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이후부터 지금까지 나는 식당에서 식사를 한 적도, 여행을 한 적도 없다. 록다운때문에 독일의 거의 모든 공공기관과 가게들이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수영을 못해도, 도서를 못빌려도, 근사한 식당에서 밥을 못먹는 것 까지도 다 좋다. 그런데 여행을 못한다는 것은 우리 가족들에게 치명적이다. 우리는 여름 겨울을 가리지 않고 여행을 다니기 때문이다. 겨울에 여행? 날씨춥고 비오고 눈오는 겨울에? 그렇다. 겨울에도 우리는 여행을 멈추지 않는다.
알고보면 겨울에 말도 안되게 싼 값으로 세일을 하는 호텔들이 얼마나 많은데 겨울여행을 포기하는가. 그래서 우리는 10월부터 3월까지 한 달에 한 번 2박3일 일지라도, 별로 볼 것이 없는 동네일 지언정, 비가 추적추적 내려 비맞은 생쥐꼴로 돌아다닐 지언정, 길을 떠난다. 겨울철 여행의 구실은 저렴한 호텔 기획상품이다.
독일 서남쪽인 Pfalz 지방의 유스호스텔은 겨울에 워낙 손님이 없다보니 11월중순에서 3워중순까지 어마어마하게 저렴한 기획상품을 내놓는다.
독일의 조식 불포함 호텔방의 가격은 1박에 59,50유로부터 시작한다. 부킹닷컴에 찾아보면 알겠지만 60유로 이하의 호텔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프랑스에서는 꽤있다. 이비스 호텔그룹은 유럽에서도 가장 저렴한 숙박비를 자랑한다.) 희안하게도 시골일수록 호텔 숙박비는 도시보다 더 비싸서 어떤 곳은 심지어 1박에 100유로 이하는 찾아볼 수 없는 곳도 있다. 그런데 인도나 미얀마도 아니고 독일에 진짜로 가족전체가 39,50유로에 2박3일 숙박을 하고 조식까지 먹을 수 있는 호텔이 있다고?
그렇다. Dahn이라는 곳에 있다. 이곳은 바위로 유명한 곳이라 그 이름도 Dahner Felsenland(단의 바위랜드)라고 불린다. 우리는 제작년 크리스마스 무렵에 이곳에 다녀왔다.
우리가족 3인이 2박3일 잠을 자고 첫째날 석식을 포함 2회의 조식까지 실컷 먹고 단돈 39,50유로를 내고 왔다. 우리 가족이 3인이 아닌 5인이었더라도 단돈 39,50유로에 2박3일, 조식은 식구 수대로 다 먹을 수 있다. 39,50유로는 가족이 몇 인이건 상관없이 한 가족에 대한 2박3일 숙박비이다. 너무 저렴해서 왠지 떠날때 바닥을 싹싹 쓸고 화장실을 반짝반짝하게 닦아놓고 가야할 것 같은 죄책감이 든다.
Dahn은 작은 도시이긴 하지만 크리스마스 시장이 아름답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는 주말이면 불을 밝힌 야외 여기저기서 작은 공연들을 볼 수 있고 시청앞 광장에선 쏘시지와 글루와인을 마실 수 있다. Dahn 곳곳에 바위들이 우뚝우뚝 솟아있어 다른 행성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여행올 매력이 충분히 있는 곳이다.
나는 이 기획상품을 보면서 생각했다. 분명히 밑지는 장사일텐데 왜 유스호스텔에서는 이런 상품을 제공하는 걸까? 겨울동안 놀리느니 싸게라도 방을 돌리는 것이 나은 걸까? 아니면 정부에서 겨울철 급증하는 우울증 환자들을 위해 이 지역 유스호스텔에 지원금을 주고서라도 겨울철 가족여행을 장려하려는 걸까. 혹시 어떤 부자가 죽기전에 자기 전재산을 유스호스텔 협회에 기부한 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가격이 나올 리가...
그건 그렇고, 내가 친구들에게 유스호스텔에서 놀다 왔다고 말하면 친구들은 되묻는다. 어머, 너희는 유스호스텔에서 어떻게 자니? 뭐니뭐니해도 잠자리는 편해야 되는데 이 나이에 그런 데서 잠이 오니?
