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 건네는 다정한 처방전
상담실에서 만나는 중년의 내담자들 중에는 유독 인간관계에 지쳐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버린 분들이 많습니다. "선생님, 이제 사람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아요.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상처받느니, 차라리 상처받지 않을 만큼만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게 훨씬 마음이 편해요."
이분들은 겉보기엔 아주 초연하고 독립적인 어른처럼 보입니다. 타인에게 아쉬운 소리 한 번 하지 않고, 누군가 선을 넘어오려 하면 재빨리 방어막을 치며 거리를 유지하죠. 하지만 그 단단한 껍질 속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곳엔 독립심이 아니라 '다시는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깊은 두려움이 웅크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상담실을 찾는 분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 고립을 선택한 우리들에게, 정신분석학자이자 철학자인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명저《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을 통해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주고받는 좋은 관계란, 운이 좋으면 어느 날 우연히 '빠져드는(falling in love)' 행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관계가 실패하거나 상처를 받으면 "내가 사람을 잘못 봤어", "나와 맞는 사람이 아니었어"라며 상대의 탓으로 돌리곤 하죠.
하지만 프롬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사랑은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지식과 노력이 요구되는 하나의 '기술(Art)'이라고요.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는 법을 배우듯, 타인과 깊이 연결되는 것 역시 끊임없이 훈련하고 배워야 하는 능동적인 참여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관계에서 자꾸 넘어지고 상처받는 이유는 우리가 사랑에 서툴거나 결함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타인과 나의 다름을 껴안고, 갈등을 조율하며, 내 연약한 밑바닥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의 기술'을 제대로 연습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기술이든 이를 배우려면 먼저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실전의 무대로 내려와야 합니다.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능동적으로 관계에 참여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가장 진실된 모습을 드러내는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기술을 완성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재료가 바로, 우리가 그토록 피하고 싶어 하는 '나의 연약함을 기꺼이 내보이는 용기'입니다.
누군가에게 내 약점, 불안, 두려움을 보여주는 일. 거절당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내 연약한 속내를 타인에게 내보이는 용기. 심리학에서는 이를 '취약성'이라고 부릅니다.
관계에서 깊게 상처 입은 사람들은 이 취약성을 극도로 두려워합니다. 누군가에게 내 진짜 마음을 보여주었다가 또 버림받거나 조롱당할까 봐 무서운 것이죠. 그래서 두꺼운 철갑옷을 입고 높고 견고한 성벽을 쌓아 올립니다.
물론 성벽을 높이 쌓으면 외부의 날 선 시선이나 상처는 막아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철갑옷의 가장 치명적인 부작용은 나쁜 감정뿐만 아니라 '좋은 감정'까지도 모조리 차단해 버린다는 데 있습니다. 상처를 받지 않으려다 보니 누군가와 깊이 교감하는 기쁨, 조건 없이 수용받는 따뜻함, 가슴 벅찬 연대감마저 우리 곁을 지나쳐 버립니다. 스스로를 완벽하게 보호했다고 믿었지만, 결국 아무런 온기도 닿지 않는 서늘한 '감정의 무균실'에 갇혀 서서히 외로움에 질식해 가는 슬픈 역설을 마주하게 됩니다.
프롬은 "자신의 삶을 온전히 내어주는 자만이 사랑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고 안전하게만 누군가를 사랑하고 관계를 맺는 방법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깊은 연결에는 필연적으로 오해, 갈등, 그리고 상실의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니까요.
상담실에서 저는 관계의 상처로 마음을 닫아버린 분들에게 이렇게 조언합니다. "다시는 상처받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사실상 다시는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의 빗장을 조금 열어보십시오. 물론 누군가 그 틈으로 들어와 다시 생채기를 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내 상처를 보여주고 타인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그 서툴고 위태로운 과정 속에서만, 우리는 진짜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상처받지 않는 단단한 철옹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받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누군가를 향해 기꺼이 내 마음의 여린 구석을 열어젖히는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당신을 무겁게 누르고 있는 그 철갑옷을 아주 조금만 느슨하게 풀어보는 건 어떨까요? "난 네가 필요해", "네 말이 나를 참 섭섭하게 했어", "나 사실 요새 너무 외롭고 힘들어." 이렇게 당신의 가장 연약하고 진실된 목소리를 낼 때, 역설적이게도 당신은 가장 강인하고 매력적인 사람이 됩니다. 기꺼이 상처받기를 선택하는 당신의 그 훌륭한 '사랑의 기술'을 언제나 지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