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순간, 그의 음성을 듣고 얼어버렸고
2초 만에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했다.
나는 그가 "어이!"라고 크게 소리치는 것을
못 들은 체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올 것이 왔구나...'하고 체념하며 모든 것을 운에 맡긴 채로.
코너를 돌았고 나는 그의 시야에서 잠깐 사라졌다.
그러나 그는 나를 쫓아오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흥분한 채로 언성을 높였다.
"어이! 거기 멈춰!" 다가오는 미지의 공포심에 질려 본능적으로 빠른 걸음은 뜀박질로 바뀌었다. 다섯 걸음이나 뛰었을까, 내가 메고 있던 백팩 가방이 어떤 큰 물체에 사로잡혔고 그제야 나는 뒤를 돌아봤다. "이거 왜 이러세요?!"
중년으로 보이는 아파트 경비원이 씩씩거리며 나의 가방을 팔로 감싸 안은 채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의지를 힘으로 표출했다.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힘의 차이를 선명하게 느꼈고, 그가 행하는 대로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너 이리 와."
그는 나를 아파트 차도 옆, 경비실로 쓰는 작은 컨테이너 안으로 순식간에 끌고 갔다. 그는 마치 투우장 속의 흥분을 주체할 수 없는 한 마리의 황소 그 자체였고, 나는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이리저리 흔들리며 처참하고 비참하게 끌려갔다.
그는 안으로 들어오자 내 가방을 빼앗고는 가방 지퍼를 강제로 열어 내가 한 짓을 공공연하게 증명해 보이려고 했다. 지퍼가 열리기 직전에 나는 그를 멈춰 세우며 말했다. "제가 한 거 맞습니다. 일단 이거 놓으세요."
연하늘색 유니폼이 터질 듯한, 족히 100kg가 넘는 거구의 근육질 중년 남자가 출구를 가로막은채 "이 새끼가..어디 말이야.."하고 중얼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 경비실 안에는 수많은 CCTV 화면을 보고 있던 마른 체형의 까무잡잡한 중년 남자 동료 경비원이 한 명 더 있었다. 이 남자는 궁지에 몰린 나와 흥분한 동료를 말없이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 거구의 남자는 흥분한 채로 손에 구깃구깃 들고 있던, 내가 105동 건물 현관문에 붙였던 홍보 전단지를 패대기치며 말했다. "이딴 거를 붙이면 어쩌자는 거야!!"
"일단... 진정하시고요...! 반말하지 마세요. 아저씨 저 알아요? 저 언제 봤습니까?!"
"근데 이 새끼가 이게!"
그는 그 굵직한 근육질의 두 팔로 갑자기 내 멱살을 잡았다. 그는 금방이라도 나를 던져버리거나 패 버릴 듯한 기세였다. 동료 경비원도 당황했는지 급하게 그를 말렸다.
"어허, 일단 이거는 놓자. 일단 놓고!"
대화로 충분히 그 상황이 해결되리라고 굳게 믿어왔던 나는 그 순간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아 잠시 말문이 턱 막혔다.
한쪽 벽면의 수많은 CCTV 화면 속에 지금 세 명이 있는 이 좁은 장소가 비치는 곳은 한 군데도 없는 것을 눈으로 빠르게 확인했다. 나는 다시 한번 말했다.
"이거...... 제가 붙인 게 맞습니다."
화를 삭이는 듯 고개를 뒤로 젖히고 몸을 들썩거리며 양 팔을 허리춤에 얹은 그를 나에게서 떼어두고 동료인 경비원이 말했다.
"105동에만 붙였는교?"
"아니요...... 다른 동도 붙였습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 가방에 있는 거는 요 옆에 보면 분리수거하는 곳 있으니까... 그따가 버리뿌고.. 그래 하이소. 그리고 이거 붙이는 거 엄연히 불법이에요 불법. 그라믄 안 돼."
"아, 예...더 이상 붙이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다......저도 사정이 있어가지고요."
뒤에 있던 황소가 또다시 발끈하며 동료 경비원을 비집고 나에게 오려고 했다.
"이 새끼가 사정은 무슨 사정! 너는 안 되겠다 이리 따라 나와."
"에헤이 와 이라노!" 가운데 끼여있던 동료 경비원은 완강하게 그를 한번 더 말렸다.
"코로나 이후로 직장을 잃어서요...그래서 토요일에 이거라도 해서 돈 한 푼이라도 벌어보려고 그랬습니다. 아무튼 제가 잘못을 했으니까 진심으로 사과드릴게요.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아 그래 됐고, 인자 가이소 그냥. 더 붙이지 말고."
"예...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다시는 여기 안 오겠습니다. 저기...아까는 제가 도망가서 죄송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가까스로 가방을 되찾고 그 좁은 컨테이너를 빠져나갔다. 그 황소 같은 남자는 내가 지나갈 때 내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생각이 많아보이는 얼굴이었다. 나는 보폭을 크게 하며 도망치듯 나왔다. 뒤도 안 돌아보고 한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터져 나올 듯한 눈물을 꾹 참으며 힘차고 빠르게 아파트 입구 내리막길을 걸어내려 갔다.
장당 50원. 하루에 600장. 3만 원의 돈.
나는 이 돈을 벌기 위해, 아파트 현관 입구에 엄연히 써져있는 '불법 광고물 및 전단지 부착 금지' 경고문을 보고도 못 본 척했다.
나는 크게 밀려오는 죄책감과 생각의 파도 속에서 당장 객관적으로 상황을 판단할 처지가 안 됐다.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 혼자가 되기 전까지는.
나는 그저 내가 이렇게 된 환경을 탓하고 싶었고,
이십 대 후반의 나이에 스스로에게 당당하지 못하고 부끄러워하는 자신을 혐오하고 한심스러워했고, 폭력적인 성향의 그 경비원을 원망하기도 했다.
경비원에 대한 갑질 논란으로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 발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에게 일어났던 일이었다. 수많은 아파트들을 돌아봤지만 대부분의 경비원 아저씨들은 성실하게 맡은 바 일을 묵묵히 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나는 진정이 될 때까지 스스로 나에 대한 감정을 분출했다. 그리고는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그 경비원도 오죽했으면. 평소에 일하면서 여러 가지 요인으로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입주민에게, 주변 관계자들에게 시달렸으면, 도망가는 젊은 청년이 얼마나 괘씸하게 보였으면 그렇게 흥분하고 폭력적인 성향을 띄게 되었을까. 나만한 아들이 있으실 지도 모르는 건데......
나는 핑계 댈 것도 없이 잘못을 했다. 그의 음성을 처음 들었던 그때 순간의 회피를 하지 않았더라면, 그 순간의 용기로 잘못을 그 즉시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하고 책임을 졌다면. 그도 그러지 않았을 것인데.
찰나의 순간에 많은 것들이 결정되었던 순간이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그도 마음이 불편하고 안 좋았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도시 아파트의 경비원만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을 선명하게 마주할 때가 있다.
나에 대한 실망스러운 면을 맞닥뜨릴 때마다 그것을 인정하기는 정말이지 쉽지 않다.
그러나 이것을 용기를 내어 진정으로 인정하는 순간, 해결책이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