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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이 Jun 16. 2020

시아버지와 내키지 않는 친정 나들이

길기도 한 20박 21일

어느 해 따뜻한 봄에, 아마도 지금으로부터 15 년 전쯤 여건이 되어 한국엘 가려 마음을 먹었다. 3주 동안 다녀오기로. 루트를 짜려고 한국지도를 보니 안가본 곳이 어찌나 많은지. 그리하여 나는 친인척과 친구방문은 최소로 하고 개인여행에 시간을 많이 배정했다. 우선 2박3일 지리산 종주를 할 것이다. 지리산에 간 김에 평생 동안 딱 한 번 가본 전라도와 사진으로만 본 한려수도를 구경할 것이다. 통영을 돌아 친정이 있는 경주를 찍고 동해안을 따라 설악산, 춘천을 찍고 서울로. 일정이 빡빡하지만 3주 속에 욱여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여행루트 짜는 일이 끝나자 나는 아주 충만한 기분이 들어 남편 방만구 씨에게 나의 계획에 대해 얘기했다. 그랬더니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나도 갈래!"


그는 아시아를 사랑한다. 대학에서 중국학을 전공했고, 방학 때마다 자주 중국 여행을 했으며 베이징 대학에서 1년 동안 어학연수를 경험한 적도 있었다. 중국의 기이한 음식들을 특히 사랑한다. 그는 다람쥐 구이, 전갈튀김, 그리고 뱀구이 등을 기꺼이 먹었다. 한 식당에선 전시용인 뱀술을 식당 주인을 설득하여 한 잔 마셔본 일까지 있었다. 특이하게 생긴 건 일단 먹고 보는 식성 때문에 결혼 시 한국에 와서 그는 우리 집안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뭐든 간보거나 깨작거리지 않고 한 숟가락 푹 떠서 입에 넣고 별로 씹지도 않고 삼킨다. 어른들은 그런 방만구 씨를 보고 '그놈 참 복 있게 먹는다!' 하셨다.


그는 나의 여행루트에는 관심을 주지 않은 채 상다리가 부러지게 한 상 차려 나오는 한정식을 먹을 생각에 부풀었다. 나는 방만구 씨와의 동행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지만 그를 이번 여행에 넣어 주기로 했다. 그래서 두 사람 비행기 티켓을 구입하려고 인터넷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던 찰나 시어머니 의 전화를 받았다.


"너 이번에 3주동안 한국 간다며? 느이 시아버지도 좀 넣어줘라. 같이 가고 싶어 해."




때는 2000년 9월 나의 결혼식에서였다. 경주 향교에서 전통으로 결혼식을 올릴 제. 시아버지는 아마 인생에서 그렇게 극진한 대접을 받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본 적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생전 처음으로 외국인을 구경하시는 집안 어른들의(우리 아버지는 11남매 중 밑에서 3번째) 버선발 환영을 받았고, 최고급 호텔에서 주무셨으며 우리의 신혼여행지인 제주도까지 동행하셨다. 게다가 한국으로 오는 길에 아들과 잠시 들른 홍콩에서는 홍콩을 맛보셨다. 평생 유럽을 벗어난 삶을 살아보지 못한 우리 시아버지에게 있어 아시아는 다른 우주였던 것이었다.


결혼식에서 만난 삼백 여 명의 하객들 속에서 주인공은 나와 방만구 씨가 아니라 우리 시아버지셨다.  우리 엄마의 고등학교 동기들도 시아버지 인물이 신랑보다 낫다고 하하호호하셨다. 아무리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다손 쳐도 그런 호의적인 눈빛은 못 알아볼 수가 없다. 한 마디로 한국 뽕을 맞으신 거다. 그러니 다시 한 번 한국을 찾고 싶은 것이 당연지사.


