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뮤즈
으으, 으으윽.
감각이 무뎌지고, 무뎌지는 와중에도 머리는 터져 나갈 것만 같습니다. K는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K는 작가입니다. 말이 작가지, 본인에게 작가의 재능이 없다고 생각은 깨나 많이 하더랍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한 문장 고이 써 내려가고, 다시 지우기를 반복하는 게 벌써 몇 시간 째인지요! [화씨 451]을 써낸 레이 브래드버리는 [화씨 451] 초고를 UCLA 도서관 지하의 10센트짜리 타자기에서 9일 만에 완성했답니다. 생각이 뜨거울 때 밀어붙여야 한다나요. K는 오늘 영 생각이 차갑기만 한가 봅니다.
K는 차갑지만 식혀야만 하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앉은자리에서 스르륵 일어납니다. 그리고는 밖의 차디찬 공기를 막아 줄, 작업 공간 옆에 널브러져 있는 후리스 하나를 헐렁헐렁 주워 담고는 신발장으로 향하여 285mm나 되는 그의 발을 담지 못하는 다이소에서 산 270mm 슬리퍼 하나를 직직 끌어 어떻게든 발에 담아내고는 마당으로 향합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후리스 주머니에서 노란색 곽에 담겨있는 영감 한 가닥 -그 영감의 이름은 보헴시가 리브레 라고 하더랍니다- 을 쓱 꺼내어, 파하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한숨이 나가고 남은 입의 공간에 영감 한 가닥을 뭅니다. 영감에 열정을 붙입니다. 영감을 들이켭니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파하 한숨을 크게 내쉬니 영감 무더기가 몸 밖으로 회색을 띤 채로 마구 빠져나옵니다.
K는 잠시 일렁일렁 대며 공중으로 사라지는 영감 무더기들을 바라보며 무의식에 잠깁니다. 무의식 속에 의도치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C의 생각에 도달합니다. C는 K가 글을 쓸 때만큼은 그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여성입니다. 그렇기에 C는 밤늦은 이 시간까지도 K가 성공적인 창작을 해내기를 기다리며 연락 한 마디가 먼저 와주기를 기다리고 있겠지요.
스마트폰을 꺼내 전화 기록 가장 위에 있는 C의 연락처를 터치합니다. 잠깐 신호 연결음이 드르르륵 울리는가 하더니, 여지없이 얼마 되지 않아 C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오빠! 이제 글 다 썼어?"
K가 글을 다 쓰기만을 기다리는 명량한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K에게는 마치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패장과 같은 마음이 슬 올라옵니다. 그러니, 어찌 그 마음을 가라앉혀야 하는데 한 까치 더 피우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피우던 담배에 조막만큼 남은 불을 새로운 담배에 옮겨 붙입니다. 그러고 다시 한번 파하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
"아니, 아직 다 못썼네. 오늘날이 아닌가 봐."
라며 이번에는 영감 대신 한탄을 내뱉어봅니다.
"오빠, 또 담배 피우지?"
아차.
"아.. 어, 맞네. 이게 무의식 적으로."
"무의식은 무슨 무의식이야. 그냥 습관인거지."
K는 할 말이 없습니다. C가 제주도를 떠나 올 때, '다음에 볼 때까지 담배 안 피웠으면 좋겠다'라고 했던 말에 -초절정에 빠진 K는 아무런 큰 힘도 들이지 않고, 큰 생각도 하지 않고 '그렇게 하겠다'라고 답변을 해버렸던 것입니다.
"미안해."
"아니, 뭐.. 미안할 건 없고. 오늘부터는 다시 한번 피우지 말아 봐."
잠시 침묵.
"오빠는 오빠한테 담배 쩐내 나는 거 모르지?"
K는 알고 있습니다.
"응, 아무래도 내가 흡연자니까. 담배 피우는 사람들은 자기 냄새를 잘 모르더라고."
"오빠가 나랑 같이 있을 때에는 담배를 피우지는 않지만, 그전까지 담배를 피우면서 몸에 밴 냄새들이 있다고. 그 배여진 냄새들이 얼마나 오래가는지 오빠는 모를 거야."
K는 알고 있습니다.
"응, 잘 몰랐네."
"오빠랑 바테이블에 앉아서 위스키 한 잔 나누며 대화할 때도, 오빠랑 밤산책 하면서 추위 핑계 대고 서로의 온기를 나누고 싶어 딱 붙어 다닐 때도 -"
잠시 침묵.
"그리고 오빠랑 키스할 때도, 오빠랑 섹스할 때도 몸에 밴 담배 냄새가 조금씩 나."
K는 재차 미안하다, 다시 한번 끊어보겠다고 말하려는 와중에 C가 말을 이어 나갑니다.
