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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다움 May 11. 2023

영어는 어물쩍 지나가지만 한국말은 참지 않지

숨겨뒀던 나의 불편함을 마주하기

  나는 산수에 약하고, 언어에 예민하다. 그래서 '오후 12시'가 낮인지 밤인지를 헷갈린다. 그리고 그게 마감시한과 관련된 단어라서 결국 난 다 쓰고도 제출을 못했다. 사건의 발달은 이러했다. 폭넓은 관심사 충족과 나의 최종 장래희망(BTS 진과 지인되기)을 이루기 위하여 작사학원을 다녔고, 현재는 실제 작사 작업을 학원을 통해서 하고 있다. (당연히) 내가 쓴 작사들은 발탁된 적이 없고, 내가 쓴 작사시안을 아예 학원에서 소속사에 안 보낼 수도 있다는 합리적 의심도 든다(난 수많은 수강생 중 한 명이고, 작사학원 자체검열에서 탈락돼서. 하하하) 그래도 꿋꿋이 써서 제출하는데, 마감시한이 오후 12시란 말에 밤 12시로 착각하고 여유 있게 작업을  하다가 결국 내 시안은 컴퓨터 폴더밖을 나가지 못했다.


  당연히 한국시간 기준으로 마감시간이 정해지는데, 지난번에는 시차계산을 잘못해서 하루 늦게 낸 적도 있고, 한 번은 하루빨리 제출해서 다시 한번 검토해 보라는 피드백도 받았다. 이러한 실수에 오늘은 아예 낮과 밤을 바꿔서 생각한 것이다. 거듭되는 실수에 이번 역시 나의 잘못으로 크게 받아들이며, 이런 단어 하나에서 헤매는 내가 무슨 작사를 하겠냐며 자책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갈 때였다. 순간 이게 정말 내가 더 이상 작사를 하지 않아야 하는 근거가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후 12시'란 용어가 정확한지 근본적으로 찾아봤다. (나 같은 이가 또 있었는지) 인터넷상의 국립국어원의 답변을  참고하자면, 다음과 같다 "'오전'과 '오후'는 모두 자정과 정오를 포함하는 개념이므로 '오전 12시', '오후 12시'가 정확히 몇 시를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씀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분명한 의사 전달을 위해서는 '정오/자정' 또는 '낮 12시/밤 12시'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겠습니다."라고 나와있었다.

  순간 어떻게 할까 하다가, 나는 원장님께 장문의 카톡을 보낸다. 그리고 이너피스를 찾는다.

 "이번 작사시안은 제가 마감시한을 밤 12시로 착각하여 제출하지 못했습니다. 다음에는 한 번 더 확인하여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건은 제 불찰입니다만, 한 가지 제안을 드리자면 오후 12시보다는 '낮 12시'로 표현해 주시는 게 좀 더 적정한 표현으로 사료됩니다. 이하는 국립국어원 질의응답 자료입니다."

  장황한 나의 카톡에 원장님은 '어지럽네요, 참고는 하도록 하겠습니다'란 답장이 돌아왔다. 답장의 내용과 상관없이 나는 어제와 다른 선택을 한 나에 대해서 칭찬을 해준다. 그동안은 웬만하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둥글게 둥글게를 신조로 살아왔다. 성당에서 기도문구 중 하나인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나의 큰탓이로 소이다'를 내제화 하며 산다. 그래서 항의, 환불 등 이의제기 절차가 불편하고 번거롭게 느껴지며 그냥 받아들이고 넘기는 게 다반사였다.

  그런데 그런 일이 쌓일수록 난 호인이 아니라 호구가 되어감을 느낀다. 그래서 조금씩 바꿔보기로 하고 큰맘 먹고 이번엔 의견을 피력해 보았다. 나의 불찰인 것은 맞지만, 사실 그동안 다소 억울한(?) 피드백에 대해서 일종의 소심한 항의표시를 한 것일 수도 있다. 우리 원장선생님은 그동안 나에게 뾰족한 은유와 직설화법을 넘나들며 뼈에 박히는 조언을 해주셨다. 리듬감이 부족하다, 라임이 너무 1차원적이다 등의 건전한 비판은 나의 발전을 위해 겸허히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런데 다음의 피드백은 아직도 가시처럼 박혀서 쉽게 소화가 안된다.


  "00 씨가 올해 몇 살이죠? 00 씨 표현은 너무 올드합니다. 요새도 '그린라이트'란 말을 쓰나요?"

내 표현이 올드할 수 있다, 대부분은 아이돌 노래를 작사하기에 가수의 나이와 내 나이가 차이가 많이 날 수 있기에 충분히 공감된다. 하지만 내 나이를 감안하여 특정 표현이 올드하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특히나 그 근거로 든 '그린라이트'도 오래전 TV프로그램에서 쓰여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이기도 하지만 원래 영어사전에서도 "permission to start or continue something"이란 뜻으로 전 세계적으로 '청신호'로 해석되는 용어이기도 하다.

