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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이 Dec 21. 2020

내가 이베이에 중독된 계기

괜히 샀나 후회하는 중

코로나 겨울방학이 시작되던 날, 미나네 반에서는 체육수업이 있었다. 미나는 체육복과 운동화가 든 가방을 가지고 체육수업에 참가했다가 가방을 잃어버렸다. 그렇더라도 정신을 차리고 방과후에 분실물 센터에 가서 물어봤으면 좋았을 것을, 방학이 시작됐다는 흥분에 젖어 수업이 끝나자마자 미친듯 학교를 달려나오는 바람에 분실물을 찾지 못했다. 미나는 집에 와서야 체육가방을 잃어버린 것을 알고 내게 얘기해줬다.


사실 물건을 잃어버려도 아까울 건 없다. 나를 제외한 우리집 2인은 의복이나 신발을 워낙에 험하게 입고 신어서 걸레 쪼가리가 돼서야 물건들을 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미나의 바지 무릎팍이 워낙 빨리 닳는 바람에 미나에게 이렇게 물어본 적 조차 있었다.


"미나야, 너 학교에서 기어다니지?"


그렇지만 올해 초에 사준 아디다스 운동화는 좀 아까웠다. 일주일에 두어 시간, 그것도 체육관에서만 신어서 신발상태가 아직 좋았기 때문이다. 애 발도 일 년이면 쑥쑥 자라서 해마다 한 문수가 큰 걸 사줘야하고 일주일에 두어 번 체육관에서만 신는데 뭐할라고 새걸 사준담. 나는 중고를 둘러보려고 이베이에 들어가보았다.


운동화 체육관에서만 신어서 상태양호, 10유로.


배송비까지 해서 14유로면 미나가 잃어버린 운동화와 비슷한 상태가 괜찮은 것을 살 수 있겠다 싶었다. 아래로 주욱 훑어 내려가다가 판매자가 4달 전에 올린 아디다스 운동화 하나에 눈이 갔다.


새것과 다름없음, 5유로.


더한 설명이 없었다. 딱 한줄만 저렇게 씌어져 있었다. 물건이 좋은데 왜 여적지 안팔렸담? 설명이 부족했나? 보통 이베이에는 판매자가 물건에 대한 설명을 주저리 주저리 많이 써서 올리는 편이다. 사진이 많고 설명이 세세해야 잘 팔리는 법이므로. 그 예로,


실용적인 어린이 운동화 팔아요, 거의 신지 않아서 새것이나 다름없는데 우리 딸이 너무 빨리 자라는 통에 신발을 충분히 신지를 못했네요. 밑창이 고무로 되어있어 운동시 미끄러지지않아 안전해요. 메이커는 아디다스인데 시중에서 40유로에 팔리는 제품입니다. 배송료는 사는 분이 4,50유로 부담하셔야하고요, 가지러 오는 것은 환영, 가격깍기는 사절.


이 정도.


그런데 저 판매자는 독일어가 능통하지않은 외국인이거나 주저리 주저리 쓰는 걸 귀찮아하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 사진을 봤더니 정말 깨끗했다. 이 정도로 좋은 상태면 타이틀에 새것같음 이라고 썼으면 클릭수가 더 올라갔을텐데... 돈을 벌려면 품을 들여야지 원... 하여튼, 올린지 넉달이 지나도록 안팔렸으니 약소하게 1유로만 깍자. 나는 배송비 포함 8유로에 운동화를 사겠다는 문자를 보냈다. 1시간 후에 흔쾌히 팔겠다는 문자가 왔다. 페이팔로 8유로를 지불하고 운동화를 샀다. 그러니까 운동화 값은  4유로. 거의 거저.


며칠 뒤 운동화가 도착했다.


짜잔!

상자를 열어보니 이베이에서 사진으로 본 운동화가 들어있었는데, 설명해놓은 것처럼 새것과 다름없는 것이 아니라 완전 새것이었다.



 누군가가 신은 흔적이 전혀 없었다. 몇 번의 검색으로 40유로짜리를 4유로에 샀다는 흥분에 좋아서 환호하며 이방 저방 뛰어다녔다. 미나와 방만구 씨에게도 운동화를 보여주었다. 예상대로 그들은 나의 기쁨에 공감해주지 않았다. 심드렁했다. 내가 40유로짜리를 4유로에 사는 합리적 소비덕에 36유로를 벌었는데! 그렇지, 이 집구석에서 돈 아끼는 건 나밖에 없지!


바로 이 날이었다. 내가 이베이에 빠져든 것은.


나는 이 날 사람들이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 혹은 복권을 사거나 금광을 파는 데 온 정렬을 쏟아붓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의외로 찾아온 한 번의 달디단 경험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단 맛을 본 사람들은 또다시 단 맛을 보기위해 같은 장소를 기웃거린다. 계속해서 쓴맛을 보더라도 언젠가 지난번처럼 단맛을 보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나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4유로짜리 아디다스 새 운동화를 금덩이보듯 열어보며 흡족해했다. 그리고 심드렁한 미나에게 열 번도 더 주입시켰다.