나는 진심으로 고민하였다. 남편이 따라온다는 것은 당나귀를 한 마리를 데리고 가는 것과 마찬가지지만 시아버지가 따라온다는 것은 상전을 모시고 가는 것이다. 그러면 나의 자유로운 여행 따위는 포기해야 한다. 눈치 없이 며느리를 따라올 생각을 하시냐... 마땅찮아하는 내 모습을 보고 방만구 씨는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아버지 편을 들었다.


"아버지가 까다로운 사람은 아니잖아. 아무거나 잘 드시고 성격도 까탈스럽지 않고. 게다가 우리는 네가 다니는 데를 조용히 따라다니기만 할 거야. 친구들 친척들 다 만나. 우리는 우리끼리 놀게."


나는 결국 세 사람 분 비행기 표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비행기 표를 끊고 일주일이 지났을까. 뉘른베르크에 사는 한스 삼촌께서 웬일로 전화를 하셨다.


"니가 볼커랑 마쿠스 데리고 한국 간다며? 기젤라랑 나도 같이 가면 안 되겠니?"


"죄송해요, 한국엔 독일처럼 8인승 택시가 없어서요. 택시 한 대에 탈 수 있는 인원만 가야 해요."


나는 유목민처럼 혼자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길 좋아하는 천성을 지녔다 보니 집안에 물건이 많지 않다.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것도 싫어해서 안경을 빼면 흔한 장신구 하나 착용하지 않는다. 심지어 결혼이니 자식이니 이런 것도 안 하고 안 가지려고 했던 사람인데... 내가 시댁 식구들을 주렁주렁 달고 한국에 갈성 싶은가? 천만의 말씀이다.


한스 삼촌 내외를 따돌린 우리 셋은 루프트한자 이코노미석 3인석에 나란히 앉아 한국엘 가게 되었다. 어쩌다 순서가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세 자리 중 중간에 앉게 되었다. 우리 셋 중 가장 흥분한 사람은 시아버지셨다. 얘기하는 걸 좋아해서 끊임없이 내게 얘기를 해댔다. 아들에게 얘기를 했다가는 지청구를 듣기 십상이므로 만만한 며느리를 붙잡고. 11시간 동안.






나의 시아버지는 말하자면 호빗과 같은 인간 형이다.


위키피디아에 짧게나마 이름이 올라가 있는 뮌헨 고위 공무원의 세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나 2차 대전을 겪긴 했지만 유복하게 산 사람이다. 그의 유복했던 삶은 외모에서 뿜어져 나온다. 신사의 전형, 시어머니에 의하면 여자뿐만 아니라 게이들도 좋아하는 비주얼. 날마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깨끗이 다려놓은 팬티, 티셔츠, 남방과 청바지를 차려입고 토스트에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이름은 석간신문이지만 아침에 배달되는 함부르크 석간신문을 읽는다. 식사를 마치면 집 근처 에펜도르프 공원을 한 시간 정도 산책하며 사진을 찍는다. 성격이 느긋해서 웬만해선 뛰거나 서두르질 않는다. 이런 생활패턴은 휴가지에서도 마찬가지다. 호텔 방에서 일어나면 샤워를 하고 다려서 넣어온 옷을 입고 커피와 토스트를 섭취한 후 산책을 시작한다. 


도무지 스펙터클 하지 않은 여행이다. 비싼 돈 내고 뭐하러 저런 여행을 다니는지, 히치하이킹을 하고 노상까지는 아니지만 기차역 정도에서 자본 경력이 있는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여행의 종류다. 어쨌든 시아버지의 호빗 여행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실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 점이 시아버지를 모시고 여행해야 하는 나의 애로 사항이었다.


