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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rishna Feb 10. 2020

사이드 스토리_01

01. 어느 소년의 고등학교 입시 이야기

옛날옛적, 호랑이가 담배 피던, 아니 아무리 관용구래도 그렇지 이건 좀 심했군요, 대충 1991년의 가을 정도가 아니었을까요. 지금부터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인 소년은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답니다. 소년은 용돈으로 그림터판 <시티헌터>와 <북두신권>, 그리고 YWCA 에서 변태만화로 찍힌 <란마>(예전에 유명했던 <이누야샤> 작가의 바로 전 장편만화)라는 만화책에 홀딱 빠져서 친구들에게 쪽바리라는 별명으로 불리우고 있었지만, 그래도 꽤나 행복했답니다.


그외에 김용의 무협소설, 무협지가 아닙니다, 무협지가, 흠흠. 어쨌든 무협소설인 <영웅문 3부작>을 보고 홀딱 빠져서 점심시간엔 친구들과 함께 <강룡십팔장>, <암연소혼장>, <건곤대나이신공>을 트림하는 기술에 섞을 수 없을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아, 잠시만요, 트림기술에 섞은 건 <페가서스 유성권>하고 <노산승룡패> 정도 였군요.


네, 한마디로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소년은 당시 고등학교 입시를 앞두고도 전혀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는 말을 괜히 길게 얘기하고 싶었던 거죠. 하지만 고등학교 입시가 몇개월 앞으로 다가오다보니, 같이 성투사의 기술을 연마하던 친구들조차 고등학교 입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소년도 아주 조금은, 뇌의 한 10% 정도는 고등학교 입시에 투자하기 시작했습니다. 뭐, 나머지 90% 정도는 그 당시 용산에 올라가서 <변덕쟁이 오렌지로드> LD판을 어떻게 하면 비디오테이프로 더빙해 올 수 있을지를 치열하게 고민했었던 것 같네요.


소년은 원래 공부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어느 고등학교를 가도 상관이 없었지만, 그때 친구들 사이에서 유명했었던 신흥 명문고, 무려 전교생이 의무적으로 기숙사 생활을 해야하는 고등학교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답니다. 만약 세상경험이 쌓일대로 쌓인, 20년 아니 10년 후의 소년이었더라면,


뭐야, 그냥 스파르타식 기숙학원이네.


라며 냉철한 판단력을 보여줬을 터인데, 대학교 이름도 서울대, 고대, 연대 밖에 모르던 소년으로서는 그곳이 어떠한 곳인지 판단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 당연하겠죠. 잠시만요, 눈물 좀 닦구요.


물론 소년이 이런 치명적인 실수를 한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답니다. 바로 중학교 1학년 때 친척집에 놀러가서 읽었던 어떤 소설책 때문이었죠. 그 이름만 들어도 어떤 느낌인지 확실히 전해지는 그 소설의 이름은 바로 <외동딸 엘리자베스> 시리즈였답니다. 추억에 젖어 잠시 검색을 해봤더니, 책 표지 일러스트가 있네요! 아, 참 이거 제 이야기 아닙니다, 아니라구요.



E. 블라이튼 이라는 작가가 쓴 소설을 지경사라는 소녀소설 전문출판사에서 출판한 책인데, 소년은 소녀적인 감수성을 가진 문학소년이었기 때문에, 라고 말하려니까 조금 양심이 찔리긴 하네요, 책 표지 일러스트에 혹해서 이 소설에 아주 푸욱 빠지고 말았답니다. 뭐, 일러스트에 푹 빠진 걸로 말하자면, 마크로스의 <린 민메이>를 빼놓을 수는 없지만 말이죠.


소년은 1권을 너무 재밌게 읽은 나머지, 2권, 3권도 모두 구입하여 읽었는데, 소년의 외모는 중학교 1학년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30대의 완숙한 느낌이었기 때문에 주위로부터


쟤 뭐야, 무서워.


라고 백안시를 당했던 것은 아마 나의... 아니 소년의 착각이었을 겁니다.


