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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훈 Feb 07. 2023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용기

최정훈의 문화 톺아보기 1 -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사건

 때는 1955년 12월 1일. 한 여성이 일을 마치고 퇴근길 버스를 탑니다. 오늘도 피곤한 하루였네요. 좌석에 앉아 멍하니 차창을 바라봅니다. 그녀는 알았을까요? 이 날이 자신의 삶과 미국 사회 전체를 뒤흔들 대 사건의 시작이 된 날이라는 것을요. 그녀의 이름은 로자 루이스 맥콜리 파크스(Rosa Louise McCauley Parks). 흑인이었습니다. 


 1. 당시의 모습

 1950년대 미국은 인종차별이 당연시되는 사회였습니다. 당시 로자 파크스가 살던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시의 도시 법령에는 버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습니다.

 

 *36개의 버스 좌석에서 앞의 10석은 백인석, 뒤의 10석은 흑인석(정확히는 Colored), 그리고 가운데 16석은 아무나 앉을 수 있다. 그러나 빈 좌석이 없을 경우 흑인은 백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당연히 양보해야 한다.

 *흑인은 버스 운전 기사가 될 수 없다. 운전기사는 반드시 백인이어야 한다.

 *흑인들이 백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할 경우 앞에서 뒤로 걸어가면 그 사이에 앉은 백인들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으므로 앞문 쪽으로 가 다시 요금을 내고 내린 뒤 뒷문으로 다시 타야 한다.


 다시 봐도 어이없는 법령이죠? 미국은 우리나라와 달리 버스를 내릴 때 요금을 냅니다. 세 번째 법령에 의하면 흑인들은 앞문으로 내릴 때 요금을 내고 뒷문으로 다시 버스를 타야 하므로 요금을 두 번 내야 합니다. 그런데 흑인이 버스를 다시 타기 전에 운전기사가 버스를 출발시켜버려 골탕을 먹이는 경우도 흔했다고 해요. 많은 사람들은 이 법령이 불공평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누구도 함부로 인권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죠. 


 로자 파크스는 버스의 공용 좌석(16석)중 한 곳에 앉아 있었고, 이 좌석에는 로자 파크스를 포함하여 4명의 흑인이 앉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빈 자리가 많았지만, 점점 자리가 차기 시작해 버스는 만석이 되었죠. 그러자 백인 버스기사는 첫 번째 법령에 의거하여 버스를 세우고 4명의 흑인에게 자리를 백인에게 양보할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4명의 흑인 모두 자리 양보를 거부했다고 해요. 그러자 기사는 한번 더 강한 어조로 양보를 요구합니다. 결국 3명의 흑인은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죠. 그러나...


2. 실제로 벌어진 일

 로자 파크스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후 둘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눕니다. 

 

기사 : 당신은 왜 안 일어나요?

 파크스 : 일어나야 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기사 : 자리에서 일어날 거요?

 파크스 : 아니요.

 기사 : 글쎄, 일어나지 않는다면 경찰에 신고해서 잡아가라고 하는 수밖에...

 파크스 : 그럼 그렇게 하시죠.


 파스크는 곧 경찰에 체포됩니다. 그녀는 죄수번호 7053을 부여받고 재판을 받게 됩니다. 

 

 거대한 이야기는 여기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다음 날인 12월 2일, 몽고메리 발전 위원회(Montgomery Improvement Association)가 열렸습니다. 새롭게 뽑힌 이 회의의 주최자는 마틴 루터 킹이었습니다. 그들은 회의 끝에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채택합니다. 

 

 1. 피부색과 관련 없이 모든 승객들은 버스에 타는 순서대로 자리에 앉아야 한다.

 2. 흑인 버스 운전기사를 고용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 요구사항이 관철되기 전까지는 버스를 타지 말자는 공문을 내리게 됩니다. 버스 보이콧 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운동은 성공적이었을까요? 흑인들은 버스를 타지 않고 택시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택시가 더 비싸지 않냐구요? 흑인이 운전하는 택시에서, 당시 버스비였던 10센트만 받기로 합의를 봤다고 합니다. 그리고 카풀을 통해 자가용을 공유하기도 했습니다. 조금 더 큰 차를 가진 사람은 정해진 시간에 일정 구간을 도는 공동 수송차도 있었다고 합니다. 걷기는 물론 자전거, 노새, 마차 등 온갖 탈것들이 보이콧 운동을 위해 동원되었습니다.

 뜻이 있는 백인들은 카풀에 동참하여 흑인 하인들을 직장에 태워주기도 했습니다. 몽고메리 외부의 흑인들도 모금 운동을 벌이고 신발을 몽고메리의 흑인들에게 보내는 등 보이콧 운동에 동참해 주었습니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이렇게 1년이 지나 1956년 12월 20일, 연방지방법원과 대법원은 몽고메리에서 일어난 일련의 인종 차별과 법령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리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한 여자의 자리에 엉덩이 붙이기(!)였습니다.


3. 왜 차이가 생겼는가? 

 이 사건은 심보가 고약한 한 여자가 자리를 양보하기 싫어서 발생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몽고메리에 존재했던 다양한 형태의 인종차별은 '압도'라는 메커니즘이 작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백인들은 '법령'으로 인종차별을 합리화했거든요. 법은 일반 시민들을 쉽게 압도합니다. 법을 어기면 큰일이 난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도록 만들죠. 이 법령에는 당시 백인들의 '기득권을 계속 누리고 싶다'는 강력한 욕망이 담겨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로자 파크스는 이 근본적인 욕망에 저항한 것 같습니다. 로자 파크스는 자서전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내가 그저 몸이 피곤했기 때문에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고 말하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난 신체적으로 힘들지 않았으며, 힘들다 하더라도 그건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여느날보다 더 힘든 것은 아니었다. 나는 어떤 사람들이 종종 나에 대해서 떠올리는 것과 달리, 나이가 든 사람도 아니었다. 나는 마흔 두살이었다. 내가 정말로 피곤함을 느꼈던 것은 바로 참고 굴복해야 하는 일 그 자체였다."

 

 그녀는 저항의 방식을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찾았습니다. 과격하지 않았고, 거창하지도 않았죠. 그저 자리에 앉아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행동에는 생각보다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사람은 한번 압도당하면 위축되기 마련입니다. 그 당시에는 이 '압도'의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고, 더군다나 당시 로자 파크스를 제외한 나머지 흑인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파크스도 분위기에 휩쓸려 자리를 양보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죠. 양보를 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상황을 알고도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용기를 내었습니다. 

 이후 버스 보이콧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도 파크스와 마찬가지였습니다. 화려하고 기발한 방식이 아닌, 각자가 할 수 있는 행동 범위 안에서 운동에 동참했죠. 누구는 걸어가고, 누구는 차를 공유하고, 누구는 싼 값에 택시를 태워 주었습니다. 이들의 소박함이, 1년이나 이 운동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니었나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파크스와 흑인들은 '자기다운 문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 소망하는 바가 있습니다. 저는 이 운동을 조사하며 문득, 제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잘 정돈된 문화가 넘치는 이 세상에서, 저도 남들이 보기에 근사한 형식을 갖춰서 짠! 하고 세상에 제 결과물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여러분은 평소에 무엇을 하며 지내시나요? 아주 단순하고 반복되는 행동들로 채워져 있지 않나요? 저도 그러합니다. 우리, 그로부터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우리가 소망하는 것들이, 꼭 오랜 기간 준비해야만 이룰 수 있는 것일까요? 일상에 작은 것을 비틀어 보죠! 그들이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다녔던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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