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이야기 1 -달과 6펜스

피아노, 두번째 만남

by 얼룩


지금부터 쓸 이야기는 2023년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나의 가장 뜨거운 기억을 기록하는 것을 미뤄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그리고 나의 너무 처절한 기억도 누군가에게 구경거리가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시작한 글이다.

그러니 이 글을 읽을 당신들의 공감, 비판, 비웃음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 긴 이야기가 끝날 때 즈음엔, 이 기억도 이젠 몰리에르의 희극처럼 가볍게 훌훌 날아가길 바랄 뿐이다.


Debussy: Prelude Op.1 No.8

손에 쥔 6펜스를 놓고 달을 좇는 그는 진정 행복한 듯 보였다.


2023년 11월18일


이 날은 내가 처음 수능을 본 날이다.

그 날은 아침부터 우중충하고 끝나고 교문 밖을 나설 때는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이미 1교시 국어 시간부터 내 수능이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엄마한테 혼나는게 무서워서 학교선생님과 엄마에게 가채점을 거짓말해버린다.

정확히 1등급씩 높여서 말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마킹은 확인 안 해서 밀려썼을 수도 있다고 조건을 달고.

나는 모의고사 점수는 꽤 괜찮았던 학생이라 선생님도 평소보다 잘 본 것 같다며 내 말을 믿으셨다.

그리고 우리 엄마는 아직도 내 첫 수능이 망한 이유가 마킹이 밀려서라고 알고있다.


혹시나 여기까지 읽었을 당신을 위해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자기소개를 짧게 해보겠다.

나는 정말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쳤었는데, 초등학교 고학년 때 이사오며 다니던 학원을 그만두고 콩쿨과 입시를 위한 피아노는 끝나고 만다.

당시 엄마 아빠 사이의 불화와 이혼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피폐해져 있던 엄마께 피아노가 계속 치고 싶다고 절대 말할 수 없었고

그때부터 음악에 대한 꿈은 꽁꽁 접어두게 된다.

그 이후로도 밴드부 활동 그리고 작곡, 미디도 독학하며 음악에 대한 사랑을 끊임없이 스스로 표출하곤 했지만

혹여나 엄마가 이걸 알면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나에게 돈이 드는 음악을 지원해줄까봐 남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 전까지 스스로에게 계속 세뇌했다.

‘너가 진짜 원하는 건 음악이 아니야. 너의 진짜 꿈은 음악인이 아니야. 너는 음악인이 되고 싶지 않잖아. 그렇지?’ 라고.


2023년 12월 8일


이 날은 내 수능 성적표를 받은 날이다.

가채점 점수와 비교도 안 되게 낮은 점수에 당연히 선생님도 엄마도 너무 놀랐다.

정작 나는 명문대학에 대한 큰 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상한 대로였기에 감흥이 없었지만

내가 사랑하는 엄마가 슬퍼하는 모습에 같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함께 울다가 갑자기 엄마가 그냥 이참에 음대입시를 해보라고 권유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그렇게 감추려고 했던 음악도 엄마 눈엔 다 티가 나긴 했나보다.

그런데 나는 그때 스스로가 주입한 세뇌로 가득차있었기 때문에 절대 음악은 안 된다고 말했다. 거긴 만만한 것 같냐고, 돈은 벌어먹고 살 것 같냐고 말했다.


정말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는데.

내가 나를 속이고 버리는 일은 절대 어떤 핑계로도 인정받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을 너무 오랜시간 부정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부정하는 파괴적인 역사의 끝은 좌절 뿐이다.

아무도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몇 분이 지나고 그런 말을 하는 나를 엄마는 근처에 피아노 연습실로 끌고 갔다.

그리고 강남역에 계시는 음대 입시 레슨선생님에게 레슨상담을 예약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자기 앞에서 쳐볼 곡 하나를 준비해오라고 했다고 한다.

연습실에 들어간 이후로도 엄마에게 음악이 하고 싶지 않은 척을 계속 했다. 칠 줄 모르는 척 했다.

당연히 모든 걸 다 해줬는데도 불성실한 나의 태도에 엄마가 크게 화를 냈고 나는 또 갈등이 너무 싫어서 될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정말 오랜만에 피아노 연습을 시작했다.

악보도 사라지고, 기억 나는 곡이 거의 없었다. 끝까지 기억나는게 한 곡밖에 없어서 악보를 보고 연습하기 시작했다.


Clementi Sonatine Op.36-3, Mov. 1


연습하면서도 정말 하면 안 되는 생각이지만, 이런 수준 낮은 곡을 치는 나를 피아노 레슨 선생님은 얼마나 하찮게 볼까라는 생각뿐이었다.

레슨 선생님 앞에 가서 피아노를 치고 나서야 깨달았다.

수준 낮은 건 곡이 아니라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나였다는 걸. 뻔뻔하게도 가장 사랑하는 음악 앞에서 멍청한 나 자신을 깨닫지 못했다는 걸.

지금은 치는 둥 마는 둥 하는 나를 볼 때 선생님은 얼마나 어이없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상담이 끝나고 선생님이 나에게 말했다.

너가 하고 싶어야, 할 의지가 있어야 대학이든 뭐든 도전해볼 수 있는 거라고.


그 날은 강남역에서 출발해 밤 10시가 다되서야 집에 도착했다.

그때까지도 정신 못차리고 피아노 안 친다고 음악 안 한다고 난리를 쳤고 집안은 완전 냉전상태가 되었다.

엄마가 다시 피폐해져갔고 나는 견딜 수 없어서 공부 할 일이 없는데도 독서실에 가 있는 하루가 반복되었다.


2023년 12월 9일


차가운 집안 분위기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될대로 되라는 생각으로 피아노 하겠다고 선생님께 말했다.

그제서야 엄마도 웃었다.

1시간에 13만원. 왕복 3시간 거리에 강남역 레슨실.

나는 전략적으로 음대 중 성적 반영비율이 높은 서울대 음악학과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고3 겨울방학에. 처음으로.

하고 싶다는 생각에 시작한 일이 아니었지만 시작한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콩콩 뛰는 기분이었다.

돈과 시간의 비용이 무겁게 나를 눌렀지만, 무게를 뚫고서도 방출되는 설렘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때 갑자기 달과 6펜스에 북마킹해뒀던 글이 생각났던 기억이 난다.


손에 쥔 6펜스를 놓고 달을 좇는 그는 진정 행복한 듯 보였다.




12월 10일의 첫 레슨부터 이어지는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작성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만약 이걸 읽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도 한 없이 많이 들은 말이겠지만

사랑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무한히, 온 힘이 다하도록 표현했으면 좋겠다.

설령 다 표현하진 못할지라도 억누르진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이 함부로 당신을 억누른 대가는 생각 할 수 없을 만큼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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