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혀가 참으로 둔감하다. 코카와 펩시를 구분하지 못한다. 예전에 시판된 한국의 콜라독립 815 콜라를 마셔보고도 이게 코카콜라와 다를 게 뭐가 있나 싶게 구분하지 못했다. 바텐더를 한 적이 있으면서 잭 다니엘과 짐빔 위스키를 구분하지 못했다. 다 그게 그거같다. 나같이 혀가 둔감한 사람들은 그저 저렴한 것으로 먹거나 마시면 된다. 어차피 먹어도 맛도 모르는 거...
프랑크푸르트로 이사온 이후로 나는 프랑크푸르트가 원산지인 빈딩 맥주를 마신다. 독일의 맥주도 한국의 소주처럼 지방마다 고유의 맥주가 있는데 아무래도 원산지 상표의 맥주를 사면 유통료가 싸게 먹혀서 그런지 약간 저렴하다. 그 이유로 함부르크가 원산지인 홀스틴, 아스트라 맥주는 함부르크에서 가장 저렴한 맥주이지만 이곳 프랑크푸르트에 오면 약간 비싼 맥주축에 속한다. 그래서 나는 함부르크에서는 아스트라 맥주를 즐겨 마셨지만 프랑크푸르트에서는 빈딩을 마신다. 그저 저렴한 것 위주로. 내게는 독일의 어마무시하게 많은 맥주 브랜드의 맛을 구분할 능력이 없으니. 내게 있어서 맥주는 그냥 다 같은 맥주이므로.
방만구 씨 한테는 다른 얘기다. 그는 함부르크에 있든 프랑크푸르트에 있든 절대 아스트라, 빈딩 같은 로컬 맥주를 마시지 않는다. 그 맥주들이 입맛에 맞지 않는단다. 빈딩 맥주에서는 약간의 나무토막 맛이 나고, 아스트라 맥주는 약간 쓰고 건조하단다. 그래서 그는 벡스 아니면 벨틴만 마신다. 나는 백 번을 마셔봐도 빈딩에서 나무토막 맛이 나는지 못느끼겠드마. 하여튼 유별난 입맛이다.
나같이 혀가 둔한 사람이 맛집으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이유는 다 혀가 민감한 남편 방만구 씨 덕분이다.
그는 덩치는 곰같은 사람이 너무나도 민감하고 세밀하여 몇 시간이고 책상에 붙어 앉아 털도 몇 개 안달린 붓으로 손톱만한 좀비 피규어를 그린다.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좀비의 몸뚱아리를 그리는 것은 그렇다 쳐도 그 뭉퉁한 솥뚜껑같은 손으로 좀비의 눈알과 발톱까지 그린다는 건 조금... 어쨌거나 그는 그 어려운 걸 해내는 사람이다. 그 세밀하고 민감함이 혀까지 전달이 됐는지 맛의 차이도 아주 세밀하고 민감하게 찾아낸다. 그래서 먹는덴 돈을 아끼지 않는다. 그자는 자신의 혓바닥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토요일이 되면 나를 끌고 시장으로 다니며 뭔가를 산다. 한 번은 아프리카 슈퍼마켓에서 샀다며 뿌리 구황작물 비슷한 것을 가지고 와서 요리하는 것을 보며 먹을 것이 널렸는데 저런 것까지 먹을 필요가 있나 싶어 의아했던 적도 있다.
프랑스 미슐랭 식당엘 간 얘기를 해야겠지만, 그건 결론이고 그 전에 구구절절히 설명해야할 것들이 좀 있다.
사실 미슐랭 식당을 가려고 프랑스를 간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뭐 대단한 식도락가도 아니고... 가을방학도 되었고, 비행기 여행은 사실상 갈 수는 있겠지만 코로나 때문에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니고, 프랑스는 10월초 거의 전지역이 여행경고지역이 되었고. 알자스 지방이 속한 Grand Est 지역만이 코로나 그린 지역이었다. 게다가 우리한텐 여행사 Tui의 굿샤인이 있었다. 코로나때문에 지난 부활절 방학때 여행이 취소되면서 환불대신 우리한테 보내진 굿샤인. 그걸로 이번 여행의 숙박비를 결제했고 미슐랭 식당은 놀러간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한 번 가봤다.
