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다는 것과 책을 즐긴다는 것
Read Or Die
2000년대 초반에 R.O.D 라고 하는 라이트 노벨이 있었다. 물론 내가 처음 접한 것은 애니메이션이지만, 이후에 라이트 노벨도 전권 샀다. 작가가 연재중단을 해버려서 좀 화가 나긴 하지만, 그래도 꽤 재밌는 책이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요미코 리드맨(読子・リードマン / Yomiko Readman)으로 이름의 한자, 성의 영어를 보면 짐작하겠지만, 엄청난 비브리오 매니아(독서광)이다. OVA 애니메이션은 3편으로 완결인데, 음악도, 스토리도, 작화도 매우 훌륭하므로 추천한다. 흠흠.
사실 위 애니메이션 얘길 꺼낸 이유는 이 말을 하고 싶어서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과 책을 즐긴다는 것은 다르다.
가끔 부모님들과 상담을 하거나 지인들의 육아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면, 아이들에게 독서능력을 길러주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있다. 그 중 대표적으로 잘못하고 있는 방법이 바로,
아이들에게 책에 둘러쌓여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며, 전집을 사주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수십권짜리 전집을 사줄 때는 최소한 아이가 독서에 익숙하고, 그 전집의 주제에 흥미를 가질 때 의미가 있다. 그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 전집을 사주고, 독서를 시키겠다며
책 몇권 읽으면 핸드폰 한시간
이라는 조건을 걸어놓는 것이다. 사실 우리 부부도 이 방법을 써먹어 봤는데, 결과는 실패했다. 왜냐하면, 저렇게 하면 아이들의 인식이,
핸드폰은 좋은 것, 독서는 힘든 것
이 되어버린다. 이게 지속되면 아이들은 심리적으로 독서는 점점 힘들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할 것으로 고정되는데, 그러면 독서교육은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그 이후부터 아이들은 몇가지 유형으로 나뉘게 되는데,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유형이 책을 읽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읽었다고 거짓말을 하는 경우이다. 독서는 내면의 활동이기 때문에 실제로 읽었는지 딴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그냥 책을 펴놓고 읽는 시늉을 하다가 다 읽었다며 핸드폰을 하는 경우가 생긴다.
물론 조금 지나면 부모도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책 내용을 질문하겠지만, 대충 얘기해 주면 또 안 읽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어떤 부모는 제대로 읽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소리내어 읽으라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도 최악의 방법이다.
한글을 깨우친 아이는 당연히 글을 소리내어 읽을 수 있다. 문제는 소리내어 글을 읽는 것과 그 글의 내용을 머리 속에 떠올리며 이해하는 것은 다른 영역이라는 것이다. 소리내어 글을 읽는 것은 머리 속에서 떠올리며 이해하는 것에 도움을 주지 않는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가 된다.
혹시 어릴 적에 학교 국어시간에 선생님이 책을 읽어보라고 했을 때, 읽어본 경험이 있다면 방금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소리내어 읽을 수는 있어도 그 내용이 머리 속에 잘 들어오던가. 그건 그냥 소리내어 읽는 것이지, 머리 속에서 떠오르며 상상이 되진 않는다.
그리고 소리내어 읽는 방법은 또 하나, 독서를 할 때 필수적인 속독능력을 익히는데 방해가 된다. 책을 많이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집중력이 깊어지면서 책을 빨리 읽는 능력을 익히게 되는데, 소리내어 읽게 되면 속독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는 환경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두번째 유형은 실제 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성실하게 책을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내용에 대해 고찰하지 않는 경우이다. 그런데 이것은 아이의 잘못은 아니다. 아마 아이는 책을 나름 열심히 읽었을 것이다. 문제는 책을 읽는다는 행위에서 우리가 얻어내야할 부분을 아이가 착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 책을 많이 읽었는데, 항상 머리 속에서 상상의 나래를 폈다. 내가 주인공이 되는 SF물을 상상하기도 했고, 로맨스물을 찍기도 했으며, 로보트나 전투기의 비행사가 되기도 했다. 독서를 할 때 피상적으로 그 줄거리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 속에 몰입해서 파묻히는 경험은 매우 중요하다.
독서를 할 때 어떤 상황에 나를 대입하여 실제 그 상황을 경험한 것처럼 느끼는 행위는 책 내용을 더 잘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고, 그 행위로부터 뇌의 기능이 향상된다. 간단히 말해서 머리가 좋아진다는 의미이다. 물론 전 영역이 좋아지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공부할 때 도움이 되는 영역이다.
문제는 독서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 한다면, 아이는 그저 책의 줄거리만을 피상적으로 이해한채 거기서 끝이 나버리게 된다는 거다. 그리고 그것이 독서의 끝이라고 여긴다면, 아이는 필요에 의해서 책을 계속 읽겠지만 가체험 같은 경험은 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 해야 한다는 목적 아래 이런 식으로 독서를 시킨 아이들은 그럭저럭 독해력을 보유하곤 있지만, 수학능력시험의 국어영역의 점수를 보면 그저 그런 점수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부모님들은 왜 자신의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책을 잘 읽어왔는데, 국어점수가 신통치 않은지 궁금해 하시는데 독서의 즐거움을 가르치지 못 하면 절대 해결이 안 된다.
마지막 유형은 그냥 책을 싫어하게 되어서 배째라 하고 안 읽게 되는 경우다. 책을 전집으로 구입해서 거실을 서재 인테리어로 바꾼다고 해서 아이들이 책을 즐겨 읽거나 하지 않는다. 무슨 과학만화 전집이나 위인전 전집, 역사만화 전집 같은 것은 아이들의 흥미거리가 아닌데, 그것을 자꾸 읽으라고 강요를 받는다면 당연히 책이 싫어질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굳이 말하자면 독서교육의 완전한 실패라고 볼 수 있다.
위와 같은 이유로 독서교육의 목적은 책을 읽히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책을 정말 좋아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가야만 독서의 장점을 온전히 다 누릴 수 있다. 뭐, 책을 좋아하는 책벌레의 관점에서 보자면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장점이라도 다 누려야 덜 억울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