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목요일에 독일어 C1 모의고사(Modelltest)를 봤다. 모의고사를 이번에 처음 본 것은 아닌데 이번 모의고사는 유독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시험의 읽기 부분은 전형적인 Telc C1 모의고사가 아니라 고등학교 독일어 시험을 가져다가 외국인들에게 보게 한 것이다.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고등학교 국어 중간고사 시험지를 외국인의 한국어 시험 모의고사로 출제한 것과 마찬가지다. 시험의 난이도도 높고 유형 자체가 우리가 지금까지 배웠던 유형이 아니라서 많이 어려웠다.
반타작.
60점이 합격선이므로 진짜 시험이었으면 나는 탈락이다. 허탈했다. 곳곳에서 시험이 너무 어려웠다는 하소연이 이어졌다. 선생님은 원래 C1 시험은 B2보다 난이도 면에서 많이 차이가 나서 많은 관계자들이 독일어 B3 코스 만드는 것을 논의할 정도라고 했다. 그래서 초급이나 중급에 비해 C1로 들어오면 합격률도 많이 떨어진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B2 때에는 별도의 공부 없이도 무난하게 합격했던 기억이 난다. 확실히 독일어 C과정은 내게 많이 어렵다.몇몇 수강생들은 벌써부터 재수를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이쯤에서 나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나의 독일어가 3개월 전보다 많이 좋아졌는가. 앞으로 2개월 동안 열심히 한다고 해서 실력이 일취월장할 가능성이 있는가. 없다. 지난 3개월 동안 새로운 단어를 배우고 신문기사를 매일 1시간 동안 읽었으면 읽기 실력이 확연하게 높아져야 하는데 내가 느끼기로 나의 독일어 실력은 예나 지금이나 그다지 차이가 없는 듯하다. 말하기도 예전과 다름없이 버벅거린다. 배웠던 고급진 단어들을 써먹으려고 하면 머릿속에서 가물거리면서 생각이 잘 안 난다. 그래서 더 버벅거리게 된다. 실망스럽다. 그러면 그렇지 전교 석차 5등급 학생이 5개월 바짝 노력한다고 해서 몇 등급 한꺼번에 올릴 가능성 있겠니?
이 시험 뒤 나에게 약간의 슬럼프가 찾아왔다. 이렇게 날마다 쉽고 평이한 신문기사를 읽어봤자 필요도 없지. 시험에 전문지 지문이 나오거나 소설이 나오면 독해하는데 시간을 많이 허비하게 되고, 못 푼 문제들이 쌓이게 되면 나중에 패닉이 와서 시험을 망칠 확률이 높을 텐데... 일상생활에서 구어체로 쓸 일도 별로 없는 단어들, 사전에 별표(독일어 사전을 보면 중요한 단어에는 별표 두 개, 덜 중요한 단어에는 별표 한 개가 표기되어있고, 많이 쓰이지 않는 단어에는 별표가 없다)도 안 달린 단어들을 뭐하러 이렇게 죽자 사자 외우는지 몰라... 어차피 안 쓰니 언젠가는 잊어버릴 텐데... 내 단어장 좀 보라지. 초기에 기입했던 단어들 지금은 처음 본 듯 생각도 안 나는걸.
나의 독일어 공부 동반자 둘. 동아사전은 내가 한국에서 독일올때 사온 독한사전, 노란 사전은 독일어를 배우는 외국인을 위한 독독 사전. 낱말의 정의, 예문 등이 풍부해서 적극추천.
이렇게 부정적인 생각을 계속하다 보니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내가 독일어를 시작한 그때로 넘어갔다. 내가 무슨 영광을 찾겠다고 독일어 공부를 다시 시작해서 이 스트레스를 받을까. 무슨 독일어 귀신이 씌어서 취업까지 5월로 미뤘을까. (원래는 취업제안이 들어와 3월부터 일할 요량이었지만 독일어 공부 때문에 출근까지 수업이 끝나는 5월로 미루었다, 대부분 수강생들은 취업제안이 들어오면 학원을 그만두고 일을 한다. 그렇게 이미 빠져나간 수강생들이 우리 반에 두어 명 있다.) 그때 학원을 그만두고 3월부터 출근을 하는 거였는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마지못해 숙제를 하려고 책을 펼쳤다.
감정상태를 색깔로 표현하는 문구를 완성하시오.
흠... 내 감정상태는 현재 회색이 구랴. 노랑은 질투, 초록은 안전, 프리마, 파랑은? 파랑이 술 취한 거네? 웃겨라. 파랑이 우울 아니었나? 영어로는... 근데 독일어로는 파랑이 술이네. 독일답다. 이러면서 천천히 하나하나 문구를 완성해나갔는데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이렇게 싫어도 날마다 조금씩 조금씩 하다 보면 언젠가는 조금이라도 더 잘하게 되리라는 확신. 맞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이 말씀을 남기셨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 부지런히 정진하라. 우리 친정엄마도 밭을 매면서 말씀하셨지. 좋아도 하고 싫어도 하고, 일이란 것은 죽기 전까지는 밥먹듯이 매일 해야 하는 거라고. 그렇다. 공부도 관성이다. 몇 달 만에 일취월장하는 일은 없다. 어학은 로또가 아니다. 낙숫물이 떨어지듯 날마다 조금씩 하다 보면 언젠가는 신문기사뿐만 아니라 전문지, 소설까지 줄줄 읽을 날이 온다. 시험에 떨어지더라도 매일 이 관성을 놓지 않고 공부할 것이다.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오늘도 숙제를 끝내고 포쿠스 앱에서 전쟁을 겪은 이들의 트라우마 작용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기사가 양질이었다. 의욕이 솟구칠 때는 이 정도 기사면 필사를 하고 모르는 단어를 단어장에 기록하는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을 텐데 지금은 슬럼프 기간이므로 이 정도면 됐다. 내일도 숙제를 끝내고 신문기사 몇 개를 찾아서 읽을 것이다. 모레도 숙제를 끝내고 신문기사 몇 개를 찾아서 읽을 것이다. 그다음 날도. 그러다 슬럼프가 끝나면 다시 채찍질을 해가며 공부를 해야지. 사람이 살다 보면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고.
이렇게 독일에선 한국 사는 것보다 몇 배는 노력해야 그나마 신문기사 한 줄이라도 읽고 산다. 보상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보상도 없다. 외국에서 사는 게 좋아 보여도 거저 사는 게 아니다.
아래 PDF 첨부파일은 내가 지난주 목요일에 본 모의고사이다. 혹시나 궁금하신 분은 읽기 부분 1, 2 한 번 풀어보시라. 어려워서 똥꿈째리할 것이다. 혹시 별 무리없이 풀었다면(갑자기 말투를 바꿔) 저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혹시 필요하다면 답안지는 이메일로 요청하면 보내드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