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의 주말이 되어도 될까

의지 해주어 고맙지만서도

by 골방 김안녕
특히 우울증이 엄습하는 바람에 거리로 뛰쳐나가 사람들의 모자를 보는 족족 날려 보내지 않으려면 대단한 자제심이 필요할 때-이럴 때면 나는 되도록 빨리 바다로 나가야 할 때가 되었구나 하고 생각한다.
['모비딕' 중 발췌]


햇살이 따사롭습니다. H는 그 따사로운 햇빛을 마음껏 즐기며 침대에 누워 책 읽기에 한창입니다. 그런 H의 옆에서 K는 강아지를 만지듯 H의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그녀를 조용히 쳐다봅니다. 지금 이 순간 침대는 그 둘만의 외딴섬이요, 유토피아입니다.


"K, 이거 봐봐. 이 문구 되게 나 같지 않아?"


H는 K에게 보고 있던 책을 넘기며 손가락으로 한 문구를 톡톡 가리킵니다. 그리고 K의 시선은 H가 밑줄 치듯 스르륵 옮기 우는 손가락 끝을 따라갑니다.


"나도 삶이 지치고 힘들 때, K와 K의 공간을 생각하며 버티곤 하거든. 이슈메일에게 바다가 당신이 갈망하는 그곳이듯, 나에게도 여기가 이슈메일의 그곳인 셈이지."


K는 그 말을 듣고는 아무 말 없이 살짝이 싱긋 웃어 보이고는 그녀의 가녀린 쇄골을 쓰다듬습니다. 햇살이 따사롭습니다. K는 그 따사로운 햇빛을 마음껏 즐기며 침대에 누워 책 읽는 H 관찰하기에 한창입니다만, 사랑과 여유만 가득해야 할 그의 마음속에서 -뭔가 큰 것이 턱 막혀 있는 것만 같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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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는 평범한 직장을 다니는 으레 그런 평범한 여성입니다. 아니, 평범하다고 하기만은 어딘가 결핍이 있다고 해야 할까요. H를 잘 모르는 그녀들은 그녀가 그저 웃을 때 살짝 드러나는 토끼 덧니조차 매력으로 만드는 사랑스러운 말괄량이라고 생각 하지만요- 그녀의 결핍은 가정환경에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서울 달동네의 반지하, 이혼 가정, 간이식이 필요한 어머니, 매일 술을 먹으며 간이식은 고려도 하지 않는 삼촌,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하지만 막상 검사를 해보면 멀쩡 한- 나이 마흔이 되도록 일을 하지 않는 두 오빠들. 그녀의 가정환경을 묘사하는 말들입니다. 이런 탓에 다른 아무개들은 대학 생활을 하며 캠퍼스를 즐기고 있어야 할 때, 20대 초반의 세상 물정 모르는 가녀린 소녀는 소녀 가장이라는 시지프스의 형벌과도 같은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답니다.


H는 모든 일에 감사할 줄 알며 받은 행복을 타인에게 돌려줄 줄도 아는 햇살과도 같은 여성입니다. 난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모든 것들이 집안의 분위기와 반대 기조로 살고자 하는 H의 다짐에서 나오는 습관과도 같은 것들 이였답니다. 하지만 하루 일과를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면 반복되는 삶들. 그 무거움에 지쳐 버틸 힘조차 남지 않았던 그때에, 운명 같이 K를 만났답니다. 당신의 무거움을 같이 들어주고, 잠깐 내려놓아도 괜찮음을 알려준 남자. H에게는 K가 -그녀가 표현하기로는 요- 마치 가라앉는 당신을 끌어올려준 인양선과도 같았다고 하더랍니다.


고요한 평화를 깨는 전화 벨소리가 공간을 찢고 울려 퍼집니다. 아, H의 전화에서 나는 소리입니다. 하지만 H는 으레 그렇듯, 누구에게 전화가 왔는지 슬쩍 전화를 들어 보더니, 이내 다시 전화를 뒤집어 침대 위로 던져놓고는 전화 벨소리가 끝나기를 기다립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길고 긴 전화벨은 결국 그 수명을 다하듯 조용해집니다.


"집이야?"

"어, 그렇지 뭐."

"그러고 보니 H가 집에 안 들어 간지도 1주일이 다 되어가네."

"응, 근데 뭐. 나 없어도 잘들 사실 거니까."


H는 잠시 하던 말을 멈추고 K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갑니다.


"K, 나는 이 평화를 최대한 오래도록 지속하고 싶어. 무슨 말인지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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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H가 맘 디딜 곳 놓아준 당사자가 바로 K 인걸요. K는 H와 사랑에 빠지고 나서부터, H가 오롯이 행복하기만을 바라왔습니다. H의 행복은 -그 어떤 걱정 없이 온전한, H의 모습으로만 있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면 자연스레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고요. K는 H를 당신의 공간으로 초대했습니다. 10평 남짓한 작은 골방. 그러나 그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고, 공간 안의 아무개들 만으로도 모든 의식주가 충분히 해결 가능하며, 사랑하는 그대가 항상 나와 같이 머물러 있는 그곳.


