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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이 Jul 09. 2020

게으른 자의 유니크한 한국여행

 아래는 어떤 사람 A와 나의 가상의 대화다. 우리는 상암동의 한 찜질방에 앉아 여행에 대해서 대화중이다.


어떤 사람 A : 남편분이랑 서울에 으니 서울의 심장 남산타워는 보셨겠군요.


 : 남산엘 가긴 갔죠.


남산 멋지죠?


사실 남산 기슭에까지 갔는데 올라가기가 싫어서 동국대학교 학생식당서 가락국수만 한 그릇 먹고 돌아왔습니다.


이런... 좋은 구경거릴 놓치셨네요. 거기서 케이블카를 타셔야 하는건데...


아유, 그까짓 거 타면 뭘해요. 금방 내려올 거.


그럼 인사동과 광화문, 남대문은 보셨겠죠?


가고는 싶은데 사람이 워낙 많아서 말이죠. 안 갔습니다. 더운데 고생이죠...


그럼 숙소는 어디세요? 보통 인사동 근처에 숙소를 많이들 잡지 않나요?


저희는 구파발 근처 한적한 민박집에서 지내요. 저녁에 고기를 구워 먹어야 해서요. 시울 시내 한복판에서 연기 피우기는 좀 그렇죠.


그럼 서울에 오셔서 도대체 어딜 관광하셨나요?


관광이랄 게 있나요. 그저 시간 나는 대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거죠. 저흰 그저께 숙소가 있는 구파발에서 연신내까지 걸어 내려와 연신내 시장에서 슬리퍼를 한 켤레 샀습니다. 여기 욕실은 젖은 욕실이라 슬리퍼를 신고 들어가야 하니까요. 제가 무좀이 있어서 말이죠. 그러고 나서 땔감을 좀 구할까 싶어 불광동을 지나 북한산에 올라갔는데요, 자연보호 간판이 군데군데 있어서 나뭇가지를 채집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러고 나니 하루가 다 지났더라고요.


거긴 제가 30년 동안 서울 살면서도 한 번도 못 가본 곳인데... 관광 오셔서 그런델 다 다니시고. 그리고 또 무얼 하셨나요?


어제는 남편이 갑자기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해서 말이죠. 연필이랑 스케치 북을 사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거 사느라 오전 내내 여기저기 돌아다녔습니다. 슈테들러인가...  메이커 연필로 그려야 한대요. 한나절 연필찾아 다니다가 결국 찾긴 찾았지요. 그림 보여드릴까요?




어우, 잘 그리셨네요. 남편분이 화가이신가 봐요.


아니요. 그림이라곤 지난 10년간 그린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갑자기 그림을 그린다길래 저도 좀 놀랐습니다.


그럴 수 있죠. 여행하다보면 사람에게 잠재되 예술성이 나오기도 한다고 들었어요. 근데 그림속 풍경이 구파발 민박집에서 가까운 곳인가 봐요?


아니요. 나무가 한국에서 자라는 나무가 아니에요. 올리브 나무거든요.


아, 올리브 나무. 그러면 저곳이 상상 속에 존재하는?


그건 아니고요, 이탈리아 가르다 호수 주변이래요. 꿈속에서 저 풍경을 봤는데 그리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나 봐요.


특이하시다, 정말.


그림을 그릴 사람이 아닌데 뭣 때문에 필을 받았는지 저도 도통 모르겠어요. 원래는 그날 국철 타고 놀러 가기로 했거든요. 남편이 세 시간 그림 그리는 동안 저는 빨래를 하고 청소를 했습니다. 저녁땐 모깃불을 피워서 모기들을 내쫓았고요.


여행까지 오셔서 하루를 그렇게 보내시다니... 좀 아깝네요.


아깝긴요. 빨래를 하고 나니 여독이 풀리는 것이 기분도 좋아지던데요. 남편도 그림을 그리고 나니 뭔가 해소된 기분이라고 좋아했습니다. 통변이 잘되는 사람이라 해소할 것이 그다지 없을 텐데도 말이죠.


그래서 국철 타고 놀러 가긴 갔습니까?


예, 국철을 타고 파주에 갔지요.


파주엘요? 거기 볼 것이 있나요?


가는 길에 아파트들이 많은게 볼만합디다. 아마 세계에서 아파트가 제일 많은 구간이 아닐까 싶어요.  파주에 내려서 돼지머리 누른 걸 한 접시 먹고 돌아왔습니다. 참 즐거웠습니다.


