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적십자 다이어리
오늘은 제주 4.3 사건이 발생한 지 72주년 되는 날이다.
제주 4. 3 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에 발생한 소요사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출처: 두산백과)
당시 제주도 인구가 약 28만 명이었는데 희생자가 2만 5천에서 3만 명이었다고 하니 열 명중 한 명이 목숨을 잃은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일하다가 모니터 시계를 보니 10시가 조금 넘었길래 잠시 눈을 감고 마음으로 추념을 했다.
대학 2학년 때쯤 현기영의 소설집 <순이삼촌>을 처음 읽었던 것 같다. 제주 4. 3 사건을 다룬 이 책을 읽는데 너무 사실적이라 놀랐다. 진실을 폭로하는 소설이었다. 잔혹한 무력행위에 소스라치고, 가슴 아픈 역사에 마음 한편이 아렸다.
2013년 2월. 와이프 직장 지인들과 가족까지 9명이 모여 '제주 4. 3 기행'을 다녀왔다. 책과 역사와 답사를 좋아하는 분들의 모임에 나는 같이 동행하게 되었다. 답사기행을 위해 해설사까지 미리 섭외되어 있었다. 현지에서 만난 해설사분은 제주도에 있는 여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님이셨다. 게다가 청소년적십자(RCY) 지도교사로도 활동하고 계신 분이기도 하셨다.
우리는 해설사 선생님의 안내에 따라 제주 4. 3 평화기념관, 평화공원, 목시물굴, 낙선동 성터, 북촌리와 북촌초등학교, 애기무덤 순으로 답사하였다.
4. 3 평화기념관에서는 4. 3의 역사를 듣고, 당시 사건을 기념하는 작품들을 보았다. 평화공원에서는 희생자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힌 희생자비와 아이를 끌어안은 채 죽은 어머니를 형상화한 작품을 볼 수 있었다. 목시물굴은 토벌대를 피해 마을 주민 2백여 명이 숨어 지냈던 동굴이었다. 해설사 선생님이 토벌대가 주민들 나오라고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다는 설명을 하시다가 감정이 격해지셨는지 눈물 지으셔서 우리는 숙연해졌다.
낙선동 성터에서는 한 할아버지가 우리를 보고 다가오셨다. 할아버지는 4. 3 사건 때 열일곱 살이었다고 하시면서 그때 상황을 들려주시기도 했다. 다음으로 찾은 소설 <순이삼촌>의 무대가 된 북촌리에서는 너븐숭이 기념관을 찾았고, 죽은 엄마의 젖을 빠는 아이 모습을 그린 강요백 화백의 작품 '젖먹이'를 보니 참담한 마음이 들었다. 관광지로 익숙한 제주도가 이렇게 아픈 역사를 가진 섬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강요배 화백의 책 <동백꽃지다>와 그림 <젖먹이>
답사를 하는 동안 한 가지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왜 이들은 국제인도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을까?' 내가 다니는 대한적십자사에서 국제인도법 보급을 하고 있기 때문에 드는 생각이었다.
국제인도법(International Humanitarian Law)은 무력충돌 시 전투능력을 상실하였거나 적대행위에 가담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하여 국적, 인종, 종교, 계급정치적 견해 등에 어떠한 차별 없이 그들이 생명을 보호하고 존엄성을 보장하기 만들어진 법이다.
이탈리아 솔페리노 전투에서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적십자의 아버지 장 앙리뒤낭의 제안에서 국제인도법은 시작되었는데, 분명 1949년 민간인 보호에 관한 제네바협약이 추가돼 민간인이 보호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1954년까지 민간인 희생이 계속 이어졌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국제인도법의 위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희생은 컸고, 아픔은 깊이 베인 상처처럼 남아 있다.
앞으로 이런 비극이 반복되어선 안 될 것이다. 어떤 이유라도 더 이상 민간인에 대한 무력이 용인되어선 안 된다. 평화야 말로 우리가 추구하는 대명제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고통은 그 어떤 아픔보다 크고 오래간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1. 국제인도법의 기원
국제인도법의 역사는 적십자운동의 기원과 깊은 관련이 있다. 1859년 이탈리아의 샤르디니아 공국은 프랑스와 연합하여 이탈리아의 통일을 위하여 롬바르디니아라는 큰 평원이 있는 솔페리노의 언덕에서 오스트리아 군과 전투를 하게 되었다. 이 솔페리노 전투는 교전 양측 4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격렬하고 참혹한 전투였다.
당시 스위스의 사업가였던 앙리뒤낭은 개인사업차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3세를 만나기 위하여 솔페리노를 지나가다 우연히 이 전투의 처참함을 목격하고 자기의 사업은 잊은 채 마을 부녀자들과 함께 부상병들을 위하여 헌신적인 구호를 하였다. 그 후 제네바로 돌아간 뒤낭은 3년간의 집필 끝에 솔페리노에서의 참상을 다룬 ‘솔페리노의 회상’을 저술하여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혁신적인 제안을 하게 된다. 이러한 혁신적 생각을 담은 솔페리노 회상은 당시 유럽 전역에서 비상한 관심과 공감대를 불러일으켜 적십자사의 설립과 1864년 육전에 있어서의 부상자 보호를 위한 최초의 제네바협약으로 구체화되었다.
1864년 최초의 제네바협약은 전쟁이 양상이 점차 변화함에 따라 이것을 해전에 적용하기 위하여 1899년 7월 29일 자 헤이그협약이 제정되었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토대로 1929년 포로의 대우에 관한 제네바협약이 제정되었다. 그 후 동 3개의 제네바협약이 제2차 세계대전까지 적용되어 오는 과정에서 발견된 비미한 사항과 보완하는 작업이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에 의해 착수되어 1949년 민간인 보호에 관한 협약이 추가로 채택됨으로써 무력충돌 희생자 보호에 관한 4개의 제네바협약이 완성되었다.
국제인도법의 여러 조약 중 가장 잘 알려진 제네바협약은 현재 전 세계 194개국에 의해 비준되었으며 다수의 국제인도법의 조항들은 가입 여부없이 모든 국가에 적용될 수 있는 관습법으로도 보편성을 확보하고 있다.
<출처 : 대한적십자사 인도법연구소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