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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rishna Sep 09. 2020

그냥 끄적_08

나는 왜 책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예전에 가르쳤던 학생이 어느 날 내게 와서 물었다.


선생님! <이 멋진 세계에 축복을> 이라는 책 보셨어요?


라고 말이다. 나라고 해서 라이트 노벨을 다 섭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는 제목만 들어봤다고 얘기했었는데. 이 학생이 신이 나서 얘기했다.


선생님, 저 태어나서 정말 재미를 위해 쓴 책은 처음 읽어봐요.


라고 말했던 것 같다. 그렇다. 라이트 노벨은 정말 재미만을 위해서 쓴 글이다. 재미만을 추구하다보면, 종종 거기서 다루는 이야기 수준이 종교학이나 실존이라는 문제에까지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고, 또한 그런 심오한 부분까지 다루는데 재미까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더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아,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이 멋진 세계에 축복을> 이라는 라노벨은 그냥 재미로 보는 거다. 그거면 됐지, 뭐.


어쨌든 중요한 것은 나는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고, 지금도 책을 좋아한다. 약간 활자중독 같은 느낌일 정도로. 그러니까 읽을 수 있는 글이 없으면 뭔가 불안해 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바닥에 버려져 있는 아이스크림 포장지에 쓰여 있는 성분표를 보고 안정을 찾을 정도로.


그럼 나는 왜 이렇게 책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내가 한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초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의 막바지 무렵이었다. 여름방학 동안 신나게 놀고 난 후에 여름방학 숙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학기 중에도 숙제를 매일 안 해가서 선생님에게 혼이 났는데, 여름방학 숙제를 안 해가면 정말 혼날 것 같아서 여름방학 숙제가 적혀있는 유인물을 보았다.


지금 같았으면 부모님들이 여름방학 숙제를 관리해 주시겠지만, 우리 부모님은 너무나 바빠서 그러지 못 하셨다. 사실 내가 숙제 안 해가는 줄도 모르셨을 것이다. 다행히 내가 머리가 좋은 편이라, 하나하나 숙제를 체크해 가면서 이건 이렇게 하고, 저건 저렇게 하고,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어느 한 부분에서 잉? 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독후감


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아무리 어렸을 때 머리가 좋아서 일문지십(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이라고 하더라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능력은 없는 편이었다. 지금이라면 인터넷 검색을 해서 독후감이 무엇인지 알아냈겠지만, 그 당시 우리 집에는 국어사전 같은 것도 하나 없는 그냥 식당이었고, 내 공간 따윈 없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독후감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주변의 어른들에게 물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어른들이 하는 말을 요약하자면,


책을 읽고 쓰는 거야


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뭘 읽어야 될지, 무엇에 대해서 써야될지는 다 빠졌으니, 난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그래도 일단 여름방학의 끝이 다가오니, 무언가를 시작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일단 나는 책을 읽으라고 했으니 책을 한권 사긴 해야겠다 라고 생각했다. 명색이 초등학교 1학년인데, 쪽팔리게 유치원생이나 읽는 디즈니 명작동화를 읽고 독후감을 쓸 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그리하여, 나는 장사로 바쁘신 어머님에게 가서, 여름방학 숙제로 독후감을 써야 하니 책을 한권 사러 가야겠다 라고 말씀드리고, 돈을 주머니에 넣고 200m의 길을 걸어 <해동서점>이라는 곳에 당도했다. 그곳은 아주 작은 방 한칸 정도의 동네서점이었고, 몇년 후에 내 고등학교 후배가 될 아이의 아버지였던 주인 아저씨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매우 인상이 좋으신 분이고, 착하신 분이었다. 나는 그분에게 물었다.


독후감을 써야 하는데, 적합한 책이 있을까요?


주인 아저씨는 나를 빤히 보다가 두꺼운 책을 한권 추천해 주셨다. 책의 두께가 5~6cm 정도 되는 A4 크기의 책을 말이다. 그 책의 제목은,


월간 보물섬


이었다. 나는 그 두께에 조금 쫄긴 했지만, 주인 아저씨의 추천을 믿고 집에 와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림이 좀 많았고, 그림에 말풍선도 좀 있었다. 디즈니 명작동화만 보던 나는 그런 류의 책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때 내가 그 <보물섬> 이라는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썼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아마 못 쓰지 않았을까? 아니면 김수정 화백의 <아기공룡 둘리>라도 읽고 무언가 독후감을 썼을까? 하지만 그 책을 매우 재밌게 읽었다는 기억은 남아있다.


그리고 나는 그 <보물섬>이라는 책이 매월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는 매월 서점에 가서 <보물섬>을 사서 보았다. 날짜 개념이 없던 나는 매월 몇일에 나오는지 몰라서 그냥 아무 때나 찾아갔었는데, 어느 날은 <보물섬>이라는 책이 아직 안 나왔다며 아저씨가 추천한 책이 <새소년> 이었다. 그렇게 나는 매월 2권의 월간지를 사서 보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중앙>, <소년경향> 이라는 책까지 매월 5권 정도의 소년 월간지를 사서 읽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가끔씩, 그 주인 아저씨가 내게 <보물섬>을 권해준 일이 순진한 어린 소년을 만화책의 늪으로 빠뜨리려는 빅 픽쳐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하지만, 그것이 의도된 것이었든 아니든간에 그 주인아저씨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알게 해준 것에 대해서 매우 감사히 생각한다.


소년은 그렇게 만화책 폐인이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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