어쨌든 소년의 눈에 무지의 베일을 씌운 이 소설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부잣집 외동딸인 말괄량이 엘리자베스가 귀족 전교생 기숙사 학교에 입학한 후, 좋은 친구들을 사귀며 연애까지 하는! 아, 설렌다. 그래서 그때도 내... 아니 소년은 속았던 겁니다. 이 책 덕분에 소년은 전교생이 기숙사 학교라고 하면 청춘을 장밋빛으로 물들일 수 있을 것이라는 설정을 믿고 만 것입니다. 이때 속은 것도 모자라서 소년은 대학교 시절에는 <여기는 그린우드>라는 만화책을 보면서 기숙사 학교는 이제 못 들어가니까 기숙사 학교를 만들어야 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갖게 된 걸 보면,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긴 했죠.


만약 소년이 당시 이 책을 안 읽었다면, 어쩌면 소년에겐 전혀 다른 길이 펼쳐져 있을지도 몰랐을텐데, 영화 <인터스텔라>의 명대사인


STAY!!


가 생각나는 밤입니다. 아, 이거 내 이야기 아니지. 제가 이야기 속 주인공에 몰입을 좀 잘 하다 보니...


인생을 계획적으로 진지하게 살아오신 분들이라면,


정말 이런 걸로 인생을 결정해도 좋은가


라며 믿기 어려우실 수도 있겠지만, 네, 소년은 너무 순진했던 겁니다. 그래요, 가끔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인생을 스릴있게 만들어 주는 거니까요. 그래도 하늘이 소년을 어여삐 여기긴 했던지 소년에게 만화책과 무협소설을 내려주사, 소년의 성적은 다행스럽게도 그 학교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습니다. 소년은 공부에 관심이 많지 않아서,


공부는 부모님에게 욕먹지 않을 정도로만, 우훗.


하면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사람마다 욕먹지 않을 기준이란 것이 다 다르긴 하겠지만, 반에서 2등 혹은 3등 정도면 만화책이나 무협소설을 매일 봐도 부모님에게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을 거라는 절묘한 균형점을 찾아내었고, 그 기준에 맞춰서 떨어지면 공부를 좀 더 하고, 올라가면 편히 놀고 하는 그런 생활을 반복해 왔거든요, 중학교 3년 동안. 중학교 3학년 당시 소년의 일과를 소개해 보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1. 학교가 끝나면, 학교 앞 서점에서 새로운 만화책이 나왔는지 확인한다.

2. 원하는 만화책이 있으면 구입하고, 집으로 걸어가면서 읽는다.

3. 집에 도착후 밥을 먹고, 바로 자기 방에서 큰 베게를 깔고 누운채로

4. 장식용 책꽂이 두개에 가득 꽂힌 만화책과 무협소설을 보다가 잠이 들고,

5. 새벽 1시경에 잠을 깨면 다시 제대로 이불을 깔고 잔다.


이걸 보면 궁금하실 수도 있겠네요.


대체 공부는 언제 하는가


당시엔 보습학원이라는 것이 별로 없었던 터라 아이들도 지금처럼 공부에 목숨을 걸지는 않았기에 소년은 평소에 저렇게 놀다가 시험 전날에 당일치기로 공부를 해서 시험을 봐도 괜찮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결론은 이겁니다. 소년은 중학교 3학년 때 공부를 너무 안 해서 그 학교에 들어갈 성적이 안 되었다는 거죠. 만약 이 상황에서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면, 소년은 아마 공부하기 귀찮아서라도 그냥 안 가고 말았을텐데요. 하늘도 무심하시지, 예기치 못 한 변수가 소년의 미래를 흔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두둥!




당시 그 고등학교는 소년이 있던 지역과는 다른 도시에 있었고, 교육청에서는 자기 도시 안에 있던 유능한 자원들이 다른 도시로 빠져나가는 것을 염려했었나 봐요. 그래서 각 중학교 교장선생님들에게 유출을 막아라 는 지시가 내려왔었나 보죠. 네, 그럴 수 있어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이해할 수 있다구요. 아, 이거 내 이야기 아니지...


