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폐 이어폰

대화가 필요해

by 골방 김안녕
이어폰은 내가 아는 전자기기 중 가장 적폐인 것 같아.

라며 E는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K의 한쪽 귀에 꼽혀 있던 무선 이어폰을 쑥 빼가며 말했습니다.


"E,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야. 이어폰은 인간 사이의 소통을 가로막는 엄청난 장애물이야. 그러니까 적폐인 거고."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일단 나 전화 들어올 수도 있으니까 다시 줄래?"


라며 K는 E가 갑작스레 뺏어 간 무선 이어폰을 다시 채가려 손을 뻗었습니다만, E는 아직 할 말이 더 남았는지 K에게서 빼앗은 무선 이어폰을 E의 작고 오밀조밀한 치마 주머니-그러니까, 큰 주머니 안쪽에 있는 작은 주머니 말입니다-에 어떻게든 쑤셔 넣고는 말을 이어갔더랍니다.


"난 지금 K 너에게 말하고 싶은 게 있었어. 이를테면 조금 이따 헤어지고 나서 무얼 할건지 같은 것들 말이야."

"그래, 그런 것들이 말하고 싶으면 지금 이어폰에서 아무런 소리가 안 나오기도 하고, E가 하는 말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일부러 한쪽만 끼고 있었는걸."


그러자 E는 왜 본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냐는 듯 두 손을 기도하듯 들어 올리더니 말을 마저 이어 갔습니다.


"아니야,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그러니까, K의 귀에 이어폰이 꽂혀 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대화를 꺼리게 된다는 거야. K와 내가 대화를 함에 있어서 하나의 장애물이라도 걸린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K에게 말을 걸기 전 한 번은 고민을 하게 돼."


K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더랍니다.


"혹시라도 K가 내 말을 잘 못 듣고 되물어 보지는 않을지, 혹시라도 K가 다른 무언가를 듣고 있어서 아예 내 말을 못 듣지는 않을지."


그런 E의 말을 들은 K는, E에게 온전히 주었던 시선을 지하철 안의 다른 사람들에게 돌려보기 시작합니다. 누군가에게는 퇴근길, 누군가에게는 출근길이 되는 저녁 7시의 지하철 안, 각자가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 누구도 이어폰을 끼지 않은 사람은 찾기 힘들었습니다. 분명 같은 공간 안에 있지만, 각자의 어깨 만한 사이즈의 벽을 두고 서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K가 다른 사람들의 귀에 집중하고 있는 것을 느낀 E는 드디어 본인의 의도를 이해했냐는 듯이 어느 정도는 반갑게, 어느 정도는 답답함이 해소된 듯이 쏟아 내듯 말을 이어 나가더랍니다.


"K, 지금도 봐봐, 만약 노약자 분들이 지하철에 타서 자리에 좀 앉아야 할 때, 예전 같았으면 먼저 자리에 앉아 있는 아무개에게 뭐라고 말이라도 한번 먼저 걸었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모두가 이어폰을 끼고 귀를 닫고 있으니, 혹여라도 말을 거는 게 민폐가 되지 않을까 한번 더 고민하고, 고민하다 상대방의 신체를 툭툭 친 후에나 상대방이 이어폰을 벗겨 낸 순간부터나 대화가 시작되지. 이러니 이어폰이 인간 사이의 소통을 가로막는 적폐가 아니고 뭐야?"


그제야 K는 E의 의도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었답니다. K는 알고 있었습니다. E는 매우 현명하고 주관이 강한 여성이라는 것을요. 그리고 K는 E가 굳이 '사람'이라는 발음하기 편한 단어를 두고, '인간'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를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라 함은 사람 인(), 사이 간(間) 자를 써서, 그러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소통이 가능할 때 '인간'이라는 표현을 쓴다는 말을 E를 통해 언젠가는 들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그리고, K는 그런 E의 모습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역은 신설동역, 신설동역입니다. 내리는 문은 왼쪽입니다.

"E, 신설동역이래. 나 이제 내려봐야 하겠네."

"거봐, 이어폰을 안 끼고 있으니 내려야 할 곳도 잘 들리고 좋지?"

