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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이 Jun 08. 2020

인생이 정말 고통의 바다라면

아기를 잃고 얻은 깨달음

나는 30대 후반에 4년 동안 총 3번의 임신과 출산을 경험하였다. 그중 둘째는 무사히 태어나서 현재 11살이 되었고 첫째와 셋째는 죽어서 태어났다. 첫째 한나는 출산일을 나흘 남겨두고 원인모를 이유로 갑자기 심장이 멈추었다. 그날은 목요일이었다. 그 전날인 수요일 정기검진에서 이상 없다는 진단을 받고 담당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다음 주엔 못 볼 수도 있으니 출산 잘하라는 인사를 듣고 헤어졌었다. 그런데 다음날 목요일 오후부터 태동이 느껴지지 않아 밤에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해봤더니 아기 심장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제까지 숨 가쁘게 뛰던 아기의 심장이 멈춘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해서 의사 선생님께 물어보았다. 혹시 심장이 잠시 멈췄다가 다시 뛰는 일은 생기지 않을까요?라고. 그럴 일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생각해도 어리석은 질문인 걸 알았지만 그렇게 물어보는 것 말고는 할 말이 없었다. 낳고 보니 아기의 탯줄이 목과 다리에 감겨있어 주변 살들이 벌겋게 벗겨져 있었다. 병원에서는 일 년에 삼천 명이 넘는 아이가 태어나지만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라고 했다.


유도분만으로 아기를 출산하는 과정에서 병원 조산사들의 따뜻했던 말들은 결코 잊을 수 없다. 슈테피라는 젊은 조산사는 심장이 멈춘 나를 꼭 살아있는 아기처럼 다루어 주었다. 기저귀를 채워주고 병원에서 제공하는 아기 옷도 입혀 주었다. 한나는 태어난 후 세 시간 정도 나와 함께 있다가 슈테피가 데리고 나갔다. 다음날 밤에 한나를 보려고 내려갔더니 이미 보관용 냉동실로 들어갔으니 데리고 나오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고 했다. 한 30분을 기다렸을까. 차가운 한나가 파란 입술을 한채 아기바구니에 담겨 내려왔다.


장미꽃잎이 아기 둘레에 뿌려져 있었다. 이 죽은 아기는 산모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쓰레기가 아니라 온전한 인간으로 존중받는구나 싶어 감사했다. 파란 입술이 너무 추워 보여 가져온 겨울 털실 풀오버를 입혀주었더니 방금 태어난 아기답게 아주 예뻤다. 너무 예뻐서 사진을 찍어주고 싶었지만 사진기를 안 가져왔다. 후회했다. 실온에 오래 있어서 그런지 한나가 코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내 눈물을 닦던 휴지로 한나의 코피를 닦아주고는 애를 조산사에게 데려다주었다.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병실로 돌아왔다. 그곳은 다행히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신생아와 엄마들의 병동이 아니라 일반 환자들이 머무는 병동이었다. 추가 요금을 낸 것도 아닌데 병원의 배려로 1인 병실이 주어져 나는 거기서 밤새도록 맘껏 울 수가 있었다. 젖 말리는 약을 먹고  2박 3일을 그 병실에서 있다가 집으로 왔다.


우리는 한나를 두고 퇴원했고 아기는 장례식 때까지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냉동실에 누워 기다려야 했다. 그 한 달 동안의 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고 치열했던 시간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어려움이라는 것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서른다섯 인생을 사는 동안 나는 사춘기를 겪어본 적도, 폭력을 경험한 적도, 가까운 누군가가 죽은 적도(할머니, 친척 어른 돌아가신 것은 호상이라 제외), 심지어 연애 중 가슴 시린 이별조차 경험해본 적 없는 백지와도 같은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첫아기가 죽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분노와 좌절이 솟구쳐 올라와 스스로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날마다 왜? 왜?라는 질문을 멈출 수가 없었다. 첫 한 달 동안 날마다 울면서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저주를 퍼부었고, 두 번째 달에는 이틀에 한 번, 세 번째 달엔 사흘에 한 번씩 울었는데 석 달이 지나자 슬픔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당시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은 그때의 내 감정을 고스란히 글로 적어보는 것과 사람들에게 겪은 일들을 반복해 얘기하는 것이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고 그 일에 대해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지만 울리는 전화통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방치할 순 없었다. 대답을 해야 했다. 같은 얘기를 몇십 번씩 반복하다보니 그 사실이 비로소 받아들여졌다.