그런데 소년이 다니던 중학교의 교장선생님은 그 학교에 가고자 하는 학생들의 학부모님들을 모두 소집하여 일대일 면담을 해서 그 고등학교로 가면,


고등학교 내신이 불리하니까 가지 마라


라고 만류했답니다. 사실 맞는 말이에요. 다 잘하는 학생들이 모여있는 학교에 가면, 내신이 당연히 불리하겠죠. 문제는 어느 날 소년의 부모님이 그 면담에 다녀오시고 나서 소년에게


창피해 죽는 줄 알았다. 다른 애들에게는
"내신이 불리하니까 가지 마라"


라고 했는데, 소년의 부모님에겐


겨우 이 성적으로?


라고 말씀하셨다더라구요. 사실 소년은 그렇게까지 그 고등학교에 목숨 걸지는 않았답니다. 그냥 재밌어 보여서 가고 싶은 것이었고, 굳이 못 간다면 그냥 다른 데를 가도 상관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저 말 한마디가 소년의 왼손에 잠자고 있는 흑염룡을 깨워버리고 만 것이었어요.


그 고등학교는 일반고라서 그 학교에 떨어지면 고등학교 재수를 해야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소년은 너무나 분노한 나머지,


나 고등학교 재수해도 좋으니까 그 학교 써달라


고 부모님과 담임선생님에게 말씀드렸답니다. 그래도 소년의 담임선생님은 아마 교장선생님의 압박 때문이었던지 처음에는 만류하다가, 나중에는 문제집도 몇권 주시면서 격려해 주셨던 것 같네요.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좋은 선생님이셨어요. 어, 생각해 보니, 그 선생님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는 30년 후의 소년이었습니다.


그때가 대충 10월 중반 정도였으니까, 12월에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보려면 대충 2개월 정도가 남은 상황이었겠죠. 소년의 성적이 떨어졌던 이유는 국어, 영어, 수학은 사실 문제가 없었는데, 그외 암기과목 공부는 하나도 안 한 상황이었답니다. 그 와중에도 소년은 만화책과 무협소설을 포기할 수는 없어서, 하루에 두시간 정도만 꾸준히 계획을 세워서 공부하기 시작했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때 생각해 낸 공부계획이 시간대비 효율이 가장 좋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새록새록 드네요.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나서 고등학교 입학시험 전날 새벽, 밤새워 부모님이 부부싸움을 해서 한잠도 자지 못 한 소년은 "에휴, 뭐 어쩔 수 없지" 라고 생각하면서, 시험보러 가기 전엔 필기구와 만화책 <별난람마>만 넣어갔답니다. 아니, 왜 공부에 관련된 책은 하나도 안 갖고 가는 걸까요. 뭐, 이 소년의 대학교 입학시험은 더 판타스틱하니까 이 정도는 애교라고 할 수 있겠죠.


그날은 눈이 꽤나 왔었고, 시험장에 도착한 소년은 시험 전과 쉬는 시간에 지참해 온 만화책을 보면서 헬렐레 하고 있었고, 소년 주변에 있던 수험생들은 소년을 보면서,


이뭐병...


이란 느낌으로 있지 않았던가, 추측해 볼 수 있겠네요.


그래서 이 장대한 이야기의 결론, 소년은 체력장 빼고 180점 만점에 172점인가를 맞아서 나름 좋은 성적으로 그 고등학교에 입학했답니다. 중학교 3학년 평소에 시험 볼 때는 140점 정도였던 걸 보면, 2개월 채 안 되게 공부한 것 치고는 엄청나게 잘 공부한 것이라는 걸 소년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로, 그저 이모들로부터


고등학교 붙으면 용돈 좀 두둑하게 주세요


라고 깔아놓은 밑밥을 회수하게 된 것을 기뻐했답니다. 왜냐하면, 용산 전자상가에서 <변덕쟁이 오렌지로드>의 비디오테이프 더빙을 하기 위해서 돈이 필요했거든요. 뭐, 그 뒷이야기까지 말해보자면, 소년은 한 가게에 더빙 맡겨놓고 선금을 20만원 가까이 주고 왔으나, 찾으러 가보니 가게가 먹튀하고 날라버려서 망연자실해 졌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하아. 그때 처음으로 소년은 세상의 쓴맛을 알게 되었던 것이죠.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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