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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이 Aug 10. 2020

나의 자궁, 슬픔과 고통의 원천

여자의 몸, 이토록 소모적인 몸뚱아리



공중 화장실에서 애를 낳고 신생아를 유기한 10대 아기엄마의 기사를 접하고... 나는 할 말을 잃고 변기 옆에서 고통에 몸부림쳤을 어린 엄마를 생각하며 몸서리쳤다. 신생아를 유기했다는 죄는 쳐두고, 그 무시무시한 고통을 겪어내며 혼자 아이를 낳을 수 밖에 없었던 그 이름모를 소녀가 불쌍해 소녀를 옹호하는 댓글을 썼던 적이 있었다. 그후 쌍욕을 얻어먹었지만 소녀를 옹호하는 내 마음은 절대 바뀌지 않았다. 저주받은 쾌락의 씨앗. 자기의 몸에 싹을 틔우고 자기의 피와 살을 먹고 자란 뒤 어마어마한 고통을 주고서야 세상에 나온 핏덩이를 보고 소녀는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공포에 질려 핏덩이를 동정할만한 마음의 여유는 있었을까.  소녀는 평생 저주의 씨앗을 품었던 자기의 자궁을 저주하며 살아가게될까?


나의 자궁...


14살때부터 지금까지 36년동안 내게 어마어마한 리통을 안겨줬고, 애 셋을 품었으며, 그중 죽은 아이 둘을 만들어냈던, 내게 있어서는 슬픔과 고통의 원천. 나는 이 모든 고통을 겪으면서 여자의 몸이 이토록 소모적일 수가 있나 싶어 나를 여자일 수 있도록 해준 자궁에 애착을 가지기는 커녕 도려내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영화 블레이드 런너를 보며 안드로이드가 만들어지는 세상이 오면 포경수술하듯 간단하게, 아니명 맹장을 떼어내듯 쉽게 여자들이 자궁을 제거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생각해본 적도 있었다.


나는 중2때 생리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50이된 지금까지 매달 어마어마한 생리통에 시달리면서 살고 있는데 아이를 낳고부터는 생리통에 버금가는 배란통까지 겪고 있으므로 거의 한 달에 반을 통증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 아니, 갱년기의 증세인지 몰라도 30일 주기로 하던 생리주기가 점점 짧아져 이제는 24일에 한 번씩 하게 되었으니 한 달에 반 이상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마어마한 통증이라고 말은 했지만 아마 제대로된 생리통에 시달려보지 않은 남자들은 이 통증이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상상도 못할 것이다.


일단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실제 체온을 재보면 정상임에도 불구하고 몸살을 앓을때처럼 열이 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몸의 5감이 예민해진다. 귀가 예민해져서 누가 조금만 소리를 지르거나 텔레비전 소리를 크게 해놔도 귀가 시끄럽다. 코가 예민해져서 약간의 역겨운 냄새에도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위장의 상태도 좋지 않아 잘 먹지 못하고 먹더라도 자주 체한다. 체했을 때의 고통 역시 어마어마하다. 실제로 소름이 존재하진 않지만 온 몸에 오돌도돌 소름이 돋은 듯한 느낌이 들므로 누가 약간만 쳐도, 어딘가에 스쳐도 고통스럽다. 대장부터 자궁, 나팔관, 척추 아랫부분, 항문, 골반까지 앞으로 뒤로 다 아프다. 몸살과 같은 병이 오게되면 생리일에 오는 수가 많다.  나는 통증으로 인하여 내 자궁이 어디있는지, 나팔관이 어디 붙어 있는지까지 다 알 수 있을 정도다.


어머, 그래서 어떻게 사니?


그래도 살아야지 어쩌겠니. 워낙에 오랫동안 시달린 통증이라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살아. 그나마 일에 몰두하다 보면 통증을 느낄 새도 없고.


물론 생리통 때문에 산부인과에 가본 적도 여러번이다. 하지만 매번 이상이 없다는 결과를 받기 위해 산부인과의 굴욕의자에 두 다리를 쫙 벌리고 앉아 손가락 발가락이 쭈뼛쭈뼛해질 정도로 쑤셔대는 초음파기를 감당하는 것도 지치고. 그래서 이젠 병원에 안간다.