그렇다. 잠이 잘 온다. 나와 방만구 씨는 돌위에서도 잘 잔다. 우리는 둘다 젊었을 때 배낭여행을 다니며 매트도 없이 나무 판때기에 요때기 한장 깔아서 침대라고 빌려주는 곳에서도 잘 잤다. 대합실에서도 잘 잤고. 무릇 잠자리라 함은 벼룩이 문제지 침대는 문제가 아니다. 몸뚱이가 젊어서부터 저렴한 곳에 잘 단련되었다보니 아무데서나 자도 가뿐히 일어난다. 방만구 씨는 먹는 건 좋은 걸 먹어야 하지만 자는 건 아무데서나 자도 문제가 없는 사람이다. 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가 4성급 호텔을 찾는 사람이었다면 우리 형편에 1달 1회 여행은 애저녁에 포기해야했을 것이다.
Neumünster.
그렇지. 15년 전에 우리가 거길 갔었지. 당신은 Neumünster라고 들어본 적이 있는가? 없겠지. 무작위로 선정된 100인의 독일사람들한테 물어 봐도 아마 5명 정도가 그 위치를 짚을 수 있을까 말까한 곳인데 한국에 사는 당신이 거길 알리가 없지. 거기를 아는 사람에게 우리 Neumünster 다녀왔어! 하면 백이면 백, 거기 뭐 볼게 있다고 갔냐는 대답이 돌아오는 곳. 바다도 없고, 산도 없고, 유적지도 없고, 구시가지도 없고, 특산품도 없는 곳.
그때 우리가 Neumünster 떠났던 여행의 구실은 무엇이었던가? 집구석만 아니면 어디든 좋다 라는 구실이었다. 그때 우리는 소형차이긴 했지만 중고 자동차도 막 산 참이었고, 초보운전이라 아주 멀리가기는 무서웠고, 가깝지만 시내교통이 복잡하지 않은 그 어떤 곳. 찾아보다보니 Neumünster였던 것이다. Neumünster에 가보면 의외로 볼거리가 많아 깜짝 놀란다. 칼슈타트도 있고, H&M도 있고, 코메르츠 방크도 있고. 볼게 널렸더만... 사실 볼것이 없는 동네가 세상에 어디있는가? 길떠나 낯선 곳이면 어디든 볼것이 무진장 넘치지. 정 볼 것이 없으면 사람을 구경하면 되고. 사람도 안다니면 들판이나 하늘을 구경하면 되고. 그곳의 들판과 하늘은 내가 사는 곳의 그것과 다르게 생겼을테니.
이 외에도 우리는 맥주로 유명한 체코의 Pilsen, 독일의 Bitburg 그리고 생수로 유명한 독일의 Gerolstein에도 갔었다. 이 맥주 브랜드와 생수 브랜드는 유명하긴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브랜드만 알 뿐 그 도시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사람들이 왜 알지 못하는 지는 그 도시를 방문해보면 안다. 정말이지 명성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없는 그저그런 동네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런 미미한 곳엘 간다. 희안하게도 가보면 별 거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 다녀오면 그 도시의 골목 어딘가는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 내가 Gerolsteiner 생수를 마실때면 Gerolstein에서 먹었던 비오던 날 오후의 서브웨이 샌드위치가 생각나고, Bitburger를 마실때면 Bitburg 시내의 사거리인가 삼거리에서 야외 수영장을 가리키던 팻말이 생각난다.
이런 것이 여행의 묘미가 아닌가 싶다. 별것 아닌 여행도 머릿속에 그 흔적을 남기니 말이다. 그리고 그 흔적이라는 것은 당시에는 좋았던 나빴던 상관없이 시간이 지나면 좋은 기억으로 미화된다. 그래서 여행을 많이 하면 할수록 미화된 기억이 늘어난다. 이런 좋은 기억을 함께 공유한 사람들은 헤어지기가 어렵다. 내가 방만구 씨와 때때로 서로 죽일듯 싸워도 다시 아무 일 없었던 듯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젊은 시절이 공유한 미화된 기억들이 많기 때문이다.
코로나로 인하여 두 달 동안 인간다운 삶을 살지못한 이즘, 독일 정부에서 당초 1월31일까지로 발표했던 록다운을 2월14일까지로 연장하겠다고 알렸다. 물론 록다운이 2월14일날 끝난다는 말은 아니다. 꽤많은 사람들이 어쩌면 록다운이 4월까지 갈지도 모른다고 예측하고 있다. 이 우울한 시즌에 친구를 만나지도, 식당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지도, 여행을 떠나지도 못하는 우리는 뭘해야할까...
