걸까. 알고 보니 우리가 탈 한국행 비행기에 한국으로 직업연수를 떠나는 캄보디아 청년들 100여 명이 함께 탈 예정이었던 것이다. 누군가의 손자이고, 아들이고, 남편일 청년들이었다. 이들을 배웅하기 위해 온 가족들이 공항에 나온 것이다. 한 가족당 5명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500여 명은 족히 된다. 그 옛날 우리나라가 가난해서 가족을 광부나 간호사를 파독했을 때 우리의 공항도 이처럼 눈물바다였을 텐데 생각하니 마음이 찡했다.


충북적십자사 62년 역사상 최초로 떠난 해외봉사는 봉사활동을 무사히 마치고 아픈 사람 하나 없이 귀환하면서 끝이 났다. 해외봉사활동은 2편의 영상으로 만들어져 방송으로 소개됐다. 함께 동행했던 KBS 봉사원 분들이 내가 또 해외봉사 프로그램을 만들면 다시 참여하고 싶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그 말이 너무 기분 좋았다.


떠나기 전과 돌아온 후 우리는 무엇이 달라졌을까. 돌아오는 우리의 양손은 가벼워졌지만, 우리의 마음은 따뜻한 온기로 채워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웃에게 기쁨을 주는 봉사가 결국 우리 스스로를 성장하게 만들었음을 깨닫게 되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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