그러 지난 6월에 점점 심해지는 통증을 더이상 감당할 수가 없어 노래진 얼굴을 하고 산부인과를 찾았다. 내가 병원을 찾은 것은... 내 자궁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혹시 자궁을 떼어내면 어떨까 상담을 받고싶어서였다.


동네 산부인과에 갔더니 역시나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자궁내에는 이상이 없으나 다른쪽으로 문제가 있을 수 있으니 큰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라고 소견서를 써줬다. 그럼 그렇겠지, 큰병원에 가긴 뭘가, 병원으로 돌리고 돌리고 검사받고 검사받고 그러다 말겠지. 거기 가도 뭘 뾰족한 수 있을라구. 의사란 사람들은 아는게 하나도 없고 생리통은 그저 견뎌야하는 통증이고. 이러며 시간만 보내다가 다시 생리를 시작하게 되었고, 또다시 어마어마한 통증을 맛본 이후에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의사가 소견서를 써준 종합병원에 전화를 하여 진찰일을 받아왔다.


고속도로를 타고 집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종합병원에 가기 위해 그날은 일찍 일어났다. 아침 8시라 그런지 종합병원 산부인과 병동은 한산했다. 오랜만에 와보는 산부인과 병동이다.  내가 편하게 잠자는 동안 누군가는 저 분만실에서 죽을 힘을 내서 애를 낳았겠구나 싶어서 몸이 찌릿찌릿해지는 것 같았다. 계속 기다리다 보니 간호사가 질문지를 내게 건네줬다. 2장이나 되는 질문지에 빽빽하게 나의 신상정보에서부터 애를 몇이나 낳았는지, 최종생리일, 피임여부, 알레르기 여부, 수술여부, 당뇨를 비롯한 자가면역질환 여부 등을 빼곡하게 적어서 제출했다.


호출을 받고 진찰실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멈칫! 했다.


의사가 남자였다. 나는 여태까지 산부인과에서 남자 의사한테 진찰받은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애를 받아준 조산사도 여자였고 출산후 회음부를 꿰매준 것도 여자 의사였다. 늘 동네 산부인과를 선택할때면 이름을 보고 여자 의사한테만 진찰을 받았는데, 이번엔 소견서를 받아서 온 거라 내가 의사를 선택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나는 문지방에 서서 한 1초정도 망설였다.


집으로 갈까?


망설여봤자지. 다음 생리가 끝나고 나면 황급히  다시 이리로 올게 틀림없어. 그래서 결국 문지방을 통과하여 진찰실로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문지방에서 환자의자에 앉기까지 5초정도 이런저런 생각들이 나의 뇌속에 확 왔다가 사라졌다.


남자인 주제에 니가 생리통을 알아? 애 낳아봤어? 일어설때마다 선지피가 쑥 나오는 경험을 해봤어? 배란때면 커지고 아파지는 젖통을 부여잡고 뛰어봤어? 그것도 안겪어본 주제에 여자를 진찰하겠다고 산부의과 의사가 됐니?


그러다 다른 한쪽에선 또,


아니지... 그럴 수도 있지. 암환자 치료하는 의사가 꼭 암에 걸려봐야하는 건 아니지. 신장병 치료하는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신장병에 걸려봐야하는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저 사람을 너무 나무라진 말자구.


진찰실은 소박했다. 컴퓨터가 놓인 의사책상 하나, 환자용 의자 두개, 그리고 벽에 잠자는 신생아 포스터 한 장. 나는 신생아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의사에게 눈길을 줬다. 초록색 마스크를 끼고 있어 얼굴 전체를 볼 순 없었지만 눈과 피부색깔로 봐서는 조상이 아랍사람? 아니면 이란? 아프가니스탄? 내가 아는 지식을 총 동원하여  그 사람의 조상이 어디인지 알아내려고 노력하고있을 무렵 의사가 말을 걸어왔다.


어디가 어떻게 안좋으세요?


예, 그러니까요, 제가 생리를 14살에 시작을 했는데요, 아직도 생리통이 심해요. 애를 낳은 후부턴...


왜 이 부분에서 눈물이 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정말 당황스러웠다. 내가 아무데서나 우는 사람이 아닌데, 게다가 의사라는 부류의 사람을 그다지 믿지도, 의지하지도 않는 내가 난데없이 의사앞에 울다니, 이런 떠그럴...


