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순의 손편지[30-12]
퇴장이 아름다운 사람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갈래로 조명이 되겠지요. 하지만,
뭐니 해도 으뜸은 ‘잘 태어나고 잘 죽는 일’ 일입니다. 그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성공한 사람일수록 떠날 때가 아름다운 ‘성공신퇴(成功身退)’의
모습을 잘 준비해야 합니다.
그렇잖아도 야구선수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길 소원했던 강정호 선수가
선수 복귀를 포기했다는 소식을 듣던 차입니다. 사과하는 것도 때가 있는
법인데, 때를 맞추어 들고 나는 것이 사는 능력인 것을 젊어서 모른 걸까.
안쓰러울 뿐입니다.
우리는 7월 첫 주에 세 사람의 죽음과 동시에 마주했습니다. 영화음악의
거장 엔리오 모리코네가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먼저 떠났고요. 다음은
박원순 서울 특별시장과 6.25의 영웅 백선엽 장군이 비슷한 시간에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사람은 실수하며 삽니다. 그러나 실수투성이인 사람도 말년을 잘 정리하면
평가를 받고, 존경을 받던 사람도 만절을 더럽히면 허사가 됩니다. 여자는
자신의 미모를 자랑하고, 남자는 자신의 능력을 자랑한다고 해요.
그래서 여자는 곱게 늙는 것이 제일이지만, 남자는 떠나는 뒤태가 아름답고
깔끔해야 합니다. 뒤태가 깨끗한 남자의 퇴장은 매력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감동을 줍니다.
“나 엔니오 모리코네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항상 내 곁에 있는, 혹은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친구에게 이를 알립니다.”
7월 6일 세상을 떠난 모리코네가 미리 써둔 자신의 부고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떠날 자리를 차분하게 준비한 사람. 그 진지함이 존경심을
일으켜줍니다. 평생을 이탈리아에서 살았으니, 그에게 한국은 멀리 있는
친구 중 하나였겠지요.
영화 ‘석양의 무법자’를 보면서 팽팽한 긴장감을 일으켰던 그 휘파람 소리로
모리코네를 만났습니다. ‘러브 어페어’ ‘미션’ ‘시실리아’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말레나’를 통해 그의 재능에 존경심을 가졌지요.
서럽고 그리운 시절을 음악으로 회상할 땐, 팬플룻을 쓰는 것도 알았습니다.
모리코네의 진가는 가브리엘 오보에, 미션 OST로도 잘 드러납니다.
500여 편의 영화음악을 작곡한 그는 음악을 “삶이란 감옥에 갇혀 힘들어
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건네는 위로주(酒) 한 잔 같은 것” 이라 했어요.
당신의 음악은 또 다른 이 땅의 주인이었습니다. 그 달콤하고 감미롭던
위로주도 이젠 끝이라니 벌써부터 그리워집니다.
10일엔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거든 나를 쏘라.”라고 한
6.25 영웅 백선엽 장군이 떠났습니다. 공포에 빠진 병사들을 격려하면서
적진으로 돌진해 낙동강 전선을 지키고 나라를 구한 영웅입니다. 두려움을
박차고 앞장선 대한의 영웅들이 지켜낸 것은 이 땅의 자유였습니다.
영웅을 전설로 살려내고 기억하는 일은 우리가 해야 할 몫입니다. 마음을
숙연케 한 것은 안장 위치로 볼썽사나운 말들이 오갈 때 유가족들이 보인
반응입니다.
그들은 정부의 행태에 목소리 한 번 내지 않았지요. 조용히 나라가 정해준
대전으로 가겠다고 말한 것 외에는. 영웅의 후손다운 의연한 모습에, 마뜩이
졸아든 건 옹졸한 결정을 한 못난 그들일 것입니다.
박원순 시장의 죽음엔 생각이 수없이 갈립니다. ‘자살은 자신에 대한 완전한
의무를 위반하는 행동’이라 한 칸트의 말을 빌릴 것 없이, 더 근원적인
질문을 갖게 합니다. 세 번이나 천만 시민의 지지를 받은 사람이 할 짓은
아니니까요.
잔칫집에 초청을 받아 잘 대접받고 나가며 분칠 하는 것 같은 비루한
짓입니다. 끼리끼리 모여 사는 건 인간사회의 이치겠지요. 자기 생각에 맞는
사람들이 모여 으싸으싸 하며 동지를 만들고 그룹을 만들어 관계의 층을
쌓는 것을 탓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남에게 해악이 될 때는
다른 문제가 됩니다.
인권변호사란 이미지만 없었어도, 유서에 피해자에게 미안함만 언급했어도,
이렇게 서운하진 않겠지요. 자살이 자신에 대한 중대한 의무 위반이라 해도,
사회에 대한 무책임한 행위라 해도, 생각을 접을 수 있었을 텐데...
더 이상 레테의 강을 건넌 분에게 무슨 말을 하리오.
성공신퇴는 모든 인생들에 적용되는 경구입니다. 아무리 화려한 삶을
살았어도 돌아가는 데 실패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엇이 그들의 퇴장을
달리 보이게 할까? 세 분의 죽음이 많은 사념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죽어서 사는 사람이 있고, 살아도 죽은 사람이 있고, 죽어서 잊히는
사람’이 생기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