당시 내가 몸담았던 합창단원들은 고맙게도 음식을 싸서 우리 집으로 와 노래를 불러주었다. 처음엔 안 왔으면 했지만 호의를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방문을 허락했는데 결과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 우울한 사람 둘이 있는 곳에 합창단원들이 와서 좋은 에너지를 뿌려주고 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기를 잃은 임산부들께 추천한다. 슬픈 일이 있으면 글로 적어볼 것, 사람들을 만날 것, 얘기할 것. 인풋이 있으면 아웃풋이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홀로 지내며 그런 기억들을 속에 꾸역꾸역 처박아만 놓으면 언젠가는 곪아서 속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당시 남편 방만구 씨는 다니던 헬스클럽도 그만두었다. 3주 휴가를 떠났다 돌아온 헬스클럽 강사가 지레 아기가 태어났을 거라 짐작하고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Hi, stolzer Papa!!'라고 인사했는데 그런 순간들을 참아내기가 너무 힘들어서였단다. 그는 한나의 일을 없었던 일로 치고 평소보다 더 많이 친구들을 만나고 게임을 하러 나갔다. 그는 한나의 죽음을 외면함으로써 한나를 잊으려 애썼고, 나는 그 일을 더욱 되씹고 글로 쓰고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함으로써 내 속에서 서서히 바래져 가길 원했다.


밥을 먹다가도 한나의 얘기를 끄집어내면 방만구 씨는 기겁을 하며 얘기를 끊으려고 했다. 그렇게 아픈 기억이 사라져 주길 원했지만 그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방만구 씨는 몇 달 후 극심한 우울증으로 고생했고 나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아기 심장 뛰는 소리만 들으면 한나의 심장이 멈췄던 날 밤이 생각나 괴로웠다.


독일에서는 산모가 아기를 낳으면 총 10회 조산사가 산모의 집을 방문하여 젖먹이는 법을 알려주고 아이와 산모의 건강상태를 체크해준다. 이 모든 비용은 건강보험에서 지불한다. 병원에서 돌아온 지 며칠이 안되어 머리가 희끗희끗한(아마도 환갑 정도) 조산사가 우리 집을 방문하였다. 아로마 오일로 배 마사지도 해주고 이런저런 얘기도 들려주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에서 그 조산사를 만난 것이 참 행운이 아니었나 싶다. 그녀가 오면 하루 종일 울었던 내 눈가가 채 마르기도 전에 그녀를 붙들고 앉아 인생은 왜 이렇게 허무한 걸까요? 나는 왜 이렇게 괴로운 걸까요 하고 다시 훌쩍거렸다. 그러면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인생은 고통의 바다라고 하지요."


이 말을 부처님이 하셨단다. 그러면 명언일 텐데 당시 내게는 그 말이 금시초문이었다. 아기를 잃은 것만 빼면 내 인생은 그럭저럭 행복의 바다였는데... 그래서 인생은 고통의 바다가 아니었노라고, 나는 앞으로도 이 일만 빼면 주욱 고통의 바다에서 살 사람이 아니라고, 게다가 이 세상에는 행복한 사람도 있고 고통스러운 사람도 있는데 그걸 몽땅 뚜드려 뭉쳐서 고통의 바다라고 일반화시키는 건 잘못하신 거라고. 그러니 부처님이 뭔가 잘못 아신 거라고 얘기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궁금하긴 했다. 내가 현재 일시적으로 고통의 바다에 있는 것은 사실이니 고통의 바다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이 뭔지.


"인생이 고통의 바다라고 치고, 그럼 어떻게 하면 빠져나올 수 있죠?"