의사는 휴지를 가져다 내게 전해주고는, 애 셋을 낳았는데 그중 하나가 살아서 태어난 거냐고 질문지에 적힌 내용을 부연해서 물어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벌써 10년이 넘은 얘기라 벌써 내 속에서 잊혀진 얘기인줄 알았는데 그것이 어디선가 살아있다가 내가 분만실을 지날때마다 꿈틀꿈틀 올라와서 눈물을 자아내는 모양이다. 잠자는 신생아 사진을 보는 것도 내게는 트라우마다.


그 의사는 뭐... 그닥 환자가 없어서 시간에 쫒기지 않는 모양인지 자기 얘기를 했다.


저는 원래 의사가 아니었어요. 은행원으로 평범하게 살아가다가 애 셋을 잃는 일이 일어났죠. 그 이후에 직장을 그만두고 방황하다가 의과대학엘 들어갔어요. 그것도 생명의 탄생과 관련된 부분을 공부하고 싶어서 이렇게 산부인과 의사가 된 거죠. 저는 당시에 정신과를 방문해서 트라우마를 치료했었는데요, 환자분 혹시 아직 그 상처를 방치하고 계신 상태라면 정신과 치료를 추천드립니다. 이런류의 상처는 종교적인 믿음이 전혀 도움이 되질 못해요.


나는 건성으로 듣고 있다가, 이 사람 산부인과 의사가 된 이유가 명료하군 하고만 생각했다.


문진이 있은 후 굴욕의자에 앉아 한차례 초음파 검사가 있었다. 의사는 생리일이 가까워올수록 진단이 더 정확해지는데... 하며 모니터 속 배란기에 접어든 내 자궁을 보여주었다. 저런 모습의 모니터 속엔 늘 작은 심장이 벌떡벌떡 뛰고있는 아기가 들어있었는데 이번엔 빈 자궁이었다. 의사는 배란기에 접어들어서 그런지 여기 저기 액체가 보인다고 여기가 두껍네 저기가 두껍네 하면서 내 자궁속을 샅샅이 살펴보며 설명을 해댔다.


증세에 대한 진단은, Endometriose.


병이름이 너무 고급져. 뭐랄까... 앞에 Endo만 빼면 유리로 만든 꽃이름같아. 아니면 좌우대칭이 아름다운 나비이름. Metriose라니... Boroliose나 Gürtelrose 아니면 Trombose 이런 병명보다 얼마나 고급지니... 게다가 내가 지금까지 못들어본 병 이름이니 희귀성도 있고, 후훗.


내가 망상병 환자처럼 병명을 가지고 이런 헛짓거리를 할 동안 의사는 책꽂이에서 책을 한 권을 꺼냈다. 그는 생물책에서나 볼법한 뱃속 사진을 펼쳐놓고 생물 선생님처럼 설명을 해줬다.


원래 배란기에 접어들면 자궁내에 점막들이 점점 두꺼워져요. 그리고 그것들이 착상이 안되면 떨어져 나가죠. 그걸 우리는 생리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 점막들이 자궁내에만 존재해야하는데 어떤 이유로 배 전체에 분포하게된 거죠. 여기 저기 제가 빨갛게 표시해둔 부분 이죠? 여기에 점막들이 존재해서 그것들이 대변이 섞여서 빠져나가기도 하고 나가지 못하고 통증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설사 때때로 하시죠? 특히 생리때 즈음에요.


예, 맞아요.


수술요법을 통해서 덩어리를 제거하는 방법도 있고요, 아이를 낳을 계획이 없다면 자궁을 덜어낼 수도 있고, 손쉬운 방법으로는 일정기간동안 피임약을 복용해보는 방법도 있습니다. 환자분께서는 아까 자궁을 덜어내고 싶다고 하셨는데요, 폐경에 가까워지고있으니 자궁을 덜어내시는 건 조금 생각해보시고 일단 한 6개월정도 피임약을 복용해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결론은 늘 손쉬운 쪽으로. 그래서 피임약을 한번 복용해보기로 했다. 피임약은 의사처방없이 살 수가 없으니 또 동네 산부인과에 가서 상담을 받아야한단다.


피임약 하나 사는데 산부인과에 재방문해서 상담을 받아야 한다구요?