얘기가 좀 길어지더라도 내가 간 알자스 지방을 소개하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다. 워낙에 사연이 있는 곳이라. 프랑스의 알자스 지방은 독일과 프랑스 분쟁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예전에 썼던 알자스 지방에 대한 기사를 차용하자면:
독일과 프랑스의 대표적인 분쟁지역이었던 알자스 지방은 독일 프랑스 30년 전쟁 이후 신성로마제국(독일)이 패하고난 후인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프랑스에 속하게 된다. 조약 이전 800년까지는 독일땅이었던 곳이다. 그 이후 프로이센(독일)이 성장하게 되면서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전쟁(1871년)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하게 되면서 200년동안 프랑스 영토였던 알자스 지방은 다시금 독일에 속하게 된다. 1차세계대전(1918년)에서 독일이 패하게 되면서 알자스 지방은 다시 프랑스에 속하게 되고, 2차대전 당시(1940-1944)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알자스 지방이 독일이 점령하게 된다. 2차대전에서 독일이 패하면서 짧은 점령기는 끝나고 지금까지 알자스 지방은 다시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
이런 분쟁의 역사를 가진만큼 알자스 지방은 프랑스 속의 독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스트라스부르크, 아이겐탈, 쿠베르크, 자알부르크 등의 이름만 들으면 독일지방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도시 이름이 이 지역에 대부분이고, 뿐만 아니라 길 이름조차도 독일어로된 곳이 많다. 산책을 하면서 집 문패를 읽다보면 독일성씨를 지닌 가족들도 꽤 된다. 이곳의 집들을 보자면 꼭 독일지방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사람들의 모습도 프랑스 사람이라기 보다 꼭 독일사람같다. 게다가 이곳 사람들은 독일어를 꽤 잘한다. 특히 나이 드신 분들일수록 독일어가 유창하다. 프랑스인 하면 외국어 무식자들 아니었던가. 쉬운 영어회화조차 불가능하여 프랑스어를 못하는 여행자라면 프랑스 여행에 애로사항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이곳 알자스 지방은 독일어가 통하니 얼마나 여행하기가 좋으냔 말이다.
게다가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콜마까지 이어진 와인가도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여름이면 와인을 마시고 아름다운 와인가도에 위치한 도시들을 보려는 관광객들로 알자스 지방은 북적인다.
그러나 우리가 누구인가. 관광지는 좀처럼 가질 않는 사람이다.
와인가도에서 동쪽으로 약간 비껴난 곳에 끝도 없이 이어진 큰 숲이 있는데 우리가 즐겨가는 곳은 바로 이 숲이다. 여기서 한 1주일정도 지내면서 장작을 패기도 하고, 숲으로 산책을 나가기도 하고, 그릴을 하기도 하고, 슈퍼마켓에 장보러 가기도 한다. 특별한 여행계획 따위는 필요없다. 이 드넓은 숲속에 찾아 왔는데 또 무슨 계획을 세운단 말인가. 게다가 이 코로나 시국에 콕 박혀지내기는 이만한 곳이 없다.
방만구가 장작을 패는 중. 나무가 많은 지역이라 장작은 무료.
미나가 마시멜로를 굽는 중.
압력밥솥에선 물이 끓고 벽난로에선 감자가 익어가는 중.
시냇가엔 시냇물이 흘러가는 중.
그릴에선 쏘세지와 고기들이 익어가는중.
미나가 아빠의 머리를 맛사지해주는 중. 방만구는 두통으로 고생하는 중. 두통으로 고생하는 와중에도 고기를 먹겠다고 그릴연기를 마시는 중.
우리는 일주일 어치 식량을 차에 가득 실어 알자스지방숲의 한 가운데 있는 오두막에 도착하였다. 이 마을의 이름은 Schäferhof. 동네이름이 독일어이다. 번역하자면 양치기 집. 마을에는 교회 하나와 빵집 하나가 있고 스무 채나 될성 싶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으며, 우리의 오두막은 마을에서 약간 비껴나와 숲속에 있었다. 우리의 계획이라면 그냥 여기서 삼시세끼 만들어 먹으며 지내는 것. 날마다 숲길을 산책하는 것, 그리고 딱 하루 식당엘 가는 것. 그 식당에서 코스요리를 먹는 것.
딱 요정도.
이 미슐랭 추천 식당은 정말이지 아주 작은 시골에 위치한 식당이다.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면 소재지 정도 되는곳에. 마을에 교회와 빵집과 학교와 쏘세지집을 제외하면 상점도 거의 없는 시골에 왠 미슐랭 식당이 있나 싶어 의아했던 곳이다. 미슐랭 추천 식당들은 주로 파리를 비롯한 대도시에 분포되어있고 스트라스부르크처럼 큰도시에서 조차도 너댓 곳밖에 없다. 더더군다나 이런 시골에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아는데... 여행가이드북을 들고 다니지 않는 우리가 이 식당을 발견한 것은 아주 우연의 일치였다.
