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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이 Dec 24. 2020

올해는 좀 일찍 크리스마스 기분을 내고 싶었습니다

코로나 때문이지요

우리에겐 클라우디아라는 숙모가 있다. 라이너 삼촌과 인생 말년에 이혼을 하셨는데 당시에 암에 걸려 몸이 성치 않으셨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겠지만 이유야 어찌됐건 암환자를 잘 돌봐주지 못하고 이혼을 했다는 이유로 가족들은 라이너 삼촌을 욕했다. 이 클라우디아 숙모는 가족과 지인들을 각별히 관리해서 해마다 성탄절이 되면 카드를 동봉한 선물을 보내주셨다. 단 이혼 후에는 성탄절에 선물없이 카드만 보내셨고 올해도 일찌감치 12월19일 즈음에 카드가 도착했다.


할일을 미루는 꼴을 보지 못하는 나는 도대체 방만구 씨가 언제쯤 클라우디아 숙모께 성탄카드를 부칠지 계속 눈여겨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젠 보내도 성탄절 전엔 도착못해' 하고 포기했던 날 새벽. 그러니까 12월23일 새벽이었다. 방만구 씨는 새벽 출근길에 부스럭거리며 한참 동안 서랍을 뒤적거렸다. 그 바람에 나는 잠에서 깨어 뭘 찾냐고 물어보았다.


"여기 남아도는 크리스마스 카드랑 봉투가 있을텐데 죄다 생일축하 카드밖에 없네?"


"갑자기 이 새벽에 카드는 왜?"


"클라우디아한테 카드보내야지."


"뭘 뒤적거리고 있어. 사서 보내."


"이 시간에 카드를 어디서 사."


"그럼 미리 좀 보내든가. 오늘 보내면 내년에 도착할걸? 요새 편지가 폭주해서 어떨 땐 1주일씩 걸리거든."


나는 방만구 씨에게 이렇게 겁을 줘서 일단 마음을 좀 상하게 만들어놓았다. 그렇게 말하는 내 마음은 이미 상할대로 상했다. 원래는 이꼴저꼴 안보고 내가 싸그리 해버려야 속이 시원하지만 숙모가 조카한테 답장을 받고 싶지 매번 조카 며느리한테 답장을 받고 싶겠냔 말이다. 그래서 이번엔 보내든지 말든지 가만히 있었더니 이 사단이 난 것이다.


방만구 씨는 서랍을 뒤적거리다 봉투를 찾지 못해 냥 그 카드만 들고 나갔다. 잘못했다. 나가기 전에 내가 카드 상태를 좀 확인했어야 하는 건데... 오랫동안 서랍속에 있어서 서랍장 냄새가 날 수도 있고 헌것 티도 좀 날텐데... 제발 방만구 씨가 그 카드를 길쭉한 일반 편지봉투에 넣어서 보내지 말길 바랄 뿐이다.




독일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는 보통 11월 말부터 시중에 팔린다. 이왕 사는 거 좀 일찍 사서 집안에 두면 좋을텐데 방만구 씨는 매해 트리구입을 미루다가 좀 늦게 사는 편이다. 제작년에 심지어 12월22일날 구입한 적이 있었다. 12월22일날 구입해서 거실에 세워두고, 12월23일 날이 밝자마자 시댁이 있는 함부르크로 떠나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돌아왔으니 그 나무는 딱 하루 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차라리 사지를 말지. 나무가 비싼데... 방만구, 이 돈쓰는 기계같으니라고!


이렇게 발등에 불떨어져야 꿈쩍거리는 방만구 씨가 올해는 왠일로 나무 크리스마스 트리 사는 일을 서둘렀다. 11월 중순부터 1등으로 가서 나무를 살 거라고 별렀다. 그러더니 진짜로 내가 등떠밀지도 않았는데 11월말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파는 시장이 문을 열자마자 달려가서 실한 나무를 한 그루 사왔더랬다. 내가 작은 걸로 사오라고 신신당부를 해서 이번엔 좀 작은 나무를 사와 트리장식은 금방 끝났다.



아참, 트리 이전에 불밝히는 얘기가 또 있다. 독일사람들은 크리스마스 무렵이 되면 트리장식 뿐만 아니라 창문과 발코니를 불로 밝히는데 그것도 시작하는 때가 있고 끝내는 때가 있다. 11월 말일 정도가 돼야 Erster Advent(올해는 11월28일)라고 해서 불을 밝히기 시작한다. 그런데 올해는 불 밝히는 일이 시급하다고 방만구 씨가 하도 발을 동동 굴러서 11월 중순부터 발코니에 불을 밝혔다.(꼬마전구들로 발코니 난간을 칭칭 감음) 방만구 씨의 닥달때문에 불을 밝히긴 했지만 동네를 다 둘러봐도 우리집 말고 발코니에 불을 밝힌 집이 한 군데도 없었다. 너무 뜬금없이 일찍 밝혔나...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우리집 보고 뭐랄까... 저 집은 어지간히도 크리스마스를 기다린다고 하겠지.


