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순의 손편지[30-11]
꽃은 왜 향기가 나는가
보이는 건 사라지고 돌아보는 것은 보이지 않나니 사라지는 것을 보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을 찾으라. 그래서 이상향을 꿈꾸고 천국 같은 내세를
연모하지만, 사람들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하고 자꾸 뒤를
돌아봅니다.
3년 전 친구에 잡혀 처음 지리산 종주를 할 때입니다. 천왕봉에 오르기까지
밟는 걸음걸음이 설렘이고 기쁨이었지만, 나를 가장 놀라움으로 빠뜨린 것은
연하 선경을 지나며 만난 들꽃 무리였어요. 아무도 없는 곳에 고봉준령의 찬
밤바람을 맞으며 어쩌자고 꽃을 피웠을까.
한참을 앉아 작은 꽃들을 보았어요. 산바람에 연신 몸을 누이면서도 여린
자태와 몸짓은 사랑의 언어로 충만합니다. 들꽃이 아름답다는 것을 절절히
재우친 시간이었어요. 나태주 시 ‘풀꽃’이 아니어도 심심산골에 핀 작은 꽃도
찬찬히 관찰하고 가슴으로 안다 보면 우주의 사랑을 듬뿍 받기에 부족하지
않은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길 가에, 들판에, 시골 밭두렁에 아무렇게나 핀 이를 모를 풀꽃과 눈 맞추는
일은 살가운 일이지요. 얼핏 하찮아 보여도 보는 사람이 애정을 갖고 끈기
있게 사랑을 주면 더없이 귀한 존재가 됩니다. 그때마다 풀꽃이 내 손등을
두드리며 실눈을 뜰 때 가슴에 활짝 피어나는 꽃을 느껴요.
좋아하는 우리말 중에 으뜸은 ‘꽃’입니다. 철 따라 산하에 지천으로 널린 게
꽃이고, 사람이 사는 곳이면 토담집, 산막에도 피는 꽃이지만, 애어른 구분
없이 심신에 평강을 주고, 낙심한 사람에겐 어깨를 펴라고 토닥여 주지요.
마음을 잇는데 꽃만 한 선물이 없어요. 꽃다발, 화환, 꽃바구니 같은 이름을
달고 듬뿍 사랑을 받습니다. 내가 꽃의 존재에 눈 뜬 것은 중3 때입니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을 대하면서였어요. 천천히 읽고 또 읽기를 하다 나도
몰래 코끝이 찡해 옴을 느낍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간결하면서도 그 짧은 시구에 하고픈 세상의 말을 다 쏟아놓은 듯했어요.
시인은 무엇을 꽃으로 불렀을까? 어떤 꽃을 콕 집어 불렀을까? 아니면,
사람을 부른 것일까?
물음에 물음을 잇대면서 내 동공 속에 자라는 건 한 소녀의 얼굴이었어요.
밤하늘에 떠오른 달덩이 같고, 막 쪄낸 햇감자가 뿜는 우윳빛 녹말분 같은,
뽀얀 단발머리 얼굴입니다.
“사물의 아름다움은 그것을 생각하는 마음에 존재한다” 고 영국의 철인
데이비드 흄이 말했어요. 자세히 보고, 오래 보노라면 못난 얼굴이 따로
없고 모두가 다 아름답고 사랑스럽습니다. 내가 소녀의 이름을 부를 때 꽃이
돼오듯 소녀가 내 이름을 불러줘야 나도 꽃이 되겠구나.
‘꽃’은 내게 그렇게 다가왔어요.
그 소녀는 고등학교 때 딱 한번 만났어요. 여름방학이 돼 시골집으로 가던
대전 역에서 입니다. 만남이 한 번이라고 잊히는 건 아닙니다. 그 뒤에도
여름이 돼 집에 올 때면 장독대엔 박하가 피었고, 스피아민트 향은 그때를
더 아련하게 했으니까.
사물의 아름다움이 그것을 생각하는 마음에 존재한다면, 사람의 아름다움
역시 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에 있겠지요. 보인 것은 사라지고 돌아보는
것은 보이지 않아도, 그에 대한 연민을 놓지 못하는 게 사람입니다.
다시 詩 하나, 나태주의 ‘내가 너를’ 봅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는 모른다//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
오로지 나의 것이다/ 나의 그리움은/ 나 혼자만의 것으로도 넘치니까//
나는 이제/ 너 없이도 너를/ 좋아할 수 있다
삶은 집 짓기와 같아요. 큰 극장을 지을 때는 기둥의 간격을 벌려 세워야
기둥 사이로 울림이 오롯이 살아난다고 합니다. 무너진 신전에 듬성듬성
서 있는 기둥처럼 기억도 핵심 기둥만 받쳐지면 떨림은 더 아련하고 깊어요.
사랑은, 뭔가를 더하려고 하면 할수록 커지는 것이 아니라, 비울수록
빈 공간에 여운을 키웁니다.
기억이 아름다운 건 향기 때문입니다. 첫 만남이 있던 날, 돌아온 우리 집
장독대엔 박하가 잔뜩 향을 뿜고 있었어요.
❝박하 향기가 내 기억을 스치고 너의 기억을 찾을 때, 어디선가 박하향이
나거든 내가 왔다 갔구나 생각해.❞
참 오랜만에 맡아보는 젊은 날의 꽃향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