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 생일은 특별할 줄 알았지

세계 여행 중 맞이한 특별하면서도 특별하지 않았던 그날

by 김역마


여행은 모든 것들에 대해 낯설게 느끼면서도 새로움에 대한 기대로 한 껏 들뜬 마음을 가지게 만든다. 그렇다면 여행 중에 만나는 특별한 날. 예를 들면 생일과도 같은 일 년에 단 하루만 있는 날이 있다면, 여행자는 얼마나 큰 기대를 할까. 마치 무슨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마음으로, 언제 다시 생일날 내가 이곳에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받지도 않은 선물이 뭘까 기대하게 된다.


이탈리아 남부의 섬 시칠리아. 이 시칠리아에서도 북부의 에올리에 제도의 섬. 스트롬볼리라는 활화산을 보기 위해 왔지만 시즌이 지났다는 이유로 배가 뜨지 않는 아쉬움만을 얻어가게 되었다. 내일은 11월 8일. 무려 내 생일로 여행을 많이 다녔지만 해외에서는 처음 맞이하는 날이었다. 들뜬 마음으로 핸드폰을 보고 결정했다.


'그래, 생일이잖아.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특별하다는 이유로 지갑이 얇은 여행자는 호스텔이 아닌 호텔에 하루 방을 잡게 되었다. 그곳은 절벽에 위치한 타오르미나라는 작은 마을로, 시칠리아의 에트나 화산이 멋지게 보이는 호텔이었다. 예를 들면 제주도의 한라산이 멋지게 보이는 한 호텔과도 같은 곳. 높아진 호텔비만큼이나 높아진 생일이라는 특별한 기대. 어서 빨리 도착해 나를 기다리는 특별한 날이라는 선물의 포장지를 뜯어보고 싶었다.



다시 시칠리아로 돌아가기 위해 선착장에 갔다. 배는 뜨지 않았다. 파도가 심해서 마냥 기다려야 한다는 사람들. 오전에 출발해야 하던 배이기에 그냥 기다리면 오겠거니 싶었지만 시간은 점점 흘러가고 불안도 커져갔다. 터넷이 되지 않아 취소할 수 없는 호텔도 걱정이지만 굳이 이곳에서 슬프게 생일을 보내고 싶지가 않았다. 주변을 둘러봐도 다들 당황한 표정으로 마냥 배가 오기만을 기다리기에 나 또한 그저 선착장을 멍하니 바라봤다.


멍하니 배가 들어오는 항구를 바라보는 사람들



마침내 도착한 배는 이른 오전이 아닌 늦은 오후로 원래 시간보다 너무나 늦게 도착했다. 내가 예약한 호텔을 가기 위해선 다시 시칠리아로 돌아가 항구에서 기차역으로 간 뒤에 기차역에서 타오르미나까지 또 기차를 타야 했다. 배만 일찍 뜨면 상관없었겠지만 특별한 날답게 배는 평상시와 달리 심하게 늦었고, 애초에 기차역에 도착했을 땐 해가 진 뒤였다.


하늘도 미안했는지 타오르미나로 가는 기차만큼은 빨리 탈 수 있었다. 바다 바로 옆을 달리기에 창 밖만 바라봐도 기분이 좋았을 기차지만 현실은 내 맘 같이 참 어두웠다. 생일인데 이게 뭐냐고. 오래된 기차 안에는 딱 3명의 사람이 있었는데 나를 제외하고는 친구와 함께 앉아 재잘재잘 놀고 있었다. 오랜 여행 중이었기에, 생일이었기에 새삼스럽게 외롭다 싶어 진다.



타오르미나 기차역은 언덕 아래. 타오르미나 마을은 언덕 위. 당연 내가 예약한 호텔도 언덕 위. 이미 버스는 끊긴 시간. 딱 한 대 남은 택시는 아까 기차에서 본 두 명이 타게 되었다. 어찌해야 하나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여 택시를 가로막고는 나 좀 데려가 달라는 말이 튀어나오게 되었다. 그나마 혼자가 아니라 3명이서 쉐어를 하게 되었다는 점도 불행한 와중에 행운이다. 물론 배가 일찍 떴다면 더 싼 버스를 타고 갔겠지만. 호스텔로 가는 두 명과 달리 나는 호텔에 도착하게 되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간 방. 좁지만 푹신한 침대와 좁지만 테라스를 통해 에트나 화산이 보이는 곳. 아, 밤이라 에트나 화산이 어딨는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루 종일 빵 한 조각 먹고 움직였고, 어떻게든 생일이라는 특별한 날을 보내기 위해 씻기도 전에 뭐라도 사러 중심가로 나왔다. 먼저 맥주가 아닌 와인을 사고, 안주를 사기에 위해 돌아다녀봤지만 이미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닫은 시간이었다. 아직 지리도, 길도 모르기에 어쩔 수 없이 와인을 산 곳에서 안주를 하나 사게 되었다. 그건 지중해와 어울리는 싱싱하고 달콤한 청포도. 내 손에 들린 와인도 포도로 만든 레드 와인이라는 사실은 방에 돌아와서야 떠올리게 되었다.


