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세계 여행은 무계획이었다. 1년을 생각했지만 첫 입국 티켓, 인도에서 파리행 딱 두 개의 비행기 티켓만 예매한 채 떠나게 되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거기가 좋아서 더 머물고 싶어 지면 어떻게 하지?'
긴 시간을 여행하는 만큼 쫓겨다니고 싶지 않았기에 무계획을 선택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무계획이라는 단어는 조금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는데 이상하게 뒤에 여행이라는 단어가 붙으니 긍정적인 이미지인 무계획 여행이 되었다. 이 단어는 마치 '이게 진짜 여행이지 에헴!'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나폴리는 가보고 싶었다. 경남 통영을 좋아하는데 이곳의 별명이 한국의 나폴리이기도 했고, 피자로 유명하고, 그리스 신화시대의 유적지에 관심이 많은 내가 정말 가고 싶었던 폼페이도 있었다. 여기다 검색을 통해 알게 된 곳이 하나 더 있었으니 그곳은 엄청난 수식어가 있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선정 죽기 전에 꼭 가야 할 곳 100'
캬, 세계의 멋진 사진과 영상 하면 떠오르는 외국 채널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이 넓은 지구에서 선별하고 선별해서 넌 무조건 가봐야 한다는 100곳의 장소. 그중 한 곳이 나폴리 근처에 있었으니 바로 포지타노였다.이 수식어를 두고 안 가면 바보지.
한 달전부터 크리스마스 준비로 분주한 나폴리 역사지구
나폴리 중심 역사 지구에는 온갖 버스킹으로 가득해 흥이 넘친다
나폴리에서 사설 철도를 타고 폼페이로 향했다. 베수비오 화산이 터지며 도시 자체가 화산재에 덮인 장소. 로마 시대였으나 아직 기독교가 자리 잡기 이전이라 익숙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신전이 있는 곳. 생각보다 큰 도시와 예상보다 멀리 있는 화산을 보며 곳곳을 돌아다녔다. 포장해온 도넛을 점심으로 먹으며 그리스 극장, 로마 극장, 게임에서 나오는 캐릭터 이름이 실은 달의 여신이었다는 걸 알게 되며 지치지도 않고 5시간 정도를 걸어 다녔다. 나에게 있어 폼페이는 기대 이상의 장소였다. 아니, 시간이 부족했다.
저 멀리 보이는 산이 폼페이를 사라지게 한 베수비오 화산이다.
길 중심에 보이는 마차의 흔적. 아마도??
폼페이에서 포지타노는 가까운 곳이었다. 지갑이 얇아질 대로 얇아진 5개월 차의 여행자니 온 김에 근교를 가야 했다. 아쉬움은 묻어두고 다시 사설 철도에 몸을 실은 뒤 마지막 기차역으로 향했고, 이곳에서 다시 버스를 탄 뒤 나는 포지타노에 도착하게 되었다.
바다를 앞에 둔 절벽에 색색의 집들이 자리 잡은 곳. 가장 많이 떠올리는 포지타노에 대한 풍경이다. 버스에서 내려 다른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따라 좁은 골목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부터 움직이긴 했지만 지친 건 아니었다. 그런데 새로운 장소와 유명한 장소. 무려 죽기 전에 꼭 가야 할 곳임에도 내 마음은 들뜨지 않았다. 아직 살 날이 많아서려나.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처음 마주했을 때 폼페이가 !라면 포지타노는 ?였다.
골목을 둘러보고 바닷가를 만나서 다시 한번 바라본 절벽의 마을 포지타노.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한마디.
"별론데?"
그건 감탄사가 아니었다. 정말 별로였다. 처음엔 내가 잘 몰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 마음은 한결같이 여기 왜 왔지라며 되물을 뿐이었다.
이유가 뭘까. 긴 여행을 통해 좋은 곳을 많이 봐서일까. 시칠리아에서 이 주간 지내며 바다를 많이 봐서일까. 개인적으로 너무 좋았던 시칠리아 체팔루의 뒷산보다 못해서일까. 폼페이에 더 머물고 싶었기 때문일까. 이유를 찾자니 한도 끝도 없었다. 다들 좋아하는 곳인데 내가 별로라고 하면 분명 내가 이상한 놈일 테니까 말이다.
바닷가 앞 레스토랑. 가장 싼 마르게리타 피자를 먹으며 생각했다. 이건 나의 여행, 나의 경험. 솔직함이 필요했다.남들이 뭐라 해도 내 마음이 중요하다.
'포지타노 별로네. 죽기 전에 여길 왜 오겠냐고. 엄마 얼굴 한 번 더 보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사회라고 한다. 요즘은 여행도 같은 맥락에 있지 않나 싶다.내가 원해서 간다기보다는 다녀온 타인들이 좋아 보여서 혹은 타인들이 좋다고 하니까. 나의 경우엔 너무나 공신력이 있던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그랬다.
무계획 a x 정보를 찾지 않음 b = 장소에 대한 결과
내 세계 여행의 방정식이다. 좋은 장소에서 오래 머물기 위한 무계획과 그 장소에 대한 기대치를 지키기 위해 최소한의 정보만 찾기. 때로는 최상의 결과를, 때로는 최악의 결과를 선사했다. 히말라야나 순례길, 시칠리아 같은 곳이 최상이었다면 포지타노는 최악이었다. 아무리 남들이 좋다고 해도 나에겐 별로라 느껴지는 곳이 있다. 애초에 여행자는 복합적인 존재이자 여행 그 자체도 복합적이기에 누구에게나 좋은 곳이라는 건 존재할 수가 없다.
어찌 되었든 최종 선택은 나의 몫이기에 책임도 나의 몫이다. 결국 내 여행 방정식의 구조가 잘못되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무계획과 최소한의 정보는 장기 여행에 있어서 적어도 나에겐 맞지 않는 옷임을 깨닫게 되었고, 포지타노는 나를 세계여행 5개월 만을 채운 채 한국으로 돌아가게 만든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만약 누군가 포지타노를 추천하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까.
"나는 별로였어. 그런데 여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걸 배웠어. 여행이야말로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봐야 한다는 걸. 여행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걸."
좋다는 말보다 나에겐 의미가 컸던 곳이다. 살면서 한 번은 떠나라는 세계 여행은 결국 포지타노로 인해 끝남과 동시에 나에겐 세계 여행보다도 더 긴 1년 6개월 정도를 보낸 히말라야 백패킹의 시발점이 되었다.
시칠리아의 체팔루 뒷산
이곳이 바로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야외 상영이 이루어진 곳이다. 갑자기 비가 내리고 주인공들의 키스가 이어진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