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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이 Jun 28. 2020

학생기숙사에 차린 신접살림

소꿉놀이

2000년,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나는 작은 이민가방을 하나 들고 함부르크 공항에 도착했다. 이 도시에 와본 것이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처음 왔던 건 1995년 혼자 유럽여행을 다닐 적. 북유럽을 돌다가 뮌헨으로 가던 길 이른 새벽에 기차를 갈아타기 위해 함부르크에 도착한 적이 있었다. 새벽 3시였던가, 도시를 둘러보기엔 너무 이른 시긴이라 기차역 외진 계단에서 웅크리고 앉아 서너 시간 잠을 청했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몰랐다. 5년 후 내가 이 도시에서 살게 될 줄은. 게다가 같은 시간, 내가 잠을 청했던 그 기차역에서 불과 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미래의 남편이 될 방만구 씨가 자고 있었다는 것을.


유럽에 오면 늘 여행자의 마인드가 되어서 그런 걸까, 공항에 도착한 후 이 낯선 도시에 호텔이 아닌 내가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방만구 씨가 마중을 나와 우리는 신접살림을 차린 우리의 첫 아파트로 갔다. 그곳은 함부르크의 맨 북쪽 끝에 위치한 학생 기숙사, 28평방미터(8평)에 거실 없이 방 두 개짜리. 2000년 크리스마스가 임박한 때라 오후 4시만 돼도 어둑신해질 때였다. 크리스마스인데도 어찌나 쥐 죽은 듯 고요하던지... 주로 주택들이 오밀조밀 모여있는 고즈넉한 마을에 보도블록의 사각형이 바뀔 때마다 덜컥 덜컥 소리를 내는 이민가방 바퀴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그렇게 지하철 역에서 400미터 정도를 걸었을까, 고즈넉한 주택가와는 어울리지 않게 뚕! 하고 오렌지색 건물이 나타났다. 성냥갑처럼 지은 오렌지색 건물의 창문엔 모조리 노란색 커튼이 쳐져있었다. 이 집이 내가 살게 될 집이었다. 독일의 첫 내 집을 본 내 첫인상은 이랬다.


건물이 너무 병원 같아 정이 안감.




노란 쓰레기통 보이는가? 그 바로 뒤가 우리집



방만구 씨는 중국 유학에서 돌아오자마자 신접살림을 차릴 집을 구했는데, 급하게 구하다 보니 마침 비어있었던 쓰레기 컨테이너 의 기숙사 아파트를 구했던 것이다. 노랑 검정 쓰레기통 컨테이너 여섯 개가 우리 방 창문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어 창문을 닫으나 여나 우리 눈에 보이는 전망이라고는 그 쓰레기 통들이 전부였다. 게다가 집이 1층 출입문 바로 옆이라 문 여닫을 때마다 쿵 소리가 우리 방까지 들렸다. 발코니도 없고. 객관적으로 보면 최악이었지만 젊어서 그랬던지 우리는 이곳에서 소꿉놀이하듯 재미있게 살았다. 불가사의하게 들리겠지만 이 작은 집에 최고 10명까지 사람들을 초대해 파티를 한 적도 있었고, 네 사람이 슬리핑 백을 들고 와 2박 3일 동안 묵고 간 적도 있었다.


작디작은 기숙사에 들어가 보니 그래도 있을 건 다 있었다. 난생처음 시어머니가 되어 한껏 고무되어있었던 잉그리드가 자식 신접살림을 모두 이케아에서 장만해주었다. 자기 취향대로 그릇이며 이불이며 요모조모 거무튀튀한 것들을 사다가 주방과 집안을 채워놓았다. 취향이 까다로운 며느리였다면 시어머니의 일방적인 쇼핑이 마음에 안 들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취향이 고급진들 이 저렴한 기숙사에 고급진 물건들는 어울리지도 않았다. 나는 잉그리드의 마음을 고맙게 받았다. 그 거무튀튀한 것들의 대부분은 20년이 지난 여적지 쓰고 있는 중이고.


기숙사의 3평정도 되었던 내방. 시아버님이 정원에 있는 전나무를 끊어다 주셔서 성탄트리 장식을 했음. 그러고 보니 침대 머리맡에 칼이...






