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퇴근길

(시간이 약은 아니지만 지나간 아픔은 현재를 살아가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지난날의 일기를 꺼내봅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크고 작은 아픔을 견디고 있을 우리들을 응원합니다!!!)



광복절 전야라서 그런가 하늘이 기쁨의 눈물을 하루 종일 흘리고 있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혹 눈물이 나더라도 빗물이다... 그러면 되는 거였다.


병원 앞에서 마침 고장 난 우산을 쓰고 담담하게 서 있는 내 모습이 대견하기까지 한 거다. 재판정에 선 피고가 이런 기분일까 잠시 생각했다.


드라마의 주인공이 오열하는 모습은 어쩔 수 없이 연기일 뿐이구나 생각했다. 나는 참으로 멀쩡하게 정상적으로 병원비를 지불하고 운전대를 잡았다. 다만 갈 곳이 어디인지 몰라 공회전을 한 것이 벌써 30분이다.


어딘가로 떠날까?


아니다. 수능도 얼마 안 남은 고3 아들과 힙합 페스티벌 티켓 예매로 들뜬 딸과 요즘 들어 유독 머리 아플 일이 많은 남편에게서... 그들의 초조함과 설렘과 고단한 피로나마 지금 그대로 누릴 수 있게 해야겠다.


나는 연기를 하는 거다. 분장을 해야겠다. 삐그덕거리는 거울을 열어 얼룩진 파운데이션을 바른다. 최대한 밝아 보이려면 꽃분홍색 립스틱이 좋겠다.


나는 다시 핸들을 잡았다. 출발이다. 신호가 오면 직진, 차가 막히면 우회전, 골목이 나오면 그 안에서 수도 없이 뱅글뱅글 돌았다. 돌아 나올 때마다 같은 자리에서 제자리걸음하듯 천천히 걸어가는 어르신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스친다.


급할 것도 없는 퇴근길이다. 갑자기 시야가 희뿌옇다. 차창밖으로 떨어지는 저 거센 빗방울은 자동차 와이퍼가 척척 닦아주고 있는데, 아까부터 눈에서 흘러내리는 이 고달픈 청승은 어찌할 길이 없다.


암은 '진단'이라고 하는 게 좋겠다. 하지만 누가 진단을 하더라도 듣는 이에게는 '선고'인 것을 직접 알게 되었다. 그동안 수많은 슬픈 사연에 쉽사리 공감한 나의 눈물이 얼마나 거짓된 허영이었나 잠시 반성을 하였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하고 물어보았지만 이보다 식상한 원망은 없는 거다.


누구나 불행이 오면 그와 같이 왜 하필 나에게만 오는 거냐고 묻겠지만, 그 순간 다른 누구는 또 다른 불행이 자기에게만 일어난 거라 물을 거다. 그러니 묻지 말자.


생각해 보니 행운인 것도 같다. 일찍 알게 되었으니 그렇다.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니 그렇다. 무엇보다 나를 온전히 들여다볼 시간, 나의 몸을 가엾다 여기고 보살펴 줄 시간, 죄책감에 빠지지 말고 나를 사랑할 시간... 이 많은 시간을 한꺼번에 가질 수 있도록, 내 발목이 잠시 돌멩이에 쓰러진 거다. 오히려 딱 이맘때라 더 다행이다.


어느덧 아파트주차장에 들어와 있는 내 차가 참 영특하기도 하다. 비가 그쳤다. 때맞춰 눈물도 그쳤다. 다시 한번 분홍립스틱을 박박 문질러 바른다.


음... 화사한데?


"얘들아~~~

오늘 하루 어땠어?

많이 힘들었지?

엄마는 완전 바빠죽는 줄 알았어.

수고 많았어, 항상 파이팅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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