예, 피임약도 여러 종류가 있어서 의사의 진단하에 처방전을 받아서 구입하셔야 해요.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그 의사는 Endometriose로 고생하는 환자분들의 모임이 있는데 코로나 때문에 모임을 못가지다가 9월부터 다시 한 달에 한 번 모임을 가지고 있으니 관심이 있으면 한 번 찾아가 보라고 했다. 환자들끼리 스스로 모임을 가지지만 때때로 조언필요할 땐 자기도 나가서 상담을 해준다고, 같은 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무래도 서로 더 잘 이해할 수 있는게 아니겠냐며. 그리고 그 모임에선 증상에 대해 얘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운동모임도 가지고 음식도 나눠먹고... 그러다 갑자기 내게 물었다.


그런데 어느 나라에서 오셨어요?


남한에서 왔는데요.


아, 코리아? 김치! 제가 의대다닐때 우리반에 한국인 학생이 하나 있었는데요, 파티때 김치를 가지고 왔더라구요. 그걸 생전 처음으로 먹어봤는데 얼마나 맛있던지... 제가 한 양푼이나 되는 걸 다 먹어서 다음날 복통으로 고생했답니다. 저 김치를 너무 사랑해요. 혹시 모임에 나오시게되면 김치를 가져오실 수 있나요?


사서갈께요. 김치 안담아 먹어서요.


말로는 김치를 가지고 간다고 하긴 했지만, 참가여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안 가야할 이유를 대어 보라면, 나도 아파죽겠는데 어마어마한 생리통과 씨름하는 여자들 만나봤자 아픈 얘기말고 더 할 얘기가 있을까 싶어서. 요즘 갱년기를 맞은 내 친구들과 전화를 해봐도 늘 삭신이 쑤시는 얘기, 갱년기 우울증 얘기, 아니면 사춘기 자식과 싸우는 얘기, 치매에 걸린 친정 엄마얘기 뿐이다. 만나서 얘기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에너지가 쪽 빨려서 힘이 없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 보단 몸이고 정신이고 다 건강해서 보면 웃음이 나는 어린이나 동물들을 주로 만나고 싶다.


가야할 이유라면, 그동안 나는 늘 누구에게건 내 아픔에 대해선 함구하고 살아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남한테 아프다고 징징대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혼자 짊어지고 가야할 고통 징징댄다고 어디가 나아지나? 그래서 속을 털어놓을 친구를 만들지도 않았고, 내게 속을 털어놓는 친구가 있으면 그 관계를 의도적으로 차단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내 성격이 만병의 원인이었던 건 아닐까 싶다. 누구도 귀담아 듣지 않았던 내 아픈 얘기를 하고나면 그 덩어리들이 없어지지는 않을지언정 속은 좀 시원해질 것 같기도 했다.


자궁을 덜어내는 일은 좀 생각해보기로 했다.


 욱하는 마음에 화풀이 하듯 덜어내겠다고 했지만 사실 자궁을 떼어낸다는 사실이 좀 무섭다. 자궁이 내 여성성을 대표한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 아니다. 제3의 성이 법적으로 인정받는 독일에서 자궁이 있는 여자건 자궁이 없는 여자건, 남자였던 여자건 여자였던 남자건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다만  탐탁치 않은 자궁, 이제 그 임무가 끝난 자궁이지만 몸의 일부를 도려낸다는 사실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슬픔과 고통의 원천이라고 자궁을 표현하긴 했지만 희노애락을 함께한 내 몸의 일부 아니겠는가. 게다가 나는 내 몸에 칼이건 총이건 바늘이건 대는 것 자체를 못본다. 오죽하면 주삿바늘이 무서워서 남들 다 맞는 무통주사도 안맞고 애를 그냥 낳았다. 바늘 무서워서 수액도 못맞는다. (애낳고 자궁수축되는 수액맞다가 바늘을 버렸을 정도다) 귀를 뚫고 싶었지만 총이 무서워 귀를 못뚫었고, 친한 친구가 한의사이지만 체했을 때 침놔준다는 것도 거절할 정도다. 바늘도 이렇게 무서워 하는 내가 몸에 칼대는 걸 어떻게 선택하겠는가.

 

그러니 나는 앞으로도 계속 자궁을 달고 살게될 가능성이 높다. 폐경에 접어들어도 계속해서 통증이 있을 것인지 일단은 지켜보기로 했다. 통증의 원인을 알고나니 마음이 훨씬 홀가분하다. 원인을 알고 아픈 것과 원인을 모르고 아픈 것의 차이가 이렇게 확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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