  사실 내가 쓴 그린라이트란 단어가 내가 올드하다는 증거라는 원장님의 피드백을 받았을 땐,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무조건적인 수용을 했다. 그런데 지금 시간이 지나 인터넷에 찾아보니 지금도 여전히 쓰는 말이며, 이 단어 자체가 올드하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다만 그때는 그저 원장님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나에게는 바람직한 학생의 자세라고 생각했고, 학원을 통해 배포된 곡을 받아서 작사에 참여할 수 있는 나는 을의 입장이기에 침묵했을 뿐이다.


  사실 오늘 마감기한을 착각한 것은, 많은 이들이 제출한 것으로 보아 나 혼자 착각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나의 불찰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종전처럼 조용히 수용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계속 '을'인 나의 위치를 생각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한 번 더 의견을 피력한 것은 그동안의 나의 불편함은 나의 자세에서 비롯되었던 것임을 깨닫고 다른 선택을 하기로 한 것이다. 너무 다 내 잘못으로 돌리기보다는 내가 수용할 수 있는 부분까지 건전하게 받아들이고 아닌 부분에 대해서는 내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거기에 한 가지 더 근본적으로 깨닫는다. 내 작사시안이 올드하다는 피드백 이후 나는 내 표현이 올드한가에 대해서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으며 애초에 작사를 시작한 것 자체에 대해서 스스로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그 시작은 내 안에 심어놓은  나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가 그런 면이 있기에, 투사되어 타인의 말을 작은 근거 삼아 더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다. 내가 인정하지 않으면,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것인데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기에 타인의 생각을 불문율인 것 마냥 곱씹고 키우는 것이다.


  마음이 힘들 때, 나는 심리상담선생님과의 대화를 나도 모르게 복기하는 습관이 있는데, 이번엔 모든 일을 내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책임감 있는 바람직한 모습일 수 있지만, 오히려 나를 더욱 가혹하게 내 몰아쳐 날 더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심리상담선생님은 나에게만 한정 처방(?)으로 '남탓하기'를 권해보셨던 것을 떠올렸다. 그래서 당시의 상황에서 내가 스스로에게 했던 말을 글로 적어본다.(마감시간을 착각한 것은 물론 이 역시 나의 불찰이 맞고, 결국엔 하루종일 걸려 완성한 나의 졸작은 제출되지 못했다. 그 순간 또 나에게 제일 매서운 나 자신은 이렇게 말해버렸다.)


'오전 12시와 오후 12시도 구분 못하면서, 무슨 글을  쓴다고 그래?'

'너만 헷갈리고 다른 사람들은 괜찮았다면, 너의 문제 아냐?'

에서 시작해서 근본적인 나의 작사연습에 대해서 이렇게 질문을 더 나아간다.

'오전 12시와 오후 12시란 말도 헷갈리는 사람이 작사를 할 역량이 있다고 할 수 있나?'

'안 그래도 내 나이 때문에 내 표현이 올드하단 지적도 받고, 재능도 그다지 없는 것 같은데 이참에 그냥 포기하는 게 낫지 않나? 집에서 애들이나 잘 봐'


학원원장님께 내 의견을 피력하고 건전한 제안(?)을 한 후 한쪽으로 꽂힌 나의 생각을 바로잡고, 다시 한번 내게 말해준다.

'작사 배운 지 이제 1년 되었는데, 1년 전 Verse, Chorus도 모르던 것에 비하면 일취월장이지, 암.'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던 것보다,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보다 낫잖아? 결과는 모르는 거지.'

'결국 포기하지 않으면 어떤 식으로든 길은 이어지지 않을까? 어쨌든 이것 역시 글쓰는니까.'

굽신 굽신한 을의 마음을 빳빳이, 당당하게 펴본다.


  나의 잘못은 인정하되, 그 범위를 확대하지 않는다. 특히나 주관적인 의견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평가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수학공식처럼 명확한 답이 나와있는 것도 아니고, 나보다 경험이 많은 자의 고견을 귀담아듣되 그것을 100% 수용하지는 않으려 한다. 특히 나의 자존감을 갉아먹으면서 까지는 말이다.

  거기에 나에 대한 상대의 반응은 내가 바꿀 수 없는 부분이기에, 내가 바라는 방향이 아니더라도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언제나 비교대상은 어제의 나이다. 어제보다 나아진 모습이라면 그 속도에 상관없이, 그 결과와 관계없이 응원한다.

  그리고, 무언가를 그만둬야 한다면, 그게 타인의 한마디 말 때문이 아니라 진지한 내 안의 고민과 성찰 끝에 내린 결론이어야 한다. 제야 기도문에 나온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나의 큰 탓이로소이다'란 의미를 명확히 이해한다. 내 탓으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순수한 나의 의지로 행한 일이어야만 한다, 누군가가 심어놓은 생각과 의견을 마치 내생각인양 치부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나 자신에게 퍼부었던 두 번째 뾰족한 화살을 하나씩 뽑고는 안정을 찾는다. 건강하게 비판을 소화한다. 이제야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이미 새벽 5시 30분이라 일어나는 게 빠를 것 같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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