그랬더니 조산사는 그건 자신이 알려줄 수 없으니 스스로 공부하란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때부터 나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그간 내가 살아왔던 세상이 너무나 단순했던 걸까, 그래서 내 사유의 깊이가 얕았던 걸까. 그 나이를 하고도 남들이 명작이라고 하는 책들을 읽어도 작가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책을 읽어도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다. 나는 누구인지 의문이 들었고, 이 세상은 무엇인지 의문이 들었고, 우리는 왜 태어나서 살다가 죽어야 하는지도 궁금했다. 사춘기 때 했어야 했던 질문들을 안 하고 살아왔더니 늦게 인생이 이렇게 힘들구나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통의 바다에 대한 정답을 봤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내 눈이 확 뜨이는 하나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시장에서 장을 봐와서 샐러드를 만들어 먹으려고 토마토를 잘랐다. 토마토 속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때 내가 잘랐던 토마토 속은 아래와 같이 5줄로 생겼었다. 그 속을 보고 그동안 감고 살아왔던 내 눈이 확 뜨였다고나 할까... 그 감동을 남기고 싶어 그림도 못 그리는 내가 그때 그 토마토 속을 그림으로 그려두었다.



별로 특별할 것 없는 그 토마토 속에 내가 이전엔 알지 못했던 질서가 들어있었다. 이렇게 조화롭고 아름다운 것이 토마토 속에 들어있었는데 왜 그동안 나는 이걸 보지 못했을까. 나는 장바구니 속에 들어있던 토마토를 모두 잘라보았다. 오이를 잘라보았다. 오렌지를 잘라보았다. 가로로 잘라도 보고 세로로 잘라도 보았다. 오이를 잘라봐도, 사과를 잘라봐도, 오렌지를 잘라보아도 그 모든 것들에 일정한 질서와 법칙이 존재했다. 밀밭에서 밀을 하나 뽑아 잘 관찰해보면 그 규칙적이고 아름다운 질서에 할 말을 잊는다. 그걸 인위적으로 만들려고 한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 끝도 없이 펼쳐진 밀밭 위로 자연의 질서와 법칙을 품은 수천수만 개의 밀들이 아주 쉽게 만들어져 쉽게 자라는 것은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을 자연스럽다라고 말했다. 나도 한나도 그 자연의 법칙들에 둘러싸인, 자연의 일부였던 것이었다.


나는 토마토 속을 보고 난 이후 내 속을 들여다보는 일도 하게 되었다. 사는 동안 내가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 사람인지 내 속을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 내 성격에 반하는 일을 하고 살며 불행했고, 내 성격에 반하는 사람들을 만나 불행했던 거였다. 지속적으로 나를 관찰하는 일, 그래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일은 늦어도 아기를 갖기 전에는 끝내야 한다. 그래야 내가 행복해지고 내 가족이 행복해진다.


토마토를 잘라보고 난 이후 나는 한나가 죽은 이유를 나름대로 해석해 보았다. 그 아이는 전생에 나와 원수를 져서 원수를 갚으러 온 것도 아니고, 결정장애가 있어 9개월 동안 나갈까 말까 머뭇거리다 막판에 간 것도 아니며, 태아 우울증이 있어 탯줄로 자살한 것도 아니었다. 내가 내린 결론은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그냥 그렇게 됐으니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과나무를 한 번 보라. 수확이 끝날 때까지 건강하게 매달려 있다가 수확되는 사과도 있고, 이런저런 이유들로 수확 전에 떨어지는 사과도 있다. 심지어 수확을 며칠 앞두고 태풍이 불어서 떨어지는 아쉬운 사과도 있다. 농부들은 정성 들여 키운 사과들이 떨어져 수확을 못한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자기 잘못이 아니다. 사과는 내년에 또 열리니 그때 많은 수확을 기원하며 거름을 주는 수밖에 없다.


농사꾼의 딸인 내가 왜 그걸 여태 모르고 살았을까.


한나를 잃은 후부터 사람을 보는 눈도 좀 바뀌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아기로 보였다. 방금 태어난 아기, 10년을 산 아기, 50년을 산 아기, 80년을 산 아기. 아기를 보면 저것이 죽지도 않고 잘 태어났구나 싶었고, 청소년을 보면 아직 안 죽고 살아있어 축복받았구나 싶었고, 팔순 할머니를 봐도 죽지 않고 잘 태어난 아기가 80년을 무탈하게 살았으니 부모가 지하에서 얼마나 기뻐할까 싶었다. 살아있는 인간 모두는 운 좋은 존재였다.