이리하여 우리집에는 이미 11월 중순부터 크리스마스 트리, 발코니에 불장식, 거실에 파티조명이 울긋불긋 빛나고 있다.



방만구 씨가 올 겨울엔 이렇게 일찍부터 불을 밝히고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을 하려고 했던 이유는 다 코로나 때문이다. 11월들어 식당, 도서관, 술집, 헬스클럽, 영화관, 등이 문을 닫고 몇인 이상 모임을 금지하는 날이 길어지자 살아갈 낙도 없고, 그나마 집이라도 울긋불긋 불이 켜져있고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면 좀 기운을 얻는 모양이다. 그래서 우리는 날만 어두워지면 여기저기 불을 켠다. 그러고 보니 우리 뿐만 아니라 올해는 유독 화려하게 불을 밝힌 집들이 많은 것 같다.


사람들은 이 우울한 시국에 이렇게라도 크리스마스 기분을 내고 싶은 모양이다.


나야 코로나 우울증 같은 건 절대 안타고.
크리스마스 장식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고. 저런 것들이 내 기분을 좌우하진 않지.
게다가 크리스마스 트리가 다 뭐니.
나이 오십에.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을 했다. 불을 밝히고 돈들여서 나무를 사고 이런 것들이 다 헛짓거리 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살아보니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길을 가다가 우리집 발코니에 눈처럼 하얀 불이 켜져있으면 기분이 좋다. (심지어 퇴근시에 전화해서 불밝히라고 일러둠) 저녁식사 후 크리스마스 트리를 밝혀 놓고 영화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다. 영화를 보면서 자주 크리스마스 트리에 눈길을 준다. 삶의 즐거움은 이런 사소한 것에서 오는구나 싶었다. 명절마다 가족이 둘러앉아 명절음식 해먹고, 연락못한 친지 친구들에게 카도도 보내고, 부활절엔 계란 사다가 예쁜 그림도 그리고. 이런 사소한 행복들이 모이면 인생이 풍요로워지는구나 싶었다.


올해는 코로나때문에 시댁에 못가고 모임도 못가지고 집에서 우리 세식구 단출히 크리스마스를 맞기로 했다. 내가 독일에 산지 20년만에 이런 크리스마스는 또 처음이다. 방만구 씨가 거위를 굽자고 하는걸 그렇게 큰걸 누가 먹냐고 해서 오리를 한마리 사왔다. 올해는 난생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오리구이와 감자볼에 도전해보기로 한다.


 제발 먹을만 해야할텐데.




저녁에 퇴근한 방만구 씨한테 카드는 보냈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책방, 문구점, 선물의 집 등이 모조리 문을 닫아 카드살 데가 없단다. 슈퍼마켓에 가면 파는데... 그랬더니 자기네 회사 근처에 슈퍼마켓이 없어서 카드는 결국 못보냈단다. 그리하여 우리 세 식구는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 모여 웃는 얼굴로 사진을 찍고 그걸 클라우디아 숙모께 보냈다. Whats app으로.


안녕하세요 클라우디아, 보내주신 사랑이 가득한 카드는 잘 받았습니다.  숙모님의 건강은 어떠신가요? 항암치료는 잘 끝났는지 모르겠네요. 즐거운 성탄과 새해를 맞이하시길 빌어요!

음...

사진을 보니 방만구 씨가 손에 음료를 들고 있네. 저거 위스키 사워다. 저거 한 잔 마시려고 품을 많이 들인다. 저 잔은 원플러스원 행사할 때 위스키 한 병 사고 얻은 위스키 잔이다. 칵테일 만드는 통에 위스키, 얼음, 레몬 짜서 넣고 쉑쉑쉑한 후 꼭 레몬 한 조각을 저 위스키 잔에 끼워서 저렇게 마신다. 집에서 마시는데도 레몬 한 조각을 꼭 저렇게... ㅋㅋㅋ 시중에 파는 레몬음료 사다가 섞어서 마시면 될텐데 꼭 저렇게 품을 들인다. 저거 마시려고 레몬짜는 그릇, 칵테일 쉑쉑이 통 등을 구입했다.  돈쓰는 기계 같은이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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