시작하면 한 나절, 수다맨 노베르트


우리 기숙사의 풍경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뒷 배경으로 거뭇하게 이끼가 낀 오렌지색 건물(페인트칠 아니고 테라코타 색 벽돌 시공)이 보이고 그 앞으로 컨테이너 여섯 개(1x6 아니고 2x3)가 보이는데 컨테이너를 따라 짜 놓은 철사 울타리 옆에 종종 대머리 노베르트가 서있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그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슬리퍼를 신고 흰색 소매 없는 러닝셔츠를 입고 있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것이었다. 그의 얼굴은 핏기 없이 하얗기는 하지만 심각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늘 싱글거리며 쓰레기 통 옆에 서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슬쩍 얘기를 건넨다.


뚜껑열 때 조심해, 누가 재활용 쓰레기통에 똥기저귀 버렸어!


아무리 말수가 적은 사람이라도, 심지어 독일말이 아주 서툰 사람이라도 노베르트와 함께 있으면 신기하게도 오래 대화를 할 수가 있었다. 노베르트는 그렇게 누구든 상관 않고 파트너를 바꿔가며 한나절 동안 지치지 않고 수다 떤 후에야 쓰레기통을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이런 행동에 입각하여 그의 인디언식 이름을 지어보자면,


 '쓰레기통 들고 함흥차사'.


노베르트가 그 전에는 우리 기숙사 어디쯤 살았는지는 모르나 우리가 이사를 들어간 후 몇 달 있다가 바로 우리 옆 집으로 이사를 왔다. 나는 우리 집 문을 열고 나오다가 동시에 옆집 문을 열고 나오는 노베르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 기숙사에는 4인 실과 2인실이 있었다. 4인실에는 독신 학생들이 입주해 공동으로 사는 곳이이고 2인실은 부부나 아이 하나 키우는 싱글 마마, 싱글파파가 주로 사는 곳이었다. 그가 우리 집 옆 2인실로 이사를 왔다면 애를 입양했거나 결혼을 한 것이었다. 기숙사에 사는 사람을 죄다 꿰고 있었던 노베르트가 달력모델처럼 예쁜 시함을 모를 리 없었다. 시함은 모로코에서 온  곱슬머리 아가씨였고 모슬렘이었다. 노베르트의 적극적인 구애로 둘은 만난 지 단 2 개월 만에 결혼했다.


노베르트가 옆집으로 이사온 후 우리는 자주 만나 밥도 먹고, 기숙사 옥상에서 그릴도 하고, 볼링도 치러 다녔다. 그렇게 결혼한 지 한 6개월 정도가 지났을까 노베르트가 우리 집으로 와서 힘들어서 못살겠다고 푸념을 늘어놓는 일이 잦았다. 시함네 가족이 모슬렘으로 개종을 강요해대는 통에 못살겠고, 시함네 오빠들이 그렇게 자기네들 결혼생활에 사사건건 간섭을 해서 못살겠고...  모슬렘 여자와 사는 게 이렇게 피곤하고 힘든 일인지 미처 몰랐노라고 한참을 푸념을 늘어놓다 돌아갔다. 시함도 우리 집으로 와서는 결혼을 너무 서둘렀네, 사람 좋은 줄 알았더니 살아보니 그게 아니었네, 남자가 도대체 이해심이라곤 눈곱만치도 없어 이렇게 살바엔 이혼하는 게 낫겠네 하고 한참을 푸념을 늘어놓다 돌아갔다. 종종 싸우는 소리가 들리더니 급기야 몇 개월 후에 둘이 갈라서게 된다. 둘 다 이혼 후 기숙사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 이런 번개같은 결혼과 이혼은 내 생전에 또 처음봤다.