"그래도 난 오빠가 원하면 담배를 끊지 않았으면 좋겠어. 왜냐하면, 글 쓰는 사람이 담배 피우면서 스트레스도 좀 풀고 해야 좋은 글이 나오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리고 난 오빠를 사랑하니까, 오빠의 몸에 배어 있는 담배 냄새조차도 오빠 그 자체로 생각해서, 그런 오빠도 사랑하고 있으니까."
K는 C의 말을 듣고는 잠시 생각에 빠집니다.
“C, 내가 핑계 대려고 하는 건 절대 아니고.. 나, 글 쓸 때마다 옛날 작가들이 했던 버릇을 흉내 내는 편이거든. 무라카미 하루키가 [양을 쫓는 모험] 초고 쓸 때 하루에 서른 개비씩 태웠다는 얘기 들려줬었지? 카뮈도, 체호프도, 헤밍웨이도 -오히려 담배가 없으면 문장이 끊긴다고 한 사람들.”
"응, 알지."
"C, 그런데 지금 네가 방금 해준 말을 들으니- 나 담배를 끊을 수 있을 것만 같아."
러시아의 소설가 레프 톨스토이는 포도주, 담배, 사치 등 '유혹적 습관'을 끊고 금욕적으로 살려고 여러 번 시도했다고 하더랍니다. 직접적인 원인은 수양과 신앙이지만, 아내인 소피아에게 안정된 남편으로 보이고 싶어 여러 번 생활 습관을 고쳤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K는 생각했습니다. 수많은 명작을 집필해 낸 톨스토이도 사랑하는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생활 습관을 고쳐가며 명작들을 집필해냈건만, 그의 발톱 만치도 미치지 못하는 말단 작가 주제에 어디 감히 사랑보다 습관을 더 중요시하며 창작을 하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 잘 됐네. 그러면 이번에는 담배 못 끊으면 어떻게 할 건데?"
"음, 뭘 해줘야 C가 더 사랑받을 수 있을까."
"그러면, 이번에 금연 못하면- 나 하늘에 별 좀 따다 줘. 제주도에 별 진짜 많이 보이잖아."
K는 피우던 담배를 툭툭 털어 내고는, C의 말에 하늘을 살짝 쳐다봅니다. 원래 같으면 성광으로 가득 이루어졌어야 할 저 검은 도화지들이, 하필이 면요. 방금까지 비를 쏟아내던 구름들로 가득 차 그저 시꺼멓기만 하더랍니다.
"음.. 별이 없네."
"없다고 하면 다야?"
"대신, C. 이번에는- 별을 따다 줄 수는 없으니.. 꼭 끊어볼게, 이번만큼은."
그러자 C는,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었다는 듯이 푸흐흐 웃어 보이더니 안 그래도 명량하고 사랑스러운 그 목소리를 더 신나게 내보이며 말하더랍니다.
"알겠어 오빠, 대신 나도 오빠 금연 성공하면 선물 하나 줄게!"
"내가 C 때문에 선물 같은 삶을 살고 있는데, 무슨 선물이 더 필요하겠니."
이번에는 둘 다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었다는 듯이 푸흐흐 웃기 시작합니다.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던 K의 머리가 깔끔하게 비워지고, 생기가 돌기 시작합니다. 비워진 머릿속에는 열정으로 가득 차며, 마치 내가 5시간이면 쓰던 것들을 다 써낼 수 있겠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까지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아, 미치도록 사랑스러운 C! 내가 어찌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C, 나 덕분에 머리가 좀 말끔해져서, 이제 다시 글 쓸 수 있을 것 같아."
"알겠어, 잘 다녀오고. 나 조금 기다려보다가 연락 안 오면 먼저 자볼게. 나 신경 쓰지 말고 행복하고 민첩한 창작 생활 해."
"알겠어, 사랑해. 연락할게."
"응, 안녕!!"
전화를 끊고는,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K는 작업실에서 나올 때와는 다르게 서둘러 다시 작업실로 들어가 노트북 앞에 앉습니다. K의 손가락은 예술을 창조해나가기 시작합니다. 철자 하나에 이성이, 단어 하나에 마음이, 문장 하나에 사랑이! 그렇게 풀리지 않던 실타래가 한 번에 수욱 풀리기 시작하더라니, 어느새 기적 같이 K의 마음에 쏙 드는 초고가 탄생 하더랍니다.
K는 오르가슴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본인이 작성한 초고를 처음 부터 스윽 훑어 볼 준비를 하며 다시 한번 되뇌었습니다.
C, 당신을 위해서라면, 당신이 끊으라면 나는 담배도 끊을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