그가 공항에 나타났을 때, 나는 그 커다란 케리어를 보고 흠칫 놀라 할 말을 잃었다. 호빗의 규칙적인 삶이 여행지에서도 실행되어야 하므로 그의 짐이 많은 건 당연했다. 그는 내가 한국에서 독일로 이민 올 때 들고 온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짐을 3주동안의 여행 짐이라고 가져왔다. 37kg. 내 짐이 7kg, 방만구 씨의 짐이 15kg, 도합 세 사람 59kg. 휴, 다행이다. 누구 덕에 추가 요금 없이 탑승할 수 있어서.  그럼 이 37kg의 짐에 무엇이 들어있었느냐. 나중에 호텔에서 푼 짐을 보고 나는 아연 질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개의 잘 다려진 바지, 20장의 잘 다려진 티셔츠, 20장의 잘 다려진 팬티, 20장의 잘 다려진 셔츠. 이것들이 당장 백화점에서 돈 받고 팔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각 잡힌 채 케리어 속에 들어있었다. 이 짐을 보고 나는 호빗과의 지리산 종주는 포기해야 하나 하고 심각한 기로에 서게 되었다.




비행기에서 밤을 새우고 인천공항에 오전에 도착했다. 인천에서 직장 생활하는 동생이 하루 휴가를 내고 우리를 픽업하러 나왔다. 도요타 SUV 승용차를 몰고. 시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부모의 도움 한 푼 없이 상경하여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파트 장만하고. 독일사는 누나가 왔다고 도요타 SUV 자동차까지 몰고 공항엘 나온 것이었다. 동생은 영문과 나온 것치곤 어수룩한 영어실력으로 시어른을 맞았고, 우리에게 맛있는 식당을 소개해 주겠다며 차를 몰았다. 동생이 차를 세운 곳은 아구찜 식당이었다. 손님도 없는 식당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 아구찜을 대짜로 시켰다.


얘가 지금 외국인들에게 아침식사로 아구찜을 먹이겠다고 이 집에 데려온 거야?


한국사람들 조차도 오전 10시반에는 아구찜을 아침에 먹지는 않는다. 외국사람들이 아침으로 가볍게 먹는 컨티넨털 브랙퍼스트에 대해 못 들어봤나? 나는 속이 아려서 몇 숟가락 뜨질 못했다. 시아버지와 방만구 씨도 웬만한 건 잘 드시지만 아침 빈속아구찜은 무리였다. 많이 남겼다. 동생은 수도권의 관광지라고 불릴만한 유명한 곳으로 우리들을 안내했다.


수도권을 구경하고, 춘천 소양호에서 막걸리를 한 잔 들이킨 후 우리는 경주로 발길을 옮겼다. 37kg의 거대한 캐리어는 가는 족족 걸리적거렸으므로 나는 입을 댓 발은 내민 채 늘 다음 행선지까지 그것을 택배로 부쳤다. 우리나라의 신속 정확 저렴한 택배시스템에 시아버지는 정말이지 감탄했다.


내 고향 경주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우리 가족들은 15인승 미니버스를 대절해서 픽업을 나왔다. 대가족이 움직여야 하니 별 수가 없었다. 우리 친정아버지는 오랜만에 만난 시아버지를 오랜 친구처럼 정답게 맞이해 주었다. 아버지는 시아버지가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채 늘 다짜고짜 한국말로 시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려고 들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황급히 뛰어가서 통역을 해줘야 했으므로 나는 어딜 가나 정신없고 분주했다.  


식당에서 시아버지는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드셨는데도 불구하고 친정아버지께서는 늘 챙겨주지 못해 안달이셨다. 맛있는 고기반찬은 죄다 시아버지 앞으로 갖다 놓으시고, 때때로 시아버지가 맛난 음식을 놓친다 싶으면 당신 젓가락으로 찬을 집어 시아버지의 공기 밥그릇에 올려두었다. 시아버지는 과한 친절이 황송하여 자꾸만 손사래를 쳤고 나는 앉은 자리가 불편하여 자꾸만 엉덩이를 들썩였다.