작년에 이 알자스 지역에서 1주일동안 머물며 슈퍼마켓엘 가다가(시골마을이라 동네마다 슈퍼가 없다.그래서 자동차를 몰고 30분정도를 달려야 슈퍼마켓이나온다) 로터리를 돌던 중 오른쪽에 St. Quirin이라는 지명을 보게되었다. 동네 이름이 좀 있어보이는 것이, 성 쿠이린께서 나신 곳인가 싶기도 하고 해서 그 곳을 가보기로 했다. 딱히 계획도 없다보니 발길 닫는대로. 아래는 St. Quirin 교회전경.
이 시골마을의 삼거리를 지나 초등학교 앞에 괜찮은 식당 하나가 있는데 식당이 이름하여 Restaurant du Prieure. 요기가 미슐랭 추천식당이고 상 쿠이린 식당을 쳐보면 1등으로 나오는 곳이다. 물론 음식도 저렴하고 맛있었다.
방만구 씨는 작년에 우연히 들른 시골마을에서 이 식당을 발견하곤 모래속에서 진주를 발견한 듯 기뻐했다. 올해는 이 식당에 오려고 작정으로 하고 신발과 옷까지 점잖은 것으로 챙겨왔을 정도. 나참...
나로 말하자면 음식에 있어서 절대 모험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한 번 먹어보고 맛있었던 요리를 다음에 또 시켜먹는다. 조류는 거의 먹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이번에도 생각할 것도 없이 돼지고기요리. 저녁에 왔는데 우리가 식당에 머무는 동안 15석 정도 되는 식당에는 우리 포함 3석이 찼다. 평일이라서그런가... 작년에는 우리 포함 2석의 손님이 있었고. 그런 이유로 대박 잘되는 식당이라고 할 순 없을것 같고.
시골식당이라 그런지 코스요리가 아주 저렴했다. 전채요리, 메인요리, 후식 포함하여 33유로. 물론 60유로 이상되는 메뉴도 있고 1000유로 씩이나 하는 와인도 있었지만, 33유로짜리 코스요리와 하우스 와인이 비교적 많이 팔리는 것 같았다. 내가 먹었던 요리는 아래와 같이. 음식에 그림을 그려놔 먹기가 황송스러울 지경의 요리.
전채요리로 크림수프가 나왔음. 훌륭한 맛.
두번째 전채요리로 베트남식 스프링 롤 같은 요리가. 밖은 바삭, 안에 들어있는 치즈는 부드러웠음.
부드러운 돼지고기 두 조각.
슈펫츨러라는 독일식 국수. 이 국수는 이 지방에서도 슈펫츨러라고 불리며 즐겨 먹고 있었음.
마지막으로 배터지기 직전에 나온 아이스크림과 절인 자두.
대부분 음식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맛 평가에 인색하고 좋은 음식을 먹고 나서도 같이 먹은 사람 김빠지게 이런다.
먹을 만은 했는데, 그래도 김치찌게에 밥 말아먹는 것 보담은 못하더라.
이 사람들의 진심이다. 이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요리는 김치찌게이기 때문이다. 나도 그렇다. 다 먹고나서 소감을 묻는 방만구 씨의 질문에 대답이라고 한 것이,
돼지고기가 부드럽고 좋았어. 그 정도 성찬인데 33유로면 가격도 저렴하고. 웨이트리스도 친절하고 식당도 깔끔하고.
우선 인사치레로 이 정도의 평가를 해준다. 그런 다음 진심이 나온다.
근데 마포에 가면 원조 돼지껍데기 집이 있거든. 거기 돼지껍데기가 그렇게 쫄깃하고 목살은 부드러워. 나한테 33유로가 있으면 마포 원조 돼지껍데기 집에가서 돼지껍데기 먹겠어. 미슐랭이 다 뭐야. 접시에 그림이나 그려놓구, 먹기 거북스럽게.
우리는 지난 금요일 늦게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왔다.
프랑스를 떠나며 국경지방에서 방만구 씨는 뭔가 잔뜩 샀다. 같은 바게뜨라도 독일 것보다 프랑스 것이 훨씬 맛있다며 빵집에서 바게뜨 두 개를 사고, 치즈도 독일 치즈보단 프랑스 치즈가 맛있다며 체다, 콤테, 레어담머 등 독일에서도 구할 수 있는 치즈를 프랑스에서 잔뜩 샀다. 게다가 알자스 지방에서 생산된 화이트 와인과 레드와인도 여러 병 샀다. 워낙에 침이 마르게 옆에서 얘기를 해대서 그런가, 왠지 프랑스에서 만든 바게뜨가, 체다치즈가, 파스티테(발라먹는 거위간)가 독일 것보다 더 맛있는 것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