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zurkas, Op.24: No.4 in B-Flat Minor
낭만주의는 이성을 통해 감성을 억누르려 했던 1000년이 넘는 인간의 역사에 반발하여 탄생한 감성의 시대이다. 하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감성이 폭발하며 탄생한 감성의 시대는 고작 100년 만에 사라졌다. 낭만주의는 한여름 밤의 꿈처럼 인간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여운을 남긴 채 시간의 흐름 속으로 잠들었다.
이 이야기는 내 인생의 낭만주의와 한겨울 밤의 꿈을 담고 있다. 지금부터 실기를 한 달 남짓 앞둔 시점에서 다시 피아노 앞에 앉은 한겨울의 그때로 돌아간다. 나 자신이 가한 오래된 억압에 반발한 그때로 돌아간다.
감미롭기 그지없는
선율들 무연한 선율들
(월광—푸른빛의 비망록)
2023년 12월 10일
이 날은 첫 피아노 레슨일이었다. 실기가 두 달도 안 남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전날 레슨 선생님에게 지정곡을 안내받고 자유곡을 선택했다. 당시 지정곡은 쇼팽의 마주르카였다. 선생님이 지정곡은 발표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늦게 시작한 건 별 문제가 안 된다고 하셨다. 자유곡이 문제였다. 자유곡은 보통 개인 별로 가장 자신 있는 곡을 1년 전부터도 준비하기 때문이다. 남들은 한참 전부터 갈고닦았을 연주와 두 달이 안 되는 시간 동안 훈련한 연주를 겨뤄야 한다는 것이 나에게 매우 불리했다. 그래서 최대한 쉽게 연주할 수 있으면서도 남들 눈에 잘 치는 것처럼 보일만한 곡으로 준비하기로 했다.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와 그라나도스의 알레그로 데 콘체르토 중 그라나도스를 자유곡으로 선택했다. 이유는 없었다. 왠지 끌리고 듣기 좋아서 선택했다.
Mazurkas, Op.24: No.4 in B-Flat Minor
쇼팽의 마주르카는 왈츠(춤곡) 중 하나로 폴란드 민요 기반의 피아노 작품이다. 내가 느끼기에 원래 마주르카가 신나는 왈츠 느낌이라면 쇼팽의 마주르카는 고장 난 왈츠 같다. 쇼팽의 마주르카에서는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대상을 떠올릴 때 이전의 기억 속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빛나는 기억으로 변해가는 혼란스러운 감정과 쓸쓸함이 느껴지는 어색한 순간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쇼팽의 마주르카를 두고 쇼팽의 향수와 음악에 대한 생각, 애국심, 사랑 등이 담겨있다고 말하곤 한다.
그라나도스의 알레그로 데 콘체르토는 곡의 뒤에서 느껴지는 감정보다는 선율 자체가 부드럽고 듣기 좋다. 처음 들었을 때에는 첫 도입부가 매우 강렬해서 매력적이라고 느꼈고 이후에 연습하면서는 오히려 노래하는 부분에서 느껴지는 우아함이 좋았다.
그렇게 레슨 전 2곡을 정하고 악보를 프린트했다. 당시에 나는 워낙 악보를 본 지가 오래되어서 악보만 보고는 어떻게 쳐야 할지 감이 안 와서 음악을 듣고 대충 거기 맞춰서 첫 수업 전에 예습해 갔던 기억이 있다. 물론 손이 굳어서 계이름만 어정쩡하게 치는 수준이었다. 그때 연습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첫 레슨 날은 비가 엄청 많이 오던 날이었는데 레슨 전에 연습하기 위해 신논현역 골목길 지하에 있는 피아노 연습실을 어찌어찌 찾아갔다. 비 때문에 몸도 축축해지고 날씨도 엄청 추웠다. 골목길도 어두워서 두 번이나 왔던 길을 헷갈렸다. 그래도 설레는 일이었다. 달을 좇으며 행복해하던 스트릭랜드처럼 스스로 버린 꿈을 간신히 손에 쥔 나는 설렘으로 가득 찼다.
연습을 끝내고 신논현역에서 강남역에 있는 레슨 장소까지 걸어갔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아서 귀에 이어폰을 꽂고 마주르카를 들으면서 갔다. 연말 밤거리의 화려한 분위기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음악을 들으며 가는 내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땐 아무것도 몰라서 그냥 에코백에 악보를 넣은 L자 파일을 들고 갔는데, 비 때문에 악보가 다 젖을까 불안했다. 그래서 두 번째 수업부터는 비에 젖지 않게 악보 제본도 하고 닫을 수 있는 가방을 들고 다녔다.
첫 레슨은 나의 부족함만 느껴지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악보 읽는 것부터 다시 했고 계이름과 손가락 번호도 적었다. 그때 선생님께서 완전 기초부터 알려주신 덕에 나중에 악보 예습해갈 때 어려움이 덜했다. 입시 준비기간 내내 레슨 때 많이 지적받았지만 항상 레슨만 손꼽아 기다렸다. 단지 레슨실에 있는 야마하 그랜드 피아노 때문에. 나는 뚜껑 열린 그랜드 피아노 소리를 좋아한다. 반면 선생님께서는 레슨 하실 때 소리가 울려서 제대로 안 들린다는 이유로 피아노 뚜껑을 잘 안 열어 주셨지만. 그래도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는 순간이 정말 행복했었다. 레슨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악보를 피고 혼자 음악을 들으며 손가락을 두드리며 연습했던 기억이 난다. 잘해야겠다는 생각보다 계속하고 싶단 생각뿐이었던 날들이었다. 행복하다는 생각보다 내 안에 처음으로 살아가야 할 이유가 꿈틀대는 날들이었고 처음으로 미래를 기대하던 순간이었다. 내게 꿈처럼 다가온 모든 것들이 꿈처럼 사라질까 두려워 떠나지 못하도록 붙잡기 위해서 치열하게 노력했다.
2023년 12월 12일
피아노 연습실 한 달권을 처음 결제한 날이다. 집에서 버스로 20분 정도 걸리는 곳이었다. 연습실 가는 버스도 집 앞 버스 정류장에는 안 서서 도보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버스정류장에 가서 버스를 타야 했다. 이렇게 거리가 있음에도 그 연습실을 택한 이유는 단지 가격 때문이었다. 피아노 연습실은 업라이트 기준 보통 1시간에 7000원~11000원 정도였던 거로 기억한다. 월단위로 결제하면 조금 저렴해지는데 여기가 특히 저렴했다. 20만 원. 한적한 아파트 주변 상가에 있는 할아버지가 운영하시는 연습실이었다. 피아노도 연습하기에 충분했다. 나중에 입시가 다가오고 나서는 다른 연습실로 옮겼지만 내 두 번째 피아노의 시작을 함께 했던 곳이라 지금 생각해도 애틋하다. 레슨이 없는 날은 하루 종일, 레슨이 있는 날은 밤 12시가 돼서야 연습실에서 나왔다. 연습실에서는 연습하다 울기도 하고, 옆 방에서 들리는 레슨을 엿들으며 음악을 한다는 사장님의 따님을 속으로 부러워하기도 했다.
내 인생의 낭만주의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음악이라는 맹목성 아래에서 끊임없이 빛과 설렘만을 찾아다녔다. 꿈으로 배불러 가는 심장을 멈출 수 없었다. 처음으로 사랑하는 것에 온몸과 마음을 바쳐 사랑을 표현한 날들이었다. 나의 꿈을 향한 여정은 이어진다. 만약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이 계시다면 이런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여 주신 것에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다음 글에서도 당신을 만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