노베르트가 떠나자 나는 심심했다. 우리 기숙사를 채우던 풍경 하나가 없어진 느낌이었다. 나는 그가 떠난 후에도 노란색 커튼을 젖히고 혹시 노베르트가 쓰레기 컨테이너 옆에 있지나 않나 해서 습관처럼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신세 좀 져도 될까요? 카메룬 여자


노베르트가 이사를 나가고 그 자리에 카메룬에서 온 싱글 마마가 대여섯 살짜리 딸과 함께 들어왔다. 남편은 다른 도시에서 공부하게 돼서 어쩔 수 없이  떨어져서 산다고 했지만 나는 그 남자가 애를 보러 방문하는 것을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여자 혼자 애 데리고 이사를 들어왔으니 얼마나 할 일이 많았겠는가. 그래서 곧잘 집안일을 도와달라고 방만구 씨에게 부탁을 해왔다. 드릴로  벽에 구멍도 뚫어주고  가구도 조립해주고 짐도 날라주고. 처음에는 좋은 이웃이 되고자 호의를 가지고 도와줬는데 슬슬 우리의 호의가 그녀의 권리가 될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 기숙사에 있던 냉장고는 딱 드럼 세탁기만 했다. 냉동음식이나 저장음식을 많이 먹는 사람이라면 냉장고가 작을  수도 있겠지만 냉동, 저장음식을 보관하지 않았던 우리 집 냉장고는 늘 3분의 2쯤 비어있었다. 카메룬 여자는 우연히 우리 집  냉장고가 그렇게 헐렁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냉동 저장음식을 하나 둘 우리 집 냉장고에 보관하기 시작했다. 냉장고를 열어보면 낯선 반찬통이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싸길래 많이 사 왔다며 그 여자가 현관에서 핏물이 뚝뚝 흐르는 고깃덩어리를 들고 서있었다. 잠깐만 우리 집 냉동실에 보관하겠다더니 1주일이 넘게 가져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이쯤에서 관계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그 여자한테 좀 얘기해봐. 우리 집 냉장고에 있는 물건들 다 가져가라고.


방만구 씨는 체면 때문에 혹은 관계가 나빠질까봐 해야할 소리를 못하는 타입이 아니다. 식당에서 웨이터가 음식 맛있게 드셨나요? 하고 물으면 건성으로 맛있었다고 대답할 사람이 아니다. 음식이 너무 짜고 전자렌지에 돌린 것처럼 건조했다고 느낀 그대로 말하는 타입이다. 친구나 가족에게도 하고 싶은 말은 담아두지  않고 다 하는 스타일이다. 남한테 싫은 소리도 곧잘 하는 방만구 씨가 그 여자한테 냉동실에 넣어둔 고기 가져가란 말은 차마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여자가 독일 남자라면  그런 소리 백 번도 했겠지만 아프리카 여자한테 잘못 그런 소릴 했다가 인종차별자란 소릴 들으면 어떻게 하냔 거였다. 나로서는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상황을 좀 똑바로 따져봐, 이게 인종 차별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래.


그래도 그렇지. 도움이 필요한 아프리카 여자한테 그런 소릴 어떻게 해.


그는  아마도 이중인격자, 위선자, 구두쇠, 루저, 사이코 등 세상의 많고 많은 부정적인 인간들의 타입 중 인종차별 자라는 타이틀을 제일 무서워하는  모양이었다. 전형적인 독일인으로 히틀러가 저지른 학살에 대한 부채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유대인에 대한 발언이나 타 인종에  대한 발언을 할 때면 아주 조심했다. 결국 내가 총대를 메고 그 여자한테 얘기했다. 여자대 여자, 외국인대 외국인으로 우리 집 냉장고  더 이상 못 빌려준다고.


그 여자는 그렇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둘 데가 없다며 그 핏물 흐르던 고깃덩어리를 꽤 오랫동안 우리 집 냉동실에 뒀다가 가져갔다. 남한테 폐끼치는 것을 중죄로 여기는 나같은 사람에겐 생각도 못할 뻔뻔스러움이었다.


한 번은 그 여자가 가위를 들고 우리 집을 찾아왔다. 머리를 잘라달란다. 응? 머리를? 내가? 미용사도 아닌데? 게다가 그 머리카락은 우리나라 여인네들의 직모도 아니었다. 잭슨 파이브 오빠들처럼  푹신한 곱슬머리를 여러갈래 촘촘하게 땋아서 마지막에 고무줄로 묶은 아프리칸 스타일. 길이는 한 뼘 정도로 치렁치렁하지는 않았다. 고무줄로 묶은 머리끝을 가위로 자르고 땋은 부분을 풀어달라고 했다. 이것은 어쩌면 아프리카에서는 여자들끼리 친목을 도모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나는 이런 머리카락은 뮤직비디오에서만 봤다. 가까이서 본 적도 만져본 적도 없으며 잘라본 적은 더구나 없다.


