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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렷 경래 Sep 01. 2022

수필로 보는 수필 ( 1) - 혼으로 쓰는 글

수필에 관한 참고 서적을 뒤지다 알토란 같은 글을 발견했다. 글이란 것이 잘못하면 곁길로 가기 쉬운데, 말이나 생각으로 구상한 본래 목적에서 가지를 칠 수도 있고, 미사여구로 장식하거나 과장된 내용을 채우다 아예 다른 내용이 되기도 한다.. 진솔하지 못한 글, 자기를 사실과 달리 표현하고 싶은 내용, 역사가 왜곡되고 미래에 대한 허구를 늘어놓는 글은 문학으로서 뿐만 아니라, 기사나 메모로서의 일면에서도 값어치를 부여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 위험성은 누구랄 것도 없다. 자칫 한눈팔다가 빠지는 가려진 구덩이 같다고나 할까? 앙꼬 빠진 빵이 맛이 없듯이, 진실과 명료함이 빠진 글은 감동을 전혀 주지 못할 것이다..


삶이 편할 때는 도무지 글이 나오지 않는 경험을 종종 한다. 쥐어 짜내어도 국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그런 깡마름이다. 그러느니, 무료한 시간, 차라리 쓰려고 하느니 다른 이의 책을 읽는 것이 나을 때가 있다. 그런데 땜질식으로 이렇게 접한 글에서 보석을 만나기도 한다. 아주 흔한 소재로 맛깔나게 써 내려가는 작품을 대하기란 기분 좋은 경험이다.


그럴 땐 나도 이렇게 쓰고 싶다는 욕구로 충만하게 되는데, 막상 펜을 잡으면 서두부터 막힌다. 첫 문장이 떨어지지 않는 일이란 튼튼하게 생긴 기차가 출발하지 못하는 꼴이다. 수십 량의 화물을 채비해 놓고 달리지 못하는 기관차를 떠올리자. 그 답답함이란 어디에 비교할까!


수필에 관해 토론을 하자면 밤을 새워라도 할 수 있지만, 짧으면서 명료하게, 그러면서 너무도 쉽게 "수필'에 관해 알려주는 사전 같은 글이 반숙자의 "혼으로 쓰는 글"이 아닐까 감히 생각해 본다.


흔들리며 쓰는 글, 외로워서 기댈 곳 없을 때 글에라도 기대어 쓰던 글, 바로 내 주위에서 찾은 글감으로 쓰는 글, 자신의 허점까지 고백하며 쓰는 글, 노트에 빼곡한 글감 들을 잘 짜깁기하여 나의 렌즈를 통해 표현해 내는 글, 그런 글에 가치를 부여한다.





 혼으로 쓰는 글

                                                                                                       반숙자




들녘에 피어나는 들국화는 피고 싶어서 핀다. 꽃더러 왜 피느냐고 묻지 말라. 살아 있음의 가장 확실한 모습임을.....

내가 수필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느 시인은 나에게 가슴으로 오는 소리를 듣고, 가슴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도 하고, 어느 분은 혼(魂)으로 쓰는 글이라고 한다. 삭여 보면, 본능적인 욕구의 표현 행위로 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작가가 작품을 쓸 때 그는 곧 자신의 생명을 피우는 작업이라 생각한다. 수필이라는 나의 꽃은 암울했던 시기에 구원의 손길로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가가 된다거나 지면에 발표하려는 꿈을 갖지 못하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고통이 글을 쓰게 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살아날 수 있었다.

누구에게 기대어 위로받고 싶거나 스스로 무너질 때 차오르는 비애를 기도하듯 쓰다 보면, 바람은 잔잔해지고 삶의 구실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글이다. 친구이듯 스승이듯 붙잡아 주고 다독여 준 수필, 그래서 엄격하게 이렇게 저렇게 써야 한다고 주문하지 않았다. 이론에 급급하다 보면, 쓰고 싶은 대로 써지지 않았다. 나의 글이 잡초처럼 질기고 모양 없음은 거기에 기인된 것이 아닐까 한다.

다만, 어떻게 쓰느냐보다 무엇을 쓰느냐에 마음을 쓴다. 글감이 진국이면 표현이나 구성에 다소의 무리가 있다 해도 전달되는 공감은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써 갈수록 까다로워지고 모르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나는 수없이 흔들리며 글을 쓴다. 그것을 미완(未完)의 허무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감성, 체험, 지식, 사유를 동원하여 쓰지만, 써 놓고 보면 미흡하기 짝이 없다. 지금도 마감일에 쫓겨 원고를 부치고 나면 몹시 앓는다. 또 활자화되어 나오는 글이 부끄럽고 두려워서 열어 보지 못하고 며칠을 보낸다. 그때의 부끄러움과 허탈함이 뒷 글을 생각하게 하고 쓰게 하는지 모른다. 수필이 개성의 문학이라 하고, 한 작가가 쓰는 작품이 같을 수 없음은 편 편마다 느껴지는 대상이 다르고, 표현의 기법도 새로움을 요구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런 나에게 수필 작법이라는 트인 도(道)가 없다. 다만, 오래전부터 몸에 밴 버릇이 몇 가지 있다.

