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의 '불가능한 용서'와 트라우마의 치유
상담실에서 트라우마를 다루다 보면, 피해자들은 종종 가해자보다 자신을 더 미워하곤 합니다. 주변에서, 심지어 종교나 미디어조차 그들에게 이렇게 속삭이기 때문입니다.
"용서해라. 그래야 네가 편해진다." "미움은 너를 갉아먹을 뿐이니 이제 그만 잊어라."
이 달콤하고도 잔인한 조언 앞에서 내담자들은 무너집니다. "선생님,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이 안 돼요. 제가 속이 좁은 걸까요?"
15년 동안 수많은 상처를 마주하며 제가 내린 결론은 단호합니다. 준비되지 않은 피해자에게 강요된 용서는 또 다른 이름의 '폭력'입니다. 저는 오늘, 섣불리 용서를 강요하는 세상에 맞서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까칠한 목소리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데리다는 그의 저서 <용서>에서 매우 도발적인 명제를 던집니다.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만이 용서될 수 있다."
얼핏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이 문장에는 역설이 숨어 있습니다. 사과를 받고, 납득이 가고, 이해가 되는 일이라면 그것은 굳이 '용서'라는 거창한 단어를 쓸 필요도 없는 '화해'나 '상식적 해결'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의미의 용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인간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불가능한 죄악' 앞에서만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요? 우리는 종종 용서를 일종의 '거래'나 '치유의 수단'으로 격하합니다. "내 마음 편하자고", "상대가 사과했으니까"라는 이유로 서둘러 봉합하려 합니다. 데리다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용서가 아니라 '망각'이거나 '정신 승리'일 뿐입니다.
상처가 아물지도 않았는데 억지로 건네는 용서는, 썩어가는 환부를 소독도 하지 않고 붕대로 덮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일지 몰라도, 속에서는 고름이 터져 결국 더 큰 병이 됩니다.
상담의 목표는 '성인군자 만들기'가 아닙니다. 상담의 목표는 내담자가 과거의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진실이 있습니다. 치유와 용서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많은 분이 "용서해야만 이 고통이 끝난다"고 믿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해자를 평생 미워하더라도, 그 미움이 내 일상을 파괴하지 않도록 관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당신은 가해자를 용서하지 않고도 충분히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습니다.
오히려 "나는 그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당당하게 선언할 때, 피해자는 무력감에서 벗어나 삶의 주도권을 되찾기도 합니다. 그것은 내 상처의 크기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가해자에게 함부로 면죄부를 주지 않겠다는 주체적인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 부디,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분노는 정당합니다. 그 끔찍했던 기억을 억지로 이해하려 애쓰지 마십시오.
데리다의 말처럼, 진정한 용서는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신성한 불가능성'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언젠가 기적처럼 찾아올 수는 있겠지만, 지금 당장 당신이 억지로 쥐어짜 내야 할 의무는 아닙니다.
상담실에서 저는 내담자들에게 이렇게 처방하곤 합니다. "지금은 충분히 미워하세요. 그 미움이 다 타버려 재가 될 때까지. 용서는 그다음, 아주 먼 훗날에 생각해도 늦지 않습니다."
당신에게는 용서하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권리를 행사한다고 해서 당신의 행복이 줄어드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