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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이 May 10. 2020

선물 받은 중고 피리 싸게 팔아요

새거나 다름없음

어정쩡한 재능으로 악기를 배우다 만 사람들은 어른이 되면 그 경험이 악기에 대한 집착으로 남거나 자식에게 악기 강습을 강요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나의 시어머니 잉그리드를 보면 알 수 있다.


첫째 아들(이자 나의 남편인 방만구 씨)의 음악적 재능은 무시한 채 피아노 배우기를 강요한 것을 보면. 세상의 불가사의한 것 중 하나가 방만구 씨의 노래다. 그가 부르는 노래들은 도저히 음계로 옮길 수 없는 영역에 있다. 그가 음악에 대해 일자무식이라면 약간이라도 이해하겠건만 그는 힙합, 레게, 스카 등의 음악에 음악적 조예가 깊은 사람이다. 집에 소장한 시디도 꽤 된다. 하지만 방만구 씨는 자기가 최애 하는 노래조차도 제대로 부르질 못한다. 아예 딴 노래를 부른다.  이런 음치 박치인 아들에게 초등학교 시절 피아노 학원 수강증을 끊어주고 게다가 하얀색 업라이트 피아노까지 사줬다니 이건 명백한 물자 낭비다.


첫째 아들이 피아노를 1년도 못 배우고 포기하자 잉그리드는 악기를 사모으기 시작했다. 첼로, 플루트, 클라리넷, 디지털피아노, 타악기, 피리. 그중에서 선물이란 명목으로 내게 건네진 피리가 있으니 바로 아래의 피리이다. 사진상으로는 크기를 짐작할 수 없겠지만 이 피리는 테너 리코더라고 그 길이와 굵기가 일반 피리의 딱 두배 정도 된다. 안타깝게도 손가락이 짧은 나는 불 수가 없다. 받는 사람이 받고 싶은 것을 받아야 선물이지 주는 사람이 주고 싶은 것은 주는 것은 선물이 아니다. 이리하여 이 피리는 딱 한 번 사용된 채 우리 집 장롱을 뒹굴다가 2주 전 중고 악기라는 타이틀이 붙은 채 이베이에 팔려갈 처지에 놓이게 된다.



Adler Henrich 제품. 원가는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109유로.


새 것 같은 중고 피리, 아들러 헨리히 제품 75€


라는 타이틀을 달고. 원가는 109유로인데 딱 한 번 불고 75 유로면 싸게 파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내 맘과 다르게 2주가 넘도록 문의는커녕 단 25회의 클릭만 있었을 뿐이다.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낮추거나 남에게 선물로 주지 않은 이상 이것은 내가 죽을 때까지 우리 집 장롱에서 썩을 것이 뻔하다. 선물이 가진 병폐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집 장롱에서 썩어 날 것은 저 테너 리코더뿐만이 아니다. 아래의 악기들도 그 쓸모를 잃어간 채 벌써 10년이란 세월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바로 아래의 이 파란색 피리도 마찬가지. 하루는 잉그리드가 상기된 얼굴로 피리 두 개를 들고 우리 집으로 놀러 왔다.


"너 쇠 피리 본 적 없지? 이게 아일랜드 피리라는 건데. 보통 피리는 다장조만 불 수 있잖아. 그런데 이 피리는 장조 별로 다 나와. 이 파란 피리는 라장조로 불 수 있고 빨간 건 바장조 인가로 불 수 있을 거야. 어때? 획기적이지? 파란 건 너한테 줄게. 빨간 건 내꺼."


나는 선물이 썩 내키지 않았지만 착한 며느리 얼굴을 하며 잉그리드를 기쁘게 할 요량으로 솔솔 부는 봄바람을 불어 보았다. 잉그리드는 내게 음악적 재능이 있다고 박수를 치며 한 번씩 시간이 있으면 요양원에 있는 할머니들 앞에서 피리도 불고 피아노도 치란다.




아래의 것은 우쿨렐레라고 하나? 하여튼 이건 시아버지께서 미나한테 선물한 거다. 예전에 한 기타 하셨다던 시아버지께서 생일선물로 기타 강습권을 받으시고 다시 기타를 만지기 시작하셨다. 오랜만에 다시 악기를 시작한 자들이 그렇듯 시아버지는 넘치는 열정으로 악보들을 사모으기 시작하셨다. 비틀스, 엘튼 존 등의 히트곡이 담긴 악보들. 그 열정을 발판으로 기타만 열심히 배웠으면 좋았으련만 기타에 대한 열정이 쇼핑으로 이어져 우쿨렐레를 구입한 것이다. 기타를 치면 우쿨렐레도 칠 수 있으려나? 기타 무식자인 내가 봐도 아닌 것 같다. 우쿨렐레도 칠 수 있다면 왜 물건이 우리 집으로 왔겠는가...


시아버지는 옛다! 너 갖고 놀아라, 하시면서 저 우쿨렐레를 미나한테 던져주고 가셨다. 저건 팔 수도 없다. 벽에 걸어두었더니 먼지를 워낙 뒤집어써서. 악기란 게 보관상태가 좋아야 되는데 저런 거 팔았다간 지금까지 쌓아온 이베이 판매자 별표에 Negativ가 하나 생길 게 뻔하다.



이건 봉고라는 북이다. 남미 사람들이 살사를 비롯한 남미 음악을 연주할 때 친단다. 용케 팔렸다. 이것도 잉그리드로부터 선물 받은 이후 장식용도로만 미나 방 책장에 놓여 있다가 얼마 전에 이베이에서 9유로에 팔렸다. 원가는 30유로 정도 한다. 올린 지 10분도 안돼 구매자가 나타나서 당일 가지러 왔다. 알고 보니 우리 동네 사람이었다. 이렇게 악기가 빨리 팔리는 건 정말이지 드문 경우다.



요 아래의 피리는 팔 생각이 없다. 내가 벼룩시장에서 산, 아니 선물 받은 거다. 벼룩시장이 파할 무렵인 오후 4시 정도에 가면 떨이 물건들이 속출한다. 많은 물건들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1유로, 혹은 50센트에 팔리다가 운 좋으면 공짜로 건네지기도 한다. 나는 해 질 녘에 자전거를 타고 벼룩시장을 지나가던 중 우연히 들어갔다가 저 피리를 획득했다. 살 요량으로 한 번 만져보고는 휙 돌아서 다시 나오는 길에 사야겠다고 피리를 다시 놓는데 주인이 그냥 가져가라고 했다. 이건 내가 집에서 자주 분다. 솔솔 부는 봄바람, 산토끼, 솔솔 봄비가 내렸다, Häschen in der Grube, 창밖을 보라 등.



말이 나온 김에 선물에 대해 얘기를 좀 하자면, 나는 선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선물이라는 것이 받는 사람이 뭘 원하는지 짐작해서 사주는 것인데 그 짐작이 안 맞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선물을 주는 사람은 자기 요량대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남도 좋아하겠거니 착각해서 결국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사서 남에게 안기는 형국이다. 그래서 나는 선물 주려는 사람들한테 이렇게 얘기한다.


마음만 받을게요, 그래도 굳이 제게 굳이 선물을 주시려거든 쌀로 주세요. 5kg 한 포대면 족합니다.

 

PS. 내가 시어머니 얘기를 남처럼 했는데 사실 나도 우리 시어머니를 닮은 부분이 있다. 치지도 않을 악보, 그것도 내 실력에는 감히 엄두도 못낼 수준이 높은 걸로 사다 모으고, 내심 음악적 재능이 1도 없는 미나가 첼로를 좀 배워주길 기대하고. 다 미련이 남아서 그렇다, 미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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