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조건

이관순의 손편지 19-13

by 이관순

사랑의 조건


“오색 베일 속, 사람들은 그것을 인생이라고 부른다.” 그 앞에 두려움과

설렘으로 다가오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이 인류의 로망이 된 것은

그곳에 인간의 원초적 그리움이 있어서겠죠.


하지만 아무리 잡으려 해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안개처럼 형체는

없고 그리움만 남기니, 수많은 예술가들도 작품을 통해 사랑의 빛깔을

저마다 달리 채색할 수밖에요.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진부하지 않게 만들고자 온갖 노력을 다하지만,

그중에도 사람들이 흥미진진해하는 사랑 이야기는 질투, 배신, 불륜 같은

것들입니다. 하지만, 사랑의 본류는 아니지요.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사랑의 참모습은 무엇일까. 사랑의 숭고함이 책임과

희생, 용서와 화해로 담아질 때, 소낙비 끝에 뜨는 무지개의 탄성을 만나게

됩니다. 이들 단어가 직조한 베일 속으로 진정한 사랑이 태어나고 삶의

의미를 되짚는 묵직한 서사를 안겨줍니다.


남녀의 사랑을 여러 비유로 말할 수 있겠지만, 둘이서 하나의 나침반을

들고 걷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나침반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나서야 정 방향을

가리키고 멈춥니다. 사랑 역시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자리를 잡아가는 게

아닐지. 그 흔들림이 고난이고, 아픔이고, 역경일 수 있겠지요.


톨스토이는 사랑을 테마로 ‘안나 카레니나’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겼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예술로 가득 차 있다”라고 격찬한 소설. 톨스토이의 예술적

정점을 찍은 대작입니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에서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유명한 문장을 남겼어요. 그는

이 문장을 쓰기 위해 17번이나 고쳐 썼다고 알려집니다.

이 문장을 이렇게 고쳐보면 어떨까요? “행복한 사랑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사랑은 각기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라고. 사랑이 불행으로

나타날 때는 너무나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니까요.


1977년 11월 추운 밤, 이리 역에서 최악의 철도 폭발사고가 발생합니다.

화약열차를 호송하던 직원이 켠 촛불이 원인이었죠. 이 폭발로 거대한

웅덩이가 생기고, 건물 수천 채가 파괴되면서 1400여 명의 사상자가

났어요.

이 사고로 한 20대 여성이 발목 하나를 잃었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있던

여성은 참담함 속에서 약혼자를 기다립니다. 이 모습에 얼마나 절망할까.

쌍루로 눈물만 흐를 뿐입니다.


주말이 돼 청년이 서울에서 내려왔고, 두 사람은 믿기지 않는 현실 앞에

부둥켜안고 웁니다. 남자가 단호하게 말했어요. “네 인생은 내가 책임질

거야. 걱정 말아요.” 여자는 감격해 펑펑 눈물을 쏟습니다.


남자는 주말마다 병원을 찾아와 여자를 위로했어요. 한없이 고마운 남자.

그런데 언젠가부터 남자의 발길이 건너뜁니다. 회사 일이 생겨서, 이런저런

이유로 점점 오는 간격이 벌어집니다.


그래도 여자는 남자를 믿고 이해했어요. 어떻게 매주 오겠어. 바쁠 텐데.

해가 바뀌자 남자의 발길이 끊어집니다. 아무런 연락도 없이. 그제서 여자는

고개를 양 무릎 사이에 묻고 웁니다.


그동안 남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처음에는 운명으로 받아들일까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회의가 들었겠지요. 주변의 충고도 있었을 테고. 이것이

최선인가, 점차 자신이 없어져간 겁니다.


2004년 어느 날, TV 아침 프로에 중년 여성이 출연했어요. TV를 보다가

27년 전 이리역 사고로 다친 여자의 사연을 듣습니다. 그녀가 담담히

말합니다. “그 후 지금까지 소식 한 번 없었어요. 내가 순진했죠. 한땐 원망도

했지만, 내 운명이지 그 사람 운명은 아니라고 잊었지요.”


사랑에는 고난이 전제됩니다. 고난이 올 때, 맞서 싸울지 피할지, 여기서

사랑은 참과 거짓의 본얼굴을 드러내지요. 우리가 예술작품을 보고 사랑에

전율하고 감동함은 사랑의 고귀한 가치인 ‘책임’과 ‘희생’을 볼 때입니다.


사람들을 열광시키고, 유한하고 외로운 인생을 끌어올리는 구원의 빛을

거기서 봅니다. 그러나 비극적인 현실은 사랑을 가로막는 상처와 조건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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