15인승 미니버스를 대절하여 우리가 떠난 곳은 오빠네가 살고 있는 통영. 형부가 운전을 했는데 깜빡하고 내비게이션을 빌리지 못한 데다 시간이 없어 도로지도를 가져오는 것조차 잊은 것이다. 운전석에 앉은 형부와 조수석에 앉은 언니는 그 일로 경주에서 통영 가는 구간구간마다 옥신각신 싸웠다. 시아버지가 탔으니 처음엔 평소처럼 큰 소리로 싸우지는 못하고 대화하는 척 싸웠지만 형부가 통영으로 나가는 길을 지나치고 부산으로 들어섰을 때 한 성질 하는 언니가 폭발했다.


'통영 가는 길 안다고 큰소리 땅땅 치더니 왜 부산까지 왔냐.'


'지도 가져오는 걸 잊은 사람이 누군데 내 탓을 하냐.'


'지도를 안 가져왔으면 운전대 잡은 사람이 휴게소에서라도 사야지 사라는 지도는 안 사고 호떡만 먹었냐.'


'내가 호떡 먹을 때 너는 같이 안 먹었냐.'


결국 내가 나서서 이렇게 중재를 했지만,


'운전대 잡은 사람한테 스트레스 주면 사고 날 수 있으니 언니는 그 입 다물라.'


그러다 결국 셋이 싸우는 꼴이 되었다. 그렇게 계속 다투다 결국 맨 뒤에 앉으신 우리 친정아버지가 점잖게 나섰다.


"헛 그거, 시끄럽다!"


늘 그렇듯이 아버지가 나서야 상황이 종료된다. 그 한 마디에 언니와 형부는 싸움을 종료하고 15인승 미니버스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통영에 도착하여 오빠와 올케로부터 융숭한 저녁을 대접을 받았다. 다음날 아침 역시 상다리가 부러지게 대접을 받았다. 잡채, 생선구이, 갈비찜, 찰밥...  차린 것도 많다. 올케는 늘 그렇듯이 한상 가득 밥상을 차려 놓고는 조용히 주방으로 돌아가 남은 잡일을 했다. 아침으로 갈비찜을 드시기는 우리 시아버지도 처음이지만 대접해준 정성을 생각해서 알뜰히 밥 한 공기를 다 비우셨다.


통영시내를 둘러보고 우리는 오빠의 윈드서핑 동호회 건물에서 그릴을 하였다. 꼼꼼한 미식가인 오빠는 싱싱한 해산물과 육고기를 준비하여 능숙한 솜씨로 구워주었다. 조개, 가재, 새우, 장어, 육고기. 그야말로 산해진미요 진수성찬이었다. 사람의 뱃골이라는 것이 이렇게나 늘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날 실감했다. 전날 저녁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넉넉히 드신 시아버지는 해산물로 차려진 밥상을 보고 연신 흐뭇해 하시며 체면을 차리지 않고 잘 드셨다. 젊은 사람들보다 훨씬 많이 드셨다. 양이 많지 않은 우리 친정아버지는 두고두고 우리 시아버지에 대한 얘길 할 때면 이런 칭찬을 하셨다.


"영감쟁이가, 뱃골이 크더라. 그 나이에 그렇게 많이 먹기가 쉽지 않거든..."


"암, 그 정도면 뱃골이 크지. 우리 류에 그 정도로 잘 먹는 사람 드물어."


나는 이런 류의 칭찬은 한국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많이 먹는다고, 잘 먹는다고, 가리지 않고 아무거나 먹는다고  칭찬받는 건 한국 외 어디서도 못 들어봤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 지리산 종주에 대해 얘기해야 할 시간이 왔다.