자유로운 시간을 가질 때마다 글을 쓴다. 일상생활에서 평범하게 지나칠 수 없는 대상들 자연과 사람들, 모든 사물들과의 교감을 느낌대로 기록해 둔다. 그런 습관은 잠들지 못하도록 의식을 깨우고, 사물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길러 주는 것 같다. 또 섬광처럼 지나가는 영감들을 메모한다.

개미가 먹이를 물어 나르듯이 나의 체험을 확대하기 위해 자료를 모으고 스크랩한다. 이 노트는 내 글감의 창고다. 그러나 창고의 글감들이 다 그대로 원고지로 옮겨지는 것은 아니다. 내 것을 소화되고, 그때의 주제와 접목되었을 때 가능하다.

나는 주제가 붙어서 오는 청탁 원고 쓰기가 어렵다. 기량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고, 독자를 의식하거나 잘 써 보려는 욕심 때문이 아닐까 싶다. 더 흔들인가. 매번 쓰는 글인데도 절벽 앞에 서 있는 느낌이다. 어떤 때는 안개 자욱한 빙벽이고, 어떤 때는 손을 내밀면 잡힐 듯하다가 저만치 물러가고 더 가까이 다가서면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피안의 영봉, 시시각각 변하는 사유의 성(城)이다.

절벽 앞에서 마음이 고요해지기를 기다린다. 기억을 뒤져 보고 쉽게 상(想)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메모 노트를 펼친다. 어떤 분은 그것을 '예술적 감흥'이라고 표현했지만, 나는 계기 또는 충동이라고 생각한다. 계기나 충동에 의해 대상이 잡히면 주제를 향해 소제들을 모으고,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 고심한다. 그리고 나는 왜 이 글을 쓰는가, 자문하면서 제목을 잡는다.

글을 쓰는 사람이면 공통된 난제가 첫대목이다. 첫대목에서 글의 주제를 암시할 수 있으면 더욱 좋다. 그러나 첫 구보다 더 많이 생각하는 것은 마지막 구절이다. 글 쓸 때의 유의점은 나 자신에게 정직하려고 노력한다. 작가는 자신만치의 글을 쓴다. 잘 쓰려고 애쓰는 대신, 나의 렌즈를 통해서 느껴지는 것을 담담하게 쓰고자 한다.

감추지 말고 자신의 부족한 면까지 성찰하고 고백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수필은 곧 그 사람이 된다. 그런 면에서 수필은 나에게 허구를 허락하지 않고, 인격적인 만남을 요구한다. 문장은 소박하고 되도록이면 쉽게 쓰고자 한다. 편견이 아닌 보편적인 진실의 모습을 나의 사유로 걸러 나의 그림으로 형상화하려 한다.

글 쓰는 일을 산고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나는 열병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쓰고자 하는 대상과의 어우러짐, 그것은 밀애와도 흡사한 심적 충동이다. 자나 깨나 오로지 탐구하고 유인하고 애무하고, 의식은 한 층계씩 내면으로 침잠한다. 열이 오른다. 눈빛이 비어 가고 오관의 넋이 빠져 버린 허수아비가 되면서, 눈부신 빛줄기를 따라간다. 그럴 때 나는 수필 혼과 접신된다.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끌고 가서 가슴을 열어 주면 일사천리로 절벽을 오른다. 그렇게 마무리 짓는 것은 퇴고를 많이 하지 못한다. 아마도 사랑에 눈이 먼 탓일 것이다. 내 안에 고여서 출렁이는 것을 쓸 때의 일이다.

대개의 경우는 노트에 초벌을 쓰고, 원고지에 세 번쯤 옮기면서 가지를 쳐낸다. 청탁 기일에 쫓기지 않으면 서랍 속에 묵히면서 퇴고를 한다. 지금까지의 글이 살고 싶다는 외마디 소리였다면, 앞으로의 들국화 같은 수필을 쓰고 싶다.

악천후의 기상에도 쇠하지 않고 무서리 내린 들녘에 다소곳이 피어나는 들국화, 저만의 조용한 품격을 지니고 깊은 사색으로 결을 삭여 내 아름다운 혼이 깃든 글, 유연하게 흐르되 뼈가 있는 글, 사람의 가장 깊은 곳으로 스며드는 감동의 향기가 있는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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