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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월문 이룰성 Sep 30. 2021

세탁기의 심정

 집의 어느 구석에서 조용히, 쥐 죽은 듯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덩치가 큰 세탁기.

살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세탁기는 도대체 누가 만들었지? 참 고맙네.'


 사람에게 유용한 발명품이 수도 없이 많지만, 유독 1인 가구로 살면서는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되는 세탁기가 눈에 밟힌다. 혼자 밥을 해 먹고, 청소하고, 아무리 좁은 원룸이라지만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빨래까지 직접 손으로 해야 한다면? 손빨래를 해본 사람이라면, 직접 세탁물의 물기를 손으로 쥐어짜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원룸에 살면서 어렸을 적 집에서 엄마가 매주 빨래하시느라 얼마나 고생을 하셨는지 어렴풋이 느끼곤 한다. 그래서 가끔 고향집에 갈 때 혹여나 빨래를 널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곤 괜히 됐다고, 혼자 해도 된다고 말씀하셔도 도우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사람 한 명에게 나오는 빨래 양이 생각보다 빨리, 많이 쌓인다. 가족 구성원의 빨래를 도맡아서 한다면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원룸에 있는 세탁기는 자기가 일할 때 말고는 정말 쥐 죽은 듯 조용하다고 느껴진다. 일할 때는 무척이나 시끄럽기 때문이다. 방음에 약한 건물 구조상, 윗집인지, 옆집인지 잘 모르지만 탈수할 때의 세탁기의 진동이 느껴진다. 다가구 주택에서는 빨래하는 시간도 중요하다. 늦은 밤 세탁기를 돌리면 그야말로 민폐가 따로 없다. 그러나 늦은 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본의 아니게 또 피해 아닌 피해를 줄 수도 있다. 누군가는 밤에 일을 하시고 낮에 주무시는데, 내가 낮에 세탁기를 돌리는 바람에 소음으로 신경 쓰이게 할 수도 있다는 것. 이것저것 다 신경 쓰다 보면 어떻게 살까 싶지만, 요즘 이웃 간의 다툼에서 일어나는 범죄에 대한 뉴스를 보다 보면, 괜히 한 번 더 생각하고 세탁 시간을 정하게 된다.


'세탁기의 심정'을 생각해본 적이 있다. 아무리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발명품이자 물건이라지만, 하루, 며칠 동안의 집에 사는 사람의 흔적이 노골적으로 잘 묻어있는 옷의 청결과 관리를 맡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고마운 조수 같은 존재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원룸에 오래 살다 보니 이상하게 보일 진 모르겠으나 세탁기와 냉장고, 옷장 등과 한 번씩 대화를 시도해보곤 한다. 세탁기는 사생활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물건이다. 그렇기에 특히나 나는 세탁기와 조금 더 긴밀한,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한다.


'미안하다...이번엔 냄새가 좀 심할지도 모르겠네.'
'니도 계절의 변화를 빠르게 느끼겠구나...감정적인 녀석.'

'이번 주는 네가 봐도 좀 열심히 살았제? 내가 요즘 이렇게 산다~'

'야.. 목 좀 안 늘어나게 살살 잘 좀 해줄 수 없나?.'

'니도 참, 누구보다 그 얼룩을 누구보다 지우고 싶었을 텐데.. 이번엔 조금 실망이다.'

'이번 주는 운동을 좀 자주 했더니 양이 많네~.'

'비 냄새 맡으니까 어떠냐? 니도 추억이란 게 있나?..'

'니는 어쩌면 내 친한 친구가 집에 얼마나 자주 오는지도 알겠네.'

'니는 근데, 참 듬직하고 믿음직스럽긴 하네.'
'어쩌면 니도 뿌듯함이란 걸 느낄지도 모르겠네.'


 나는 가끔 세탁기가 부럽기도 느껴지기도 한다. 아무리 집안 어느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해도 존재감이 확실하며, 자기의 존재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고, 할 일을 분명히 알고 있고, 특별한 이변이 없는 이상 항상 꾸준하게, 기복 없이 일을 잘 처리한다. 또 이러하듯, 자기의 할 일을 묵묵히, 꾸준하게 하다 보면 자신이 어떤 모양과 형상으로 존재하든 예상치 못한 누군가가 말을 걸어주며 관심을 가져주고 어떤 누군가는 '기계를 생명체처럼 대하며 생각해주기도 한다.'  


 세탁기 입장에서는 이 모든 것이 부질없고 소용없는 것일지라도 글쎄, 사람과 동거 동락하는 기계장치로 인해 하나의 글이라는 것이 써지고 그것으로 인해 생각보다는 많은 생명체의 사고에 어떠한 변화를 불러일으킬지는 그 아무도 모른다.


'자슥아, 내가 보니까 니는 더 열심히 살아야겠는데? 단디하자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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