내년에 또 열리는 사과처럼 둘째 미나가 태어났다. 미나는 한나와 비슷하게 예정일 며칠 전에 태어났고 키와 몸무게도 한나와 거의 똑같았으며 생긴 것도 손톱 발톱만 빼면 한나를 빼다 박았다. 당시 고통의 바다를 말한 조산사가 한나의 먹구름이 다 걷히고 난 후에 임신을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고 얘기했지만 성질이 급한 데다 노산이었던지라 나는 첫 출산 후 정확하게 6개월 후 임신을 시도하여 그로부터 10개월 후 미나가 태어났다. 6개월 동안 힘든 시간을 보낸 마음이 고스란히 아이한테 전달되었는지 미나는 태어났을 때 많이 불안한 아이였다. 다행히 커가면서 점점 좋아지고 있는 중이다.




후내년에도 또 열리는 사과처럼 셋째 테오가 태어났다. 테오는 27개월에 양수가 갑자기 확 줄어들어 뱃속에서 사산되었다. 그때 내 나이 마흔이 넘었으니 고위험 임신이었고, 테오는 다운 신드롬을 가진 아이였다. 아마 태어났다면 그 아이는 명랑하고 천진한 아이가 아니었을까 싶게 임신기간 동안 입덧도 없고 무던하게 잘 자라던 아이였다. 한 번 가본 길이어서 그랬을까. 나는 한나 때와는 다르게 테오가 죽어서 태어났을 때는 어느 정도 평정심을 유지한 채 쿨하게 테오를 보내줄 수 있었다.


독일에서는 아기가 사산이 되더라도 일정한 무게 이상이 되면 살았던 사람 취급을 한다. 그래서 절차를 밟아 장례를 치러야 하고 구청에서 출생 사망신고도 해야 한다. 테오는 임신 27개월에 사산되었고 무게가 700그램정도 되었으므로 출생 사망신고를 하지 않았고 장례식만 치렀다. 다른 아기들과 함께 합동으로 장례를 치렀던 탓에 비용이 거의 들지 않았다. 그런데 한나는 뱃속에서 이미 다 큰 아기였으므로 절차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한나의 장례식 얘기를 하자면, 좀 길다.


우리는 퇴원 후 한나의 장례식을 준비했다. 장례업체에서 준 카탈로그를 보며 한나의 관을 샀다. 카탈로그에는 예쁘고 아기자기한 관들이 너무 많아 우리는 선택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중 350유로(약 45만 원선) 정도 하는 흰색 관을 구입했었다. 남들은 이 돈으로 유모차를 구입하는데 나는 관을 구입하게 되는구나 싶어 많이 슬펐다. 지금 생각하면 어차피 썩어 없어질 것 뭐하러 그렇게 비싼 걸 샀나 싶기도 하다. 게다가 장례를 치르고 난 후에 장례업체에서 날아온 청구서를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우리가 선택한 옵션 하나하나 비용이 안 드는 것이 없었다. 노래 틀어주는 비용, 장례식 꽃장식 비용 등 아기 하나 장례 치르는 비용이 신생아 용품을 구입하는 비용만큼 들었다. 장례업체가 많이 남는 장사를 하는구나 싶었다.


구청에 출생신고를 하러 가서도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우리는 구청에서 한나에게 남편의 성과 나의 성 둘 다 물려주고 싶어서 출생 사망신고서 성명란에 Hanna Pausch Lee라고 적었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되어 다음날 구청 직원한테 전화를 한 통 받았었다. 독일에서 미성년자는 부모의 성을 둘 다 가질 수 없으니 Hanna Pausch로 하든지 Hanna Lee로 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거였다. 아니, 이미 죽은 아이인데 성이 두 개든 하나든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이렇게 전화까지 하나 싶어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법은 법이니까. 우리는 다시 구청으로 가서 아기의 이름을 수정했다.