나는 그 머리를 보며 우리가 며칠 안 감은 머리를 두고 함부로 떡진 머리라고 얘기해선 안된다는 것을 알았다. 떡이질 정도라면 이 여자의 레게머리처럼 최소 몇 주는 머리를 안 감아야 한다. 아주 오랫동안 머리를 감지 않고 머리에 뭔가를 바르거나 뿌리는 것으로 세탁을 마친 듯 그 여자의 머리에는 쿰쿰한 정수리 냄새에 헤어제품 냄새가 섞여 미묘한 냄새가 났다. 머리카락을 자르는 건 해주겠는데 그 푹신한 머릿속에 손을 넣어 땋은 부분을 푸는 것 까진 도저히 해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고무줄을 묶은 끝부분만 싹 다 잘라준 뒤 땋은 걸 푸는 건 스스로 하라고 하고 보냈다. 카메룬 여자는 서른 개도 넘어 보이는 잘린 머리 꽁다리를 우리 집에 남겨둔 채 나갔다.


나는 그 머리 꽁다리를 보며 사람은 이래서 비슷하게 생긴 사람, 비슷한 음식을 먹고 비슷한 몸 냄새를 풍기는 사람끼리 살아야 하는 모양이구나 싶었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인종차별이 아닐까 생각하였다.





돈 벌 동안 우리 애 좀 봐주세요, 몽고 부부


우리 집 위층에는 몽고에서 유학 온 부부가 살았다. 그들은 우리 윗집에 살았지만 너무나 조용하게 살아서 사람 사는 소리도 안 들렸다. 복도에서 마주쳐도 수줍은 미소만 띤 채 얼른 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둘은 학교에는 명목상으로 등록만 해놓고 늘 돈을 벌러 다녔다. 평일뿐 아니라 주말에도 일을 하러 다니는지 집은 자주 비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해서 돈 좀 벌었냐는 내 질문에 몽고 여자는 어느 날 슬쩍 내게 귀띔해주었다. 벌어둔 돈이 3천만 원 정도 된다고. 나는 깜짝 놀랐다. 이런 또순이가 있나...


어느 날 난데없이 아기 울음소리가 나서 봤더니 이 부부는 소리 소문도 없이 아기를 낳아 세 식구가 되었다. 아기가 제법 걸을 무렵에는 갑자기 일을 하러 가야 한다며 애를 좀 봐달라고 종종 우리 집 문을 두드렸다.


애야 못 봐줄 것도 없다만...


아직 어려서 어린이집에 안 보냈던지 애가 독일말을 전혀 못 했다. 말이 하나도 안 통하는 생짜 몽고애를 보려니 참 난감했다. 몽고에선 바디 랭귀지 조차 한국과는 다른지 이리 오라고 손짓 발짓을 해도 애가 못 알아먹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애는 자꾸만 내게 몽고말을 해댔다. 커뮤니케이션이 전혀 안되는 데다 애가 어찌나 번잡스럽고 고집이 센지... 애와 놀아준 경험도 없던 내가 말도 안 통하는 몽고애를 데리고 놀이터 갔다가 식겁을 하고 돌아왔다. 그 얘기를 애기 엄마한테 했더니 다음에 애를 맡길 때는 벨트 같은 것을 주었다. 길거리를 다닐 때는 이 벨트를 애한테 채워서 다니면 도움이 될 거라고. 애기 엄마 말대로 다음번 놀이터에 갈 때 그 벨트를 가지고 갔다. 이 분주한 애를 쫒아다니느라 식겁을 하느니 좀 보기가 이상해도 벨트를 애한테 채울까 생각하며 벨트를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개 데리고 산책하는 것도 아니고 애한테 개줄 같은 것을 채우려니 이건 미관상 좀 아닌 것 같았다. 길거리 어디를 둘러봐도 애한테 개줄 같은 것을 달아서 산책하는 엄마는 본 적이 없었고.