"E, 사실 그건, 카카오맵 도착지 알림을 켜두면 이어폰을 꼈을 때도 도착 알림을 받을 수 있어서 더-"

"말대꾸하지 말고."


K는 말을 더 하기를 포기-사실은 강요당했지만요-했더랍니다. 그러고는 지하철이 설설 멈춰 서기 시작하여, 그녀에게 빼앗긴 이어폰을 돌려받기 위해 E에게 손을 뻗으며 말을 걸었습니다.


"E, 나 이제 내려야 하니까 이어폰 다시 돌려주지 않을래?"


그러자 E는 K를 쳐다보고만 있더라니, 무언가가 생각이 난 듯 씨익 웃어 보이더니 K에게 말을 건넵니다.


"K, 이어폰을 벗고 사는 연습을 한번 해봐. 집에 가는 길에 지하철에서 헤매고 계시는 할머니가 도움을 청하면 못 들어서 다시 한번 여쭤보지 말고 바로 대답도 해드리고, 계단 올라가는 길에 사람들 또각또각, 촥 촥하는 신발 소리도 좀 들어보고, 역 밖으로 나가서 걸어가는 길에 가로수 이파리가 바람에 흔들리며 나는 풀소리, 그리고 그 풀 속에 숨어있던 풀벌레들이 휘날리면서 신나서 내는 소리도."

그러며 E는 내민 손에 K의 이어폰 대신 무언가 네모난 것을 하나 쥐어주며 마저 말을 이어 가더랍니다.

"난 이어폰에서 나오는 인위적인 소리들보다 그런 소리들이 더 좋더라."

"그리고 K, 네가 사업 때문에 언제 전화가 올지 몰라 이어폰을 끼고 있는 모습도 멋있지만, 나는 K 네가 이어폰을 끼지 않은 상태로 나와 진중하게 대화를 하는 모습이 더 멋있어."


K는 E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위아래로 흔들어 보였고, 이윽고 지하철 문은 열려 K는 지하철 밖으로 나와 E가 자신의 손에 무얼 쥐어 주었는지 주먹을 펴 보았더랍니다.


그 손에는요, 참 귀엽게도 아까 K와 E가 둘이서 나눠 먹다 남은 새콤달콤 하나가 들려 있었더랍니다.


K는 E가 들려준 새콤달콤 하나를 금세 까서 입 안에 넣고는, 집으로 발걸음을 향하기 시작했더랍니다. 그리고 E의 조언대로 이어폰을 끼지 않은, 그러니까 맑고 온전한 그의 귀로 주변의 소리에 집중해보기 시작했습니다.


헤어지기 아쉬워 개찰구 앞에서 껴안고 있는 연인들의 폴리에스테르 옷들이 맞부닥쳐 나는 부식 부식 소리, 교통 카드 보증금 환급기가 교통 카드를 빨아들이는 찹 소리, 한껏 취한 중년 남성이 계단 옆 철제 손잡이를 잡고 내려와 나는 시이잉 소리, 약간씩 튀어나온 보도블록을 밟을 때 나는 덜그럭 덜그럭 소리, 오피스텔 복도를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울리며 나는 텅 텅 소리.

K는 느꼈더랍니다. 아, 세상에 이렇게 참 다양한 소리가 많았구나.


이윽고 집 현관 앞에 도착하여, 삑 삑 삑 삑 비밀번호를 치고는 달그락 도어록 문을 열며 들어가자 거실에서 게임을 하고 있던 룸메이트 형님인 W가,


"K, 왔냐?"


라며 맞이를 해주었는데, 원래 같으면 귀에서 이어폰을 빼서 케이스에 넣느라 대답이 느렸을 테지만, 그때의 K는 바로 대답을 할 수 있었더랍니다.


"W 형님, 데이트 잘 다녀왔습니다."

"그래, 오늘 데이트는 좀 어땠나?"


그러자 K는 E가 준, 입에 조금 남아 있던 새콤달콤을 마저 녹여 먹으며 이렇게 대답했더랍니다.


예, 오늘 데이트는요 -좀 달았고요, 그리고 좋은 소리를 많이 들어서 그런지 세상이 참 맑아 보이더라고요!
월, 수,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