나는 시아버지께 지리산 종주에 대한 대략적인 프레젠테이션을 해드렸다. 지리산은 해발 2000미터의 높은 산이며 경상도와 전라도에 걸쳐있는 큰 산이다, 한국전쟁 때 빨치산들이 숨어서 최후의 저항을 한 곳이다. 우리는 2박 3일 동안 이 산에서 힘든 종주를 할 것이다. 구례 터미널에서 성삼재까지 버스로 이동, 미리 예약해둔 연하천 대피소에서 1박을 하고 장터목 대피소에서 1박을 할 것이다. 침대는 없다. 마룻바닥에 요를 깔고 낯선 사람끼리 다닥다닥 붙어서 불편하게 자야 한다. 우리는 관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종주를 하는 것이므로 짐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아마도 건성으로. 우리는 짐을 통영에 맡겨두고 배낭을 메고 길을 떠났다. 간소하게 짐 싸는 것이 몸에 배지 않은 시아버지는 가는 길에 뭔가를 주섬주섬 사들이기 시작했다. 나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 방금 내린 신선한 커피를 마셔야 하므로 일단 커피가루와  알루미늄 커피잔, 커피 내리는 기구를 샀다. 커피를 끓여야 하니 버너를 사고, 불을 붙여야 하니 라이터를 샀다. 커피를 마신 후 사과를 먹어야 하니 사과 세 개와 칼을 샀다. 칼을 샀으므로 접시를 샀다. 접시를 샀으므로 포크를 샀다... 방만구 씨에게 눈치를 줬다. 더 이상 사면 위험하다고.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눈치 없는 아들은 대피소에 도착하면 팩소주를 마셔야 한다며(예전에 한겨울 설악산 등반 때 대피소에서 누가 줘서 팩소주를 마셔본 적 있음) 팩소주를 몇 개 사서 넣었다. 우리의 쇼핑이 끝나갈 때, 시아버지는 보온도시락 통 보다 더 큰 카메라 가방을 메고, 배낭을 메고, 까만 비닐봉다리까지 들고 계셨다.


구례터미널에 도착하여 시내를 좀 둘러보다 보니 성삼재 가는 버스시간이 임박했다. 나는 시아버지와 방만구 씨에게 빨리 가야 버스를 탈 수 있다고 마구 재촉해댔다. 시아버지와 방만구 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뭉그적거리며 구경할 것 다 구경하고, 살 것을 다 샀다. 택시 타고 가면 되지 놀러 와서 왜 재촉이냐며 도리어 나를 나무랐다. 결국 버스는 떠나고 우리는 비싼 돈을 내고 택시를 타고 성삼재에 올랐다.


성삼재에서 연하천 대피소까지의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의 연속이었다. 이제 다 왔나 싶으면 다시 내리막이 시작되었고 다 왔겠지 생각되면 다시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짐이 많다 보니 걸음이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시아버지의 짐을 나눠진 방만구 씨의 무릎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어둑신해질 무렵 우리는 연하천 대피소에 도착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하늘의 별을 보며 팩소주를 마시니 나름 여기까지 온 사실이 보람차고 기뻤다.


앞에 걸어가고있는 나와 방만구. 시아버지 체력도 보통은 넘었음.


다음날 아침, 생전 처음 낯선 사람들 사이에 다닥다닥 누워 매트리스도 없이 주무신 시아버지는 학을 뗐다. 옆에 누운 사람이 코를 고는 바람에 한 숨도 못 잤다고, 땀냄새가 진동했다고, 아침에 샤워를 할 수 없었다고, 그런 이유로 종주를 더 이상 못하겠다고 선언하셨다. 마침 방만구 씨의 무릎도 성치 않았다. 우리는 짧은 회의 끝에 종주를 포기하고 하산하기로 했다. 우리가 가져온 식량은 대피소를 운영하시는 분들께 나눠주었다. 친절하게도 대피소에는 우리처럼 어떠한 이유로 중도 하산해야 하는 사람을 위해 길을 안내해주는 분이 계셨다. 그분은 안전하고 빠른 길로 우리의 하산을 도왔다.


