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알 깨기
상담실을 찾아오는 중년의 내담자들, 겉보기엔 안정적인 직장과 가정을 꾸린 그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의외로 이런 것입니다. "선생님, 남들은 제가 성공했다고 하는데... 저는 제 인생이 제 것 같지가 않아요. 꼭 남의 옷을 입고 연극하는 기분입니다."
그들은 '착한 아들', '성실한 가장', '유능한 직원'이라는 배역을 흠잡을 데 없이 연기해 왔습니다. 하지만 무대 위의 모습이 완벽해질수록, 그 이면의 '진짜 나'는 서서히 희미해져 갔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저는 심리 검사지 대신 낡은 소설책 한 권을 처방하곤 합니다. 바로 청춘의 바이블이라 불리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입니다.
소설 속 주인공 싱클레어는 어린 시절 두 개의 세계를 경험합니다. 부모님이 계신 따뜻하고 도덕적인 '밝은 세계'와, 하녀나 불량배들이 있는 거칠고 본능적인 '어두운 세계'.
싱클레어는 밝은 세계에 속해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어두운 세계에 끌립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가 정해놓은 규범, 부모의 기대, 타인의 인정이라는 '밝고 안전한 세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는 "이건 내가 아니야", "나도 자유롭고 싶어"라는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나답게 산다는 것'은 이 안전한 밝은 세계를 제 발로 걸어 나오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당연히 두렵고, 부모님께 죄송하고, 남들의 비난이 무섭습니다. 하지만 그 죄책감과 두려움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결코 어른이 될 수 없습니다.
<데미안>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자, 심리 치료의 핵심을 꿰뚫는 문장이 있습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많은 분이 '자아 실현'이나 '성장'을 우아하고 평화로운 과정으로 착각합니다. 하지만 헤세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성장은 '투쟁'이며 '파괴'라고요.
나를 둘러싼 단단한 껍질(고정관념, 습관, 타인의 시선)을 깨부수는 일은 아픕니다. 피가 나고 상처가 생깁니다. 상담실에서 내담자들이 겪는 우울과 혼란은 병이 아니라, 지금 막 알을 깨기 위해 부리로 껍질을 쪼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그러니 지금 인생이 혼란스럽고 어지럽다면 기뻐하십시오. 당신은 지금 막 죽은 듯한 알의 상태에서 벗어나, 살아 숨 쉬는 새가 되려는 중이니까요.
소설 속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성서 속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들려줍니다. 카인의 이마에 있는 표적은 저주의 낙인이 아니라, 남들보다 더 강한 의지와 지성을 가진 자만이 받을 수 있는 '우월한 자의 훈장'이라는 것입니다.
나답게 사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고독합니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기에 '별난 사람',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손가락질을 받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현대판 '카인의 표적'입니다.
하지만 그 고독은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무리 지어 다니는 양떼가 아니라, 홀로 비상하는 독수리라는 뚜렷한 증거입니다.
나답게 산다는 것은 지독한 현기증을 동반합니다. 정해진 정답이 없는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현기증을 피하기 위해 다시 좁은 알 속으로 들어가지 마십시오. 그 껍질 안은 안전할지 몰라도, 더 이상 당신이 숨 쉴 곳은 아닙니다.
당신이 찾아야 할 진정한 자아, 아브락사스(Abraxas)는 밝음과 어둠, 선과 악, 남자와 여자가 통합된 온전한 존재입니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버리고, 내 안의 욕망과 그림자까지도 '나'로 받아들이십시오.
껍질을 깨는 고통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고통 끝에, 비로소 당신만의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오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