허무했다. 이게 무슨 생일이야. 차라리 모른 척 넘어갈걸. 포도주와 포도라는 이상한 만남만큼 여행과 생일의 만남도 이상했다. 안 먹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하던 중 뒤늦게 내가 바르셀로나의 한인마트에서 김치 소스와 자른 미역을 샀다는 게 떠올랐다. 원래의 여행 스타일에 맞춰 호스텔에서 미역국이라도 만들어 먹으려 했다는 걸 떠올렸지만 현실은 호텔 안 청포도가 눈앞에 있었다.


허기진 배에 와인을 벌컥벌컥 마셔서 일까. 그 자른 미역이 참 맛있어 보였다. 아니 실제로 짭짤한 게 청포도보다 나았다. 미역 쪼가리를 씹고, 컵에 물을 다르고 김치 소스를 푼 뒤 미역을 넣어 와 미역국이다 낄낄거리며 마시는 와인. 아이고 의미 없다. 생일은 개뿔. 와인 한 병을 빨리 비운 뒤 나는 취기에 침대로 쓰러졌다. 생일이니 샤워쯤은 하루 미뤄도 되겠지.




새벽에 잠에서 깨어 화장실로 달려갔다. 급하게 변기를 부여잡고 쏟아내는 지난 생일의 흔적. 평소 주량보다 적게 먹었음에도 어질어질한 게 컨디션이 좋지 않나 싶었고 하얀 변기에는 검은 무언가로 가득 찼다. 아 와인이라 검붉은 색이구나 싶었다. 속을 게워내며 눈물이 핑 돌았고, 옆에 앉아 조금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돌아온 이성은 뭔가 자꾸 이상하지 않냐며 말해왔다. 알 수 없는 찝찝함. 이건 토를 한 것과는 달랐다. 그 이질감은 뜻밖에도 가까운 곳에 있었으니 로 옆 새하얀 변기에 검붉은 와인이 아닌 언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뭐...? 미역???'


눈물을 닦아내고 자세히 바라보니 그건 정말 미역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독오독 씹어 먹은 자른 미역이 보기와 달리 표기는 10인분이 넘었었고, 불현듯 조금만 넣어도 엄청 불어났다는 게 떠올랐다. 그렇다면 른 미역 그 자체를 먹은 내 뱃속은 과연 어떻게 된 걸까. 단순했다. 주량이 문제가 아니라 미역이 문제였고, 그 미역이 안에서 불어 엄청난 양으로 변하고 압박을 견디다 못해 밖(?)으로 튀어나온 것이었다. 마치 용암을 토해내는 활화산처럼. 활화산인 에트나 화산이 보이는 타오르미나의 호텔에서.


웃프다는 말. 웃기면서도 슬프다. 이만큼 적합한 표현이 있을까. 무도 없는 호텔. 조용한 새벽. 새하얀 변기 옆에 앉아 고통 어린 눈물과 허탈한 웃음이 함께하는 곳. 물을 내릴 힘조차 없던 나는 한동안 욕조에 멍하니 기대어 앉아 있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더니 여행 중 생일이라는 특별한 날은 멀리서와 가까이 모두에서 보는 특별한 시점을 선물했다. 참 웃픈 날이다.



다음날 아침, 비싼 호텔을 벗어나 미리 예약해둔 타오르미나의 한 호스텔로 올라갔다. 이른 아침에 도착한 나를 반기는 호스트.


"타오르미나에 온 걸 환영해! 보자... 여권은 여기 있고, 오늘 하루만 예약했네?? 다들 하루만 머무는 마을이긴 해."

"네... 하하 오늘 타오르미나에 도착했네요."


참, 끝까지 웃프다. 차라리 첫날부터 호스텔로 가야 했어.



다음날 아침 호텔 테라스에서 바라본 에트나 화산
타오르미나의 대표적인 관광지 그리스 극장
시칠리아의 기차는 이렇게 멋진 해변을 따라 달린다
타오르미나에서 바라본 시칠리아 섬 해안선의 야경



시칠리아를 떠나 나폴리에 도착한 날. 점심시간임에도 유난히 붐비는 호스텔에서 한 서양 여행자가 다가와 술을 권했다. 그녀가 건네준 보드카 한 잔과 레몬 슬라이스 한 장. 대낮부터 이게 뭐지라는 표정으로 우뚱 쳐다보자 그녀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늘이 내 생일이거든! 그래서 말인데 생일 축하 좀 받으러 왔어. 우리 짠 할까?"

"아! 진짜?? 생일 축하해!"


불현듯 보드카와 레몬이라는 완벽한 조합과 달리 듣기만 해도 이상한 조합인 레드와인과 청포도가 떠올랐다.


'그래, 이게 여행자의 생일이고 특별한 날이지.'


보통은 여행자가 머물지 않던 한낮의 호스텔에는 취기와 흥이 가득했다. 참 특별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