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디 시) 아련한 사치

성윤석의 [원대한 포부]을 읽고 패러디 시를 씀...

by 올제

아련한 사치 /올제


커피를 마시면 야릇한 생기가 생긴다 커피를 마시면 빨갛게 밝아온 아침이 이뻐 보인다 짝사랑도 온다 시간을 거슬러 온다 현재가 사라진다 핸드드립을 하는 동안 과거의 사람들이 몰려온다 우리는 도서관 자판기 앞에 줄을 서 있다 커피를 마시면 없던 숫기가 소리가 되어 소곤소곤 속삭인다 자판기가 고장 났다 동전을 넣지 않고도 버튼만 누르면 믹스커피가 나온다 자꾸만 나온다 갑자기 줄이 구불구불 길어지면서 꾸질꾸질한 일탈이 신났다 오늘 아침의 커피가 주르륵주르륵 시간을 역행하고 있다 허공에 손가락을 누르면 프리마와 설탕이 흘러내린다 언제부터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렸냐며 가난이 뒤통수를 친다 커피를 마시면 찌든 젊음이 잔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온다 눈동자를 뚫고 들어와 각성이 눈을 뜬다 커피를 마시면 커피를 마셨는데 내가 마신 커피는 내 커피가 아니라고 한다 피라고 한다 아프리카 아이들의 피를 탄 것이라고 한다 세상에 피 타지 않은 게 없구나 피 타지 않은 과거가 조물조물 기어간다 누가 내게 자꾸 피를 탄다 나는 지나치게 쓰거나 묽다 쓸데없이 서글프다


원대한 포부 / 성윤석


술을 마시면 원대한 포부가 생긴다 술을 마시면 꺼멓게 잊고 있던 옛사랑도 온다 창문을 열고 온다 창문이 사라진다 술을 마시면 사람들은 술을 마신다 내가 아는 세계는 창문을 통과하고 있다 술을 마시면 없던 용기가 의인화되어 곁에 서 있다 함께 가자고 말한다 술이 꾸불꾸불한 언덕을 넘어가고 있다 나무에 눈을 그리면 사람이 된다 벽에 귀를 달면 사람이 된다 술을 마시면 용감한 상징들이 입속에서 터진다 가슴은 아니라고 한다 나는 세계를 통과하고 있다 창문은 창문을 통과하고 있다 술을 마시면 술을 마셨는데 내가 마신 술은 술이 아니라고 한다 물이라고 한다 물에 물을 탄 것이라고 한다 세상에 물 타지 않은 게 없구나 물 타지 않은 세상이 잠깐 창문을 기웃거리다 간다 누가 내게 자꾸 물을 탄다 나는 지나치게 짜거나 검다 쓸데없이 회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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