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여 년 전 무더운 여름에 아버지와 어머니 집사람 두 딸과 함께 6명이 거제도로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그게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가족들이 함께한 첫 여행이자 마지막 여행이었다. 그때 아버지는 팔십 세 노인이셨다. 새마을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서 렌터카를 빌려 타고 거제도로 향했다.
거제도가 여행의 목적지가 된이유는 따로 있었다.
해방 후 6.25 사변이 일어난 후에 아버지는 서귀포 경찰서장에서 거제도 경찰서장으로 옮겨 재직하셨다. 그때 북한에서 많은 피난민들이 거제도로 피난을 왔다. 피난민 대표가 아버지를 찾아와 교회를 지을 수 있게 부탁을 했다. 그당시 아버지는 신앙이 없으셨지만 마침 관사 지을 자재가 있어 관사를 짓지 않고 자재를 내주셨다.
그렇게 지어진 것이 지금 고현교회다. 아버지는 그 당신 신앙이 없으셨지만 이후에 신앙을 갖게 되셨을 때 그 당시 지어진 교회를 찾아보고 싶어 하셨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아버지 팔순 여행을 거제도로 가게 것이다. 교회를 찾았을 때 이미 교회가 새로 증축이 되어버려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평일이라 예배는 없었지만 우리 가족은 예배당에 들어가 기도를 하고 나왔다. 이교회를 짓게 도움을 주었던 아버지는 훗날 신앙을 갖게 되실 줄 알았을까? 아버지에게 교회가시자고 하면 "내가 잡아넣은 목사가 몆 명인 줄 아느냐? 목사 중에 사기꾼들이 많다" 하시면서 콧방귀도 안 뀌셨다. 그러던 아버지가 나이가 드시고 몸이 안 좋아지시더니 막내며느리의 간곡한 권유로 교회에 나가시게 되었다. 아버지의 믿음이 변할까 봐 우리 부부는 토요일만 되면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외식을 했다. 그때마다" 아버지 내일 함께 예배드리고 난 후 맛난 점심 사드리겠다"라고 하면서 교회 가길 권했다.
믿음은 들으면서 난다고 했나? 아버지는 한 해가 지나고 팔순이 되어서 팔순기념 여행을 가시자고 했을 때 아버지는 거제도 교회 짓게 도운일이 생각나셨는지 거제도를 가자고 하신 것이다. 빈 예배당에서 기도를 끝내고 나온 우리는 그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그다음 행선지는 거제 경찰서였다.
정문에 가서 사정을 말하니 현직 서장님이 나오셔서 맞아 주셨다. 차를 대접받고 회의실에 가보니 3대 서장으로 아버지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 사진 속에 아버지는 팔순노인이 아닌 중년의 멋진 아버지이셨다.
난 그때 아버지가 무척 자랑스럽게 느꼈다. 현 서장님과 인사를 나누고 경찰서를 나왔다. 전에 함께 근무하셨던 동료분이 연락이 되어서 모시고 식사 대접을 하게 되었다. 두 손을 꼭 잡은 두노인의 감회가 깊었다. 혼란의 시대를 함께 한지 40여 년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오죽하랴.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 꽃을 피우다 호텔로 돌아왔다. 어린 두 딸은 지루하고 재미없어했지만 아버지는 많은 추억들을 돌아보던 뜻깊은 시간이었다. 그렇게 거제 여행을 끝내고 배를 타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무더위 속 여행이라서 아버지는 많이 지치셨다. 서둘러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신나고 즐거운 재미는 없었지만 나름 의미 있고 뜻깊은 여행이었다.
여행을 다녀 온후 아버지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셨고 8년을 더사시고 돌아가셨다.
20년이 더 지나고 그때 함께 따라가서 준비해 온 수영복 입고 바다에 한번 못 들어간다고 제일 많이 투정 부리던 큰딸은 목사의 사모가 되었다. 강릉에서 교회를 섬기다가 지금은 선교사가 되어 인도네시아 말랑에 가있다.
아버지가 자의로 이룬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선 아버지의 그 작은 선행으로 자손 중에 믿음의 일꾼을 세우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보시고 듣고 계신 것이다. 작은 밀알이 천배, 만 배의 수확을 거두게 하신 다는 말이 맞았다. 나도 심기워진 밀알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올겨울엔 말랑에 가보기로 했다. 더운 날씨에 땀이 흐른다. 아버지가 그리운 계절이 되었다. 어머니와 함께 천국에서 잘 쉬시고 계실 테지요. 하늘은 더욱 푸르고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