맞지, 엄마가 잘 산거 맞지?

40유로짜리를 4유로에 사는 행운은 좀처럼 안오거든. 너도 엄마 본보고 합리적인 소비를 좀 하란말이야. 돈쓰는 기계처럼 돈만 써재낄 생각만 하지말고.


얘기가 옆으로 샌다만 돈쓰는 기계라고 하니 씁쓸한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미나가 한 번은 독일어 시험에서 즈이 반에서 단독으로 '수'를 받은 날이 있었다. 내 생각엔 소발에 쥐잡은 격인데... 어쨌든 공부가 신통찮던 것이 갑자기 '수'를 받아왔길래 깜짝놀라 용돈이라도 줘야할 것 같았다. 20유로를 줄 양으로 지갑을 열었는데 50유로짜리 지폐 한 장만 들어있어 애한테 50유로를 줬다. 돈이 좀 크다만 알아서 알뜰히 쓰겠지 했다. 다음날 애가 친구랑 근처 쇼핑센터를 간다고 하더니 뭔가 잔뜩 사온 것이었다. 초딩 6학년 짜리가 50유로를 홀라당 다 까먹고 들어온 것이었다. 니 요랑대로 쓰라고 준 거라 잔소리는 못했다만 저것은 알뜰한 즈이 엄마 반만이라도 좀 닮았으면 50유로를 저렇게 홀라당 까먹진 않았을텐데... 아쉬웠다. 결국 닮은 건 우리 둘 중에 돈쓰는 기계인 즈이 아빠를 닮은 게다.


어쨌든.

운동화를 살인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구입한 이후 나는 곰곰히 생각했다. 미나의 운동화 외에 우리 가정경제에 필요한 물건이 뭘까 하고. 다시 한 번 합리적인 소비를 할 찬스가 있어야 할텐데... 곰곰히 생각하다가 내년 4월 부활절 방학에 미나와 둘이서 이집트 홍해로 갈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냈다. 방만구 씨는 코로나 때문에 내년 4월에도 비행기 여행이 불가능 할거라며 찬물을 끼얹었지만 내 생각으로는 4월이면 코로나가 잦아들어 해외여행이 가능할 것 같았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도 아무데도 못가고 있는데 설마 록다운이 4월까지 이어질까... 여행가는 건 상상만으로도 즐거워 나는 홍해 연안의 호텔과 당일치기로 갈만한 구경거리들을 검색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 참에 수영복을 하나 살까? 약간 스포티한 것으로.


이베이 앱을 아예 핸드폰에 깔았다. 거기에 올라온 물건을 열심히 보던 중 검정색 아레나 수영복이 눈에 들어왔다. 라벨은 뜯었지만 새것인데 단돈 10유로. 판매자 정보를 보니 평판도 좋았다. 호텔도 문닫고 수영장도 문닫고 휴가도 못가는 코로나 시즌에 집에 실내수영장이 있지 않고서야 누가 수영복을 구입한단 말인가. 하지만 돈버는 사람은 이런 기회를 이용하지. 음하하하! 바로 나!


 나는 판매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배송료 포함 10유로면 구입하겠습니다.'


판매자는 곧바로 그렇게 하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수영복도 며칠 후 도착했다. 서술한 것과 마찬가지로 입거나 세척한 흔적이 없는 완전 새 상품이었다. 이 수영복을 구입하므로써 나는 또 30유로를 번 거나 다름없다. 판매자에게 좋은 점수를 보내주었다. 그 이후로도 미나의 수영복을 비롯하여 당장은 필요없지만 1년내로 필요할 것 같은 새것과 다름없는 헌것을 몇  더 구입하고 흡족해했다.


요즘 나는 가족 구성원들에게 뭐 필요한 거 없냐고 물어보고 다닌다. 방만구 씨가 마운틴 바이크를 살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내가 경험한 두 번의  성공적인 이베이 구입기를 들려주며 대리구매를 해주마고 했다. 그래서 현재 나는 상태가 좋은 중고 마운틴 바이크를 찾아보는 중이다. 구경하면서 나도 한 대 사면 좋겠다 싶어 내 것도 보고 있고, 엄마 아빠가 마운틴 바이크가 있으니 미나도 한 대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미나 것도 보는 중이다. 자전거는 상당히 고가라서 아무리 중고라도 한꺼번에 3대나 사고나면 가정경제가 휘청거릴 것 같은데...


똑딱똑딱...

흠...


그런데 시계소리만 들리고 있는 이 야밤에 핸드폰으로 타자를 치면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게 과연 합리적인 소비이긴 한지 약간의 의심이 든다. 곰곰히 세상 돌아가는 거 보니 진짜 이집트갈 일이 요원한 일인 것 같기도 하고. 수영복은 있는데 괜히 샀나 싶기도 하고. 미나 수영복은 애가 한 달에도 워낙 쑥쑥 크고 있는데 언젠가 입을 날이 오면 작아서 못입게될 지 걱정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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