파주엘 가신 특별한 이유라도?


특별한 이유는 없고요, 이름이 특이해서 한 번 가봤습니다. 북한 바로 밑에 있는 도시인데 어떤 사람들이 아직도 살고 있나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도 남대문, 광화문, 인사동 삼성동 코엑스는 가보셔야죠. 서울까지 오셨는데...


언젠가 기회가 있겠죠. 버스라도 타구 휘 돌아봤으면 좋겠는데... 지하철만 타고 다니니 지상에 올라갈 일이 없어 여행자 된 입장에선 아쉽네요. 버스는 노선을 모르니 타기도 어렵고요. 


오늘 이후의 관광 스케줄은 어떻게 되시나요?


청량리 역에서 속초 가는 기차를 탈 예정입니다만.


아, 속초! 역시 동해안이 아름답죠. 한국에 왔으면 설악산은 꼭 보고 가셔야죠.


속초까진 안 가고요, 석포에 들렀다가 올 생각입니다.


석포라고요? 거긴 또 어디죠? 생전 처음 들어보는 도시인데요.


유명한 덴 아니에요. 제가 25 전에 속초에 가려고 통일호 열차인가를 탄 적이 있었는데요, 열차 안에서 졸다가 석포를 속초로 잘못 듣고 혼비백산해서 내린 적이 있었거든요. 구 석포역 사진 한 번 보시겠습니까?




어머, 석포라는 곳이 있긴 있었군요. 안내하시는 분 발음이 안 좋았나 봐요. 하하.


그러게 말이에요. 그렇게 작은 마을에도 통일호 열차가 서더라고요. 내린 후에야 석포를 속초로 잘못 들었구나 싶었지만 이미 기차는 떠난 후였죠. 어쩐지 속초 치고 내리는 사람이 없다 싶었지요.


석포에선 뭐하셨는데요?


마을을 돌아다니다가 다음 열차를 타고 속초엘 갔습니다. 근데 이상하게도 속초에서 뭘 했는지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데 잘못 내린 석포에선 뭘 했는지 세세하게 기억나는 거 있죠?


뭐가 그렇게 기억나세요?


기차가 떠나고 2시간 정도 석포를 돌아다닌 기억이 나는데요, 마을 가장자리에서 빈집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 집의 깊은 부엌이며 연탄아궁이까지 아직 세세하게 생각나는군요. 저는 그 집 부엌에 서서 제가 지명수배자가 됐고, 나를 숨겨줄 사람이 하나도 없이 떠돌다 이 빈집에 숨어들었다고 상상하면서 혼자 놀았거든요. 잘 살펴보니 집을 조금만 수리하면 살 수 있겠다 싶은 아늑한 빈집이었습니다. 장판도 쓸만했고요. 빈집이란 게 참 쓸쓸해요. 무슨 연유로 누가 그 집에서 살다 떠났는지 참 궁금해지더라고요.  집이 아직 있는지 한 번 가보려구요. 이러니 기억에서 지워질 유명 관광지에 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요.


얘길 들어보니 석포에 가시는 것이 이해가 되네요. 석포에 가신 이후엔 독일로 돌아가시나요?


아뇨, 남편은 전라도 한식을 먹으로 전주로 갈 예정이고요, 저는 충청도 옥천으로 갈 생각입니다.


옥천요? 혹시 거기도 졸다가 혼비백산하여 내리신 곳인가요?


아니요. 옥천은 사실 저도 처음 가봅니다. 거기 친구나 친인척도 없습니다.


그런데 거길 왜?


제가 어렸을 때 우리 집에서 시장통 쪽으로 주욱 올라가면 오른쪽에 옥천 식육식당이라고 있었거든요. 거길 제가 고기 끊으러 자주 다녔더랬습니다.


그런데 그게 왜요?


거기 주인 아줌마가 옥천 사람이라서 어쩐지 제 눈엔 경주 사람과는 다르게 생긴 것 같았어요. 어렸을 때 옥천은 어떤 곳일까 궁금했고요. 그땐 시골서 타지 사람 만나는 것이 쉽지 않았거든요. 이번에 가서 옥천 사람이 진짜 경주 사람과 다르게 생겼는지 한번 확인해보려고요.


그게 옥천에 가는 이유가 됩니까?


되고 말고요.