애를 낳기 전엔 일절 오고 가는 것이 없더니, 애 때문에 교류가 생기자 애기 엄마는 고맙다며 우리를 초대해서 몽고 음식을 차려주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빵처럼 큰 만두를 만들어서 갖다 주기도 했다. 그것은 식당에서 만든 일품요리처럼 맛있었다. 그것을 얻어다 주면 방만구 씨가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한 접시를 다 먹고 그는 애기 엄마가 언제 또 애를 맡기려나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 무렵 나는 털실 가게에서 일을 했는데 몽고 부부가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나중에 내가 퇴사할 때 그 애기 엄마를 사장님께 소개해주었다. 글찮아도 내가 털실 가게를 그만둘 무렵에 우리 사장님이 너같이 칠칠케 일 잘하는 한국애를 하나 꽂아놓고 나가라고 으름장을 놓은 적도 있고. 나의 인간관계가 예나 지금이나 넓지 않다 보니 주변에 딱히 아는 한국사람도 없고 해서 결국 그 몽고 여자를 소개해주고 나왔다. 내가 보는 눈이 맞았는지 나중에 들은 소리로는 그 여자가 일을 아주 잘했단다. 게다가 털실 사업 돌아가는 것도 열심히 배워 울란바토르로 돌아간 후 털실 사업을 시작했단다. 가진돈 없이 독일로 와서 열심히 돈을 모아 돌아갈 땐 이삿짐에 털실 돌리는 기계 몇 대와 털실도 많이 넣어 함께 부쳤단다. 그것은 몽고에서 사업 밑천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 또순이가 분명히 많은 돈을 벌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울란바토르에서 이름만 대면 누구나 다 아는 사업가가 되었을 수도 있다.


좀 후회가 된다. 내가 그때의 인연을 지나치지 않고 붙들었다면 내게도 지금쯤 울란바토르에 한 명의 지인이 있는 건데. 이름이라도 기억해낸다면 어떻게든 찾아볼 수 있을 텐데 이름도 잊어버렸으니 연락할 길이 없다. 몽고 이름이 우리나라 사람들한텐 어찌나 길고 이상하게 들리는지 그 이름을 여적지 기억하는 것도 이상하지. 어쨌든 내가 시간이 지나 그 애기 엄마한테 연락을 했다면 아마 약간의 환영 정도는 받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내가 그 몽고 가족에게 그냥 이웃인가 말이다. 따지고 보면 나 때문에 돈도 벌고 울란바토르에서 사업도 시작하게 된 격이니 각별한 이웃이지.  





그래도 그리운 오렌지색 기숙사


필립! 필립!


밤 9시에 또 필립친구가 찾아온 모양이었다. 나는 필립이 누군지 모르지만 그가 우리집 근처 2층 어딘가에 살고 있다는 것은 알고있다. 그의 친구들은 누르라고 있는 벨은 누르질 않고 늘 창밖에서 큰 소리로 필립을 불러댔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정말... 이런 제기럴 놈의 기숙사. 도무지 낮이고 밤이고 조용할 때가 없다. 새벽 3시까지 계속되는 파티, 밤 10시에 교양 없게 쓰레기통에 병을 던지는 인간, 음악실 열쇠달라며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초인종, 세탁실 세탁기에 세탁이 끝난 세탁물을 몇 시간 동안이나 수거해가지 않는 인간.


이렇게 기숙사에서 살 땐 서로들 민폐를 끼치면서 살았던 것 같다. 그래도 생각해보면 기숙사에 살지 않으면 겪을 수 없는 재미있는 일들도 많았다. 방음이 된 음악실에 피아노가 한 대 있었는데 거기서 원하는 만큼 피아노 연습을 할 수 있었다. 악보도 다채롭게 구비되어 있었고. 거기서 나는 음대생 몇 명을 만나기도 했다. 불가리아에서 온 트럼펫 부는 학생(이름을 잊어버림), 그리고 첼로 연주하는 크리스티나. 그 인연으로  연주회에 가본 적도 있었다.