나와 방만구 씨는 저녁상을 물린 후 중국 슈퍼마켓에서 산 국순당 쌀막걸리 한 잔씩을 앞에 두고 얘기를 하고있다.
"그러니까 그때가 아마 1994년쯤 되었을거야. 내가 여행을 다니다가 돈이 똑 떨어져서 당장 오늘 숙박비도 없는거야. 집에서 우체국으로 돈을 부치긴 했는데 그게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걸려서 당장 잘데도 없고 먹을 것도 없었던 거지. 그때 내가 중국 광저우 시내 어딘가에 좌판을 펼쳐놓고 옷가지며, 책이며, 홍콩에서 산 돌부처를 팔고 있었지. 종일토록 사는 사람은 커녕 구경하는 사람도 없어서 나는 영문판 걸리버 여행기를 읽고 있었고. 그때 광저우 대학교 교수가 천사처럼 나타나서 내가 홍콩에서 구입한 돌부처를 좋은 값에 사주는거야. 그러면서 노숙하지말고 호텔에서 자라고 그러더라."
"걸리버 여행기를 읽고 있어서 물건을 판거야, 영문판. 사람이 배운 티가 나니까. 안그랬다면 그 교수가 돌부처 따위를 그 값에 사줬겠어? 그건 그렇고 왜 여행다니면서 돈을 그렇게 빠듯하게 들고 다니니? 돈이 없으면 집으로 돌아가든가. 남의 나라 길거리에서 동냥질도 아니구..."
"그러는 너는? 여행 막판에 한국으로 돌아가기가 싫어서 돈 아낀다고 히치하이크 하지 않았니? 너는 꼭 그렇게 위험하게 다니더라. 중국 양슈오에서 저수지에서 빠져죽을 뻔도 했잖아. 수영도 못하는 애가 저수지에 들어가긴 왜 들어가?"
"초등학생들이 놀길래 물이 얕은줄 알았지. 그리고 내가 수영을 아예 못하는 건 아니야. 수영장에서 10미터 정도는 허우적거리는 거 알잖아. 그때 그 초등학생들이 건져주지 않았으면 난 죽었지. 죽을 고비를 겪고 나니까 입맛이 없어지고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지 배도 하나도 안고프더라구. 약국에서 준 노란약 먹고 이틀동안 아무것도 안먹고 누워만 있었어."
"그 4인용 호스텔에서? 남녀공용이었다며? 스페인 남자하고 일본 남자하고 같은 방을 썼다며? 아픈 애가 그런데서 잠이 오디?"
"잠이 잘 오지. 벼룩도 없는데. 하루에 3천원짜리 도미토리였지. 거기보다 더 저렴한 데는 양슈오에 없어."
"양슈오도 우리가 갔을때랑 비교하면 지금은 너무 많이 변해서 다시 가면 하나도 못알아 볼거야."
"당시엔 가짜 플래닛 헐리우드도 있었는데."
"그렇지. 거기서 먹은 피자에선 참기름 냄새가 났었지. 아마 오븐이 없어서 후라이판에 구웠을 지도 몰라. 요샌 양슈오가 핫한 관광지로 떠서 발 디딜틈이 없대. 여행 다큐멘터리에 나오더라."
"그러게 말이야. 이젠 세상 어디에도 관광객 없는 곳이 없어. 관광객 없는 곳엘 가려면 그냥 보통 동네로 여행가는 수 밖에 없어. 하나도 안유명한 데 있잖아. 바다도 없고 산도 없고 유적지도 없고 그냥 보통 사람들이 사는 데."
"Gerolstein 같은 곳?"
"ㅎㅎㅎ 맞아. 그런 곳. 어머 정말 기발하다. 어떻게 Gerolstein을 생각해냈어? 나 그거에 대해서 블로그에 글 써야겠어."
"Gerolstein 같은 보통 사람이 사는 심심한 곳에 여행가세요 그러면 그게 재미있니? 누가 거길 가겠니?"
"왜 가는 사람이 없어? 우리도 갔는데. 그것도 두 번이나."
우울한 시절엔 이렇게 좋았던 시절 이야기 하면서 놀면 된다. 그러기 위해선 좋았던 시절에 좋은 기억을 많이 만들어야한다. 좋았던 기억이 많은 인생은 길고, 좋았던 기억이 없는 인생은 너무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