제 말은 가봤자 그렇고 그런 특색 없는 소읍일 텐데 오랜만에 한국엘 와서 그런데 가야 할 특별한 이유가 되냔 말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사실 갈 데가 없죠. 사진으로 보면 더 편하게 구경할 수 있으니까요. 구글에 찾아보면 세상 모든 곳의 온갖 사진이 다 나오거든요. 다른 사람한텐 말도 안 되는 이유가 될지언정 저한테는 가야 할 이유가 되기도 하죠. 저는 꼭 옥천 엘 가서 사람도 구경하고 어떤 고깃집엘 들어가서든 고기를 구워 먹고 오고 싶습니다.


뭐, 말릴 사람 없으니 그렇게 하십시오. 그런데 남편분이 안보이시네요?


예, 열이 많은 사람이라 아마 냉탕에 들어가 앉아 있을거예요. 그 사람은 한 번 들어갔다 하면 웬만해선 움직이질 않아요.  몸이 무거워서요.


그나저나 멀리서 오셔서 너무 대충 둘러보고 가시는 것 같아 제가 좀 아쉽네요.


그래도 어쩔 수 없죠. 저도 이젠 늙었나봐요. 다니는게 성가셔요. 예전엔 저도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하나라도 더 보겠다고 바리바리 다녔습니다만. 심지어 대영박물관을 두 번이나 갔습니다. 제가 박물관, 미술관, 성당 이런거 움직이지 않는 오래된 것들 별로 안좋아하거든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저를 무식하다 하시겠지만 솔직히 대영박물관에서 본게 기억이 안나요. 코 없는 조각상들이랑 돌기둥들만 무수히 있었던 것 같고요...


저도 사실은 박물관 별로 안좋아합니다. 여행책자에 나와있으니 찾아가 보는거죠.


그래서 요샌 여행갈때 여행책자를 안들고 갑니다. 그거 들고가면 안본 데가 너무 많아서 죄책감이 들거든요. 지도나 한 장 들고가서 빈둥거리다가 그냥 와요.


그러면 남편분이 실망하지않으세요?


아유, 그 사람은 저보다 더 심해요. 예전에 모로코에 갔을때, 제가 계획을 촘촘히 세워놓고 짐까지 다 싸서 호텔방에서 체크아웃하려고 기다리고있는데요, 남편이 오랫동안 안보입디다. 창밖을 봤더니 호텔앞 빵집에서 크로아상에 커피를 홀짝거리며 현지인들 틈에 앉아 있는거예요. 샤워도 말끔히 하고요. 저는 빨리 나가려고 샤워도 못하고 아침도 못먹고 짐싸고있는데... 제가 창밖으로 냅다 소릴 빽 질렀죠. 화가나서요. 빵집에 앉아있는 남자들이 다 저를 쳐다봅니다.


남자들이요?


예, 거긴 빵집, 식당, 술집, 버스안 이런 덴 대개 남자들만 있어요. 대도시는 다르지만 시골엔 특히나.


그럼 여자들은 어디있나요?


집에 있죠, 아니면 시장에 있거나. 머릿수건쓰고.


아, 그렇군요. 그래서 남편이 호텔로 곧장  돌아오던가요?


밍기적거리며 옵디다. 그러는 통에 와자잣 가는 버스를 놓칠 뻔했어요. 그땐 늘 그랬어요. 제가 계획을 세우고 남편을 뚜드려 잡아 여행을 다녔죠. 이 사람은 바위같은 사람이라 도무지 움직일 줄을 모르거든요. 같이 20년을 살다보니 저도 그렇게 변해서 요즘은 여행가면 합이 좀 맞아요.


여행까지 오셔서 이런 찜질방에 오래 앉아계신 거 보면 좀 상상이 되네요.


저흰 아침먹고나면 10시에요. 어슬렁거리다 보면 점심때고요. 어떨땐 숙소 발코니나 마당에 앉아서 사람구경해요. 고양이 밥주려고 길고양이를 한 시간이상 기다린 적도 있고요. 서너 시간 아무 것도 안하고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 구경하는 것이 가능해지더라구요. 나이드니.


늙으면 그런가봐요. 저도 그럴때가 있거든요. 미동도 안하고 창밖을 오랫동안 쳐다보는 능력이 생겨요.


하하 맞아요, 고양이처럼요.


아이고 저기 남편오시네요. 그럼 옥천가셨다가 독일로 돌아가시는건가요?


아마도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2주가 긴 시간이 아니네요.


그러면 즐거운 여행 되십시요.


긴 시간 말동무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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