우리는 함부르크에 살다가 프랑크푸르트로 이사했는데 한나의 묘지는 아직도 함부르크에 있다. 함부르크에는 유럽에서 제일 큰 올스 도르프 공원묘지가 있는데 거기 어린이 묘지터에 한나가 묻혀있다. 우리가 25년 동안 세를 낸 땅이다. 함부르크에 살 때 우리는 일요일이면 꽃나무를 사고 모종삽을 들고 공원묘지로 갔다. 땅뙤기라고는 없었던 우리는 이 손바닥만 한 묘지를 정원삼아 꽃도 심고, 잡초도 뽑고, 예쁜 인형들도 올려다 놓았다. 우리 옆 묘지에 로즈메리가 심어져 있어서 우리는 한나를 방문할 때마다 로즈메리를 조금씩 훔쳐와서 스테이크에 뿌려 먹었다. 나는 묘지도 세를 내는 기름진 땅인데 팽팽 놀리느니 방울토마토라도 심어서 따먹으면 어떨까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알아보니 그쪽 땅은 큰 나무들이 많아 그늘이 많이 져 방울토마토 농사에 적합하지 않았고, 이웃으로부터 묘지에 방울토마토 농사를 짓는다고 욕을 얻어먹을까 봐 포기했다.


공원묘지 한 켠에 있는 어린이 묘지



함부르크에 위치한 올스 도르프 공원묘지 정문


한나의 묘지. 묘비는 시아버지께서 돌에 글씨 새기는 기계를 사서 직접 도안을 만들고 새겼다. 돌 윗면을 편편하게 가느라 며칠 고생하신 걸로 안다.



우리 옆 묘지에 심어진 로즈마리를 훔쳐 먹었다고 얘기했는데 사실은 훔쳐먹은 건 아니고, 묘지 주인의 엄마인 브리기테가 따먹으라고 허락했었다. 묘지의 주인은 브리기테의 첫 아들 마쿠스이다. 마쿠스는 멀쩡히 태어나 알수없는 이유로 이틀후에 죽었다. 나는 브리기테를 산후 체조교실에서 만났다. 그 산후 체조교실로 얘기하자면 브리기테나 나처럼 아이를 사산하거나 태어난 직후에 아기를 잃은 엄마들의 모임이었다. 우리는 1주일에 한번씩 모여 체조와 요가를 하고 명상도 하였다. 그리고 코스가 끝나고 나면 모여앉아 우리의 경험을 털어놓고 서로를 부여잡고 엉엉 울었다. 그 체조교실에는 나, 브리기테, 엘리자베스, 니콜 이렇게 네 명이 참여하였다. 니콜을 제외한 우리 셋은 모두 첫 아기를 잃은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나와 같은 경우였고 니콜은 임신 28개월에 둘째 딸 레오니를 낳았으나 레오니는 태어나서 인큐베이터에서 힘겹게 3주를 살다 죽었다고 했다.


코스가 끝나고도 우리는 니콜 집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얘기를 나누며 놀았다. 니콜은 3주동안 살다 죽은 레오니의 사진을 집안 곳곳에 붙여놓았다. 온 몸에 호스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빨갛고 아주 작은 아기의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아플 일인데 왜 그 사진들을 집안에 붙여놨는지는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니콜을 제외한 우리 셋은 모두 두번째 임신에 성공하여 나이가 얼추 비슷한 아기 셋을 낳았고, 그후 엘리자베스와 브리기테는 건강한 셋째도 낳았다. 내가 테오를 잃었을때 그들은 진심으로 슬퍼해주었다. 우리는 모두 동병상련의 아픔을 가진 처지라 그런지 아직도 페이스 북으로 근황을 전하고 있다.


벌써 13년 전 일인데 그 일을 떠올리며 글을 써보니 아련함이 남아있다. 당시에는 해일 같은 분노와 슬픔이 몰려와서 주체가 안되었는데 이제 내 마음이 이렇게 고요해졌다니. 결국 슬픔을 가진 자는 인내하는 수밖에 없다. 한나를 잃은 상처에 딱지가 앉았고 새살이 돋아나긴 했지만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눈물이 나는 걸 보면 그 상처가 사라지지 않고 내 속 어딘가 깊숙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고요한 내 마음속에 그때의 그 기억이 올라오면 나는 그 슬픔을 그저 바라본다. 왔다가 사라지는 파도처럼 슬픔은 내 마음속에 왔다가 떠난다. 이 방법은 슬픔을 떠나보내는 방법 중 제일 유용한 방법이다. 슬픔을 만났을 때 딴청 피우지도 말고 부인하지도 말고 그저 바라보는 것.


지금은 인생이 고통의 바다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거기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누군가가 알려주긴 했지만 그것이 쉬울 리 없다. 그래서 아직도 나는 고통의 바닷속에서 허우적대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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