그 이후부터 나는 산으로 가는 코스는 무조건 다 빼고 도시에서 맛있는 것을 먹고 구경하는 쪽으로 루트를 다시 짰다. 전라도는 그런 여행자에게는 천국이었다. 길가다가 어떤 식당에 들어가도 음식이 맛있었다. 사람들은 친절했다. 담양의 죽녹원과 메타세퀴이아길, 소쇄원은 한적하면서도 아름다웠다. 담양 시내에 위치한 중앙장 모텔에 도착했더니 통영에서 부친 캐리어가 벌써 도착해 있었다. 모텔 주인아저씨가 아주 친절했다. 우리에게 여기 오면 담양의 명물 대통밥을 먹어봐야 한다며 대통밥 식당까지 직접 데려다줬다. 전라도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리산 종주를 끝내지 못한 것이 약간 아쉬웠지만 우리의 20박 21일 한국 여행은 생각보다 알찼고 즐거웠다. 나의 시아버지도 평생 잊혀지지 않을 추억이 되었다며 우리 가족들에게 고마워했다. 여행이 수월찮긴 했지만 나도 돌아오고 나니 두 가족의 유대관계가 각별해진 것 같아 뿌듯했다.


한국에서 돌아온 후 나는 한 동안 한스 삼촌으로부터 원망을 들어야 했다. 시아버지께서 어찌나 융숭한 대접을 해준 사돈댁이며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진 전라도 한정식에 대한 얘기를 하셨을지 안봐도 그림이 그려졌다. 한국에서 찍은 많은 사진을 한스 삼촌께 이메일로 보내드렸을 것이다. 한스 삼촌은 그 사진을 보고 흥분하셔서 다음엔 우리와 함께 한국으로 가야한다고 내게 단단히 일러두었지만, 한스 삼촌 내외와 한국에 가는 일은 그 후 15년 동안 없었다.


꽤 오래 시간이 지난 일이긴 하지만 이 글을 쓰면서 갑자기 올케가 아침상을 준비했다는 부분에서 갑자기 내 마음이 울컥해졌다. 우리 올케는 우리나라 착한 며느리의 표본이다. 시부모한테 잘하고 시누이한테 잘해서 볼때마다 시댁식구에 속하는 내가 늘 미안해지는. 입장 바꿔놓고 생각해서 우리 시동생이 브라질 여자와 결혼해서 브라질에서 살고 있는데 오랜만에 장인과 부인을 데리고 독일로 왔다고 치자. 시동생이 브라질 장인과 부인을 비롯, 친척들을 15인승 미니버스에 태우고 우리 집에 온다고 하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나라면 당연히 식당을 잡는다.


나는 태어나서 저렇게 많은 손님치레를 해본 적이 없다. 제사많은 집에 태어나긴 했지만 둘째딸로 태어나 부침게 한 번 안부쳐보고 컸다. 당연히 손님치레도 제대로 못해서 우리 올케처럼  잡채며 김밥이며 갈비며 만들지 못한다. 그래서 이 글을 쓰면서 갑자기 올케에게 전화해서 뜬금없지만 약간의 성의표시를 했다. 요즘 세상이 모두의 권리가 소중한 시대 아닌가 말이다. 조금만 피해를 봐도 나 아프다고 아우성치는 세상에 우리 올케는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입 다물고 제사 많은 집 맏며느리로 살아왔다.


이런 며느리 독일에는 없다. 


나는 사실상 시아버지를 딱 한 번 한국으로 모시고 관광시켜드린 것으로 한국에서 온 며느리로서의 도리를 끝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이었으니 내가 시아버지를 모시고 관광을 시켜드린 것이지 독일에서 우리의 관계는 누가 누구를 모시고 누가 누구의 모심을 받고 하는 관계가 아니다. 우리의 관계는 친구보다 조금 더 가까운 관계, 일상을 Whats App으로 공유하고 좋은 책이 있으면 소개해 주거나 부쳐주는 관계 정도.


아참, 얼마전 시아버지께서 독일판으로 발행된 82년생 김지영을 읽으시고 재미있다며 내게 빌려주겠다고 전화를 하셨다. 나는 소포값이 많이 들어가니 내가 사서 보겠다고 대답했다. 한국인 며느리가 있어서 그런지 82년생 김지영이란 소설이 그에게는 특별하게 읽혀졌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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