크리스티나의 머리긴 남자 친구 요른은 기숙사에서 살면서 지하 술집에서 바텐더를 하였다. 돈을 받고 하는 건지 무료봉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매주 수요일마다 열리는 기숙사 지하 술집에 가보면 요른이 긴 머리를 풀거나 묶고 늘 바에서 술을 따르고 있었다. 그곳은 학생가격, 즉 시세의 반값에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이었다. 요른은 내가 안면이 있다는 이유로 종종 특혜를 주었다. 동전 두 닢을 내고 데낄라 한 샷을 주문하면 칠성사이다 잔에 반이나 채운 데낄라가 나왔다. 방만구 씨와 나는 공술을 받은 양 흐뭇해하며 데낄라를 한 모금씩 나눠마시고 시큼한 레몬을 빨았다. 우리는 수요일마다 지하 술집을 찾아 싼 술을 잔뜩 마시고 얼큰하게 취했다. 술집이 우리 집 밑에 있으니 맘껏 취해도 집으로 돌아갈 걱정이 없었다.




학생기숙사 술집 내부




기숙사 뒤편 배구장




우리는 이 쓰레기 컨테이너 앞 오렌지색 기숙사에서 몇 년 살다가 시도 때도 없이 시끄러운 것에 정나미가 떨어진 데다 방만구 씨의 논문도 끝나갈 때가 되었고 해서 이사 갈 곳을 알아보았다. 기숙사에서 도보로 20분 정도 걸리는 곳의 3층, 방 세 개 딸린 보통 아파트로. 이사를 가서 처음으로 거실 바닥에 누웠는데 창문으로 보이는 전경이 쓰레기 통이 아니라서 얼마나 좋던지. 넓고 조용하고, 한밤중에 빈병을 컨테이너로 던져 넣는 이웃도 없고, 냉장고 빌려달라는 이웃도 없고, 애 봐달라는 이웃도 없고. 학생들만 잔뜩 있던 곳에서 노인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 이사를 오니 조용해서 좋긴 했는데, 여기도 문제가 좀 있었다.


노인들은 젊은 애들을 일단 좋아하지 않았다. 이사 들어오면서 우리가 환영받는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목요일마다 주민들이 돌아가며 계단청소를 했는데 까먹고 목요일을 넘기면 그렇게 야단을 쳤다. 청소가 깨끗하게 되지 않으면 문 앞에 메모지가 붙여진다. 청소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이케아 침대를 조립하고 있으면 아랫집 할머니가 올라와 시끄럽다고 불평을 했다. 점심시간이 지나서 피아노를 치는데도 시끄럽다고 윗집 할머니가 문을 두드렸다.


여보,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 기숙사에서 계속 살걸 그랬나?


이사를 한 후에도, 아니 방만구 씨가 졸업을 한 이후에도 한동안 우리는 수요일만 되면 기숙사 지하 술집을 찾았다. 출입문 열쇠가 없었으므로 우리는 이름표 붙은 초인종을 누구랄 것도 없이 대여섯 개 주르륵 누른다. 그러면 누구세요? 하고 물어보는 사람 하나 없이 누군가가 문을 열어준다. 지하 술집에서 놀다가 얼큰히 취한다. 걸어서 돌아오면서 우리가 기숙사 살 때가 얼마나 좋았는지, 애들이 얼마나 쿨했는지, 서로 민폐를 끼치면서도 웬만한 걸 가지고 트집 잡는 애들이 없었는데 우리동네 노인들은 정말이지 까다롭다고 불평을 했다. 있을 땐 모르겠더니 떠나고 나니 그때가 좋았던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우리가 동네사람으로서 할머니들에게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은 미나가 태어나고나서 부터다. 그 후부터 기숙사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우리는 우리 동네에 정을 붙이기 시작했다. 할머니들이 아기를 참 예뻐해줬다.


나는 나이 서른에 방만구 씨와 학생 기숙사에서 살면서 두 번째 스무 살을 맞이 하였다. 다른 친구들이 애 낳고, 직장 생활하고, 시월드에 스트레스받고, 아파트 빚을 갚아 나갈때 나는 명랑한 학창 시절을 경험했다. 그것 때문에 인생의 모든 것이 남들보다 몇 년 정도 늦어졌지만 그럴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한다. 학창 시절의 중심에는 오렌지 색 병동처럼 생긴 그 기숙사가 있었다.


아참, 독일 기숙사엔 늙은 학생들이 참 많다. 나이 서른에 기숙사 살면서 공부하는 사람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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