K의 생각이 올바로 맞아 떨어졌다는 걸 알아채는 것은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H는 그 이래로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는 일상의 대부분을 K와, K의 공간에서 머물렀습니다. H가 그 공간에서 이루어내는 일들은 그리 대단한 것들은 아니었습니다. 눈 뜨고 싶을 때 눈 뜨기, 끼니 해결을 하고 싶을 때 밥 먹기, K와 깊지 않은 대화들 -그러니, H의 신경을 쓰이게 하지 않을 만한 작은 말들 있지 않습니까?- 조잘대기, 그리고 저녁에 술 한잔과 맛있는 안주를 곁들이며 사랑을 나누기.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일상과도 같은 것들이었겠지만, H에게는 일련의 것들이 마치 불을 처음 본 원시인처럼 놀라움의 연속과도 같은 일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언질 하였듯, H는 한 가정에 작지 않은 책임을 지고 있는 소녀 가장입니다. H가 그 집안에서 사라지게 되면 집안의 모든 것들이 크게 흔들릴 터. 갑작스레 집을 비워 당황한 집안 구성원들은 시도 때도 없이 그녀에게 연락해 집으로 다시 돌아와 소녀 가장의 역할을 톡톡히 해줄 터를 끈질기게 요구해왔던 것입니다. 방금 전 울리 왔던 전화도 그런 내용일 것이 뻔하고요. K는 전화벨이 울려올 때마다 일종의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곤 했습니다. 이를테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그녀에게 시간과 공간을 내어 주었지만, 그게 오히려 독이 되어 사랑하는 사람의 가정을 무너트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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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이제 한번쯤 집에 가서 얼굴 비추고 오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K는 노파심에 H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네 봅니다. 그러나 K의 말을 건네받은 H는 그 의도를 알고 있음에도, 오히려 조막만 하고 찹쌀떡 같은 그 볼때기를 크게 일그러트리며 반항의 뜻을 펼쳐 보이더랍니다.


"H, 그러니까.. 난 여기가 너에게 유토피아가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여전히 H의 볼때기는 풀리지 않습니다.


"여기에서의 삶이 너무 편하면, H의 다른 데가 다 불편해질까 봐."


H는 그제야 K의 뜻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았다는 듯이 살짝 웃어 보입니다.


“그럼 불편해지면 안 돼?”

“H가 세상에서 나 하나 때문에 버티는 건 싫어.”

“왜? 그게 뭐 어때서.”

“네 인생이 나라는 얇고 작은 막대기 하나에 기대는 꼴이 될까 봐.”

“그럼 K가 나한테 기대면 되잖아.”

"그건 다른 문제지.”

“왜?”

“난 H의 삶이 아니니까.”


잠깐, 침묵.


창밖에서 아주 옅은 바람 소리가 스칩니다. 섬이라고 믿고 있는 이 공간에도 파도가 닿습니다.


“그럼 K는 내가 뭘로 보이는데?”


K는 대답 대신 H의 손가락을 천천히 잡아 쥡니다.


“H는, 여기에 쉬러 온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쉬러?”

“응.”
“여기서 숨 좀 고르고, 그리고 다시 H의 바다로 가는 사람.”

“.. K 없이?”

“아니.”

“.. 그럼 같이 가.”


H의 말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거의 부탁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K는 그 말을 듣고도 바로 대답하지 않더랍니다. 대신 한 숨을 고르고 천천히 말합니다.


“나는 내가, 그리고 여기가 H에게 -잠시 머물 수 있는 주말이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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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는 그 말을 듣고 한참 동안 말이 없습니다. 그저 고개를 돌려 들어가기 시작하여 조금씩 옅어지는 창 밖의 햇살을 음미하더니, 이내 아주 조용히 웃습니다.


“그럼, 주말은 영원하면 안 돼?”

“영원하면 그게 다시 현실이 되잖아.”


H는 그 말이 슬프지도, 무섭지도 않은 듯이 말합니다.


“그럼, 현실은 조금 불행해도 돼?”


K는 그 질문에 바로 답하지 못합니다. 파도가 닿기 시작한 이 섬에는 이내 폭풍우가 몰아 붙습니다. K는 대답 대신 햇빛을 받아 윤기가 도는 H의 머릿결를 강아지마냥 다시 쓰다듬습니다. 그리고 속으로만 생각했더랍니다.

나는 너의 유토피아가 아니어야 하는데
너는 나를 너무 유토피아처럼 바라본다.

나는 너의 주말이 되고 싶은데
내가 너의 주말이 되어도 될까.


월, 수,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