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 사랑한다

이관순의 손편지[214]

by 이관순

2021. 03. 08 (월)

한때 ‘유언장 미리 써놓기’가 유행처럼 번졌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대학에서도 내게 죽음이 임박했다는 가정 아래 유언장을 작성해서

제출하라는 과제가 나오기도 했었죠.


학생들은 대부분 현실과 괴리가 있는 이 생뚱맞은 과제를 받아 들고

장난기가 일었지만 막상 써가면서 몇 번을 볼펜을 놓고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 했습니다.


이 운동을 폈던 시민단체는 앞만 보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발걸음을

멈추고 걸어온 길과 살아갈 길을 살펴보는, 유용한 시간을 갖자는

취지라고 밝혔었지요.


인간은 죽음이란 자각을 통해 더욱 치열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는

앞서 살다 간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통해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수많은

자서전, 회고록 등을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2005년 고고미술사학자 김원룡 선생의 장례는 화장장으로 치렀습니다.

뼛가루는 경기도 연천 전곡리 구석기 유적에 뿌려졌지요. 선생은 죽기

30년 전 40대에 유서를 써서 연구실 캐비닛에 보관했습니다.


유서에는 “내가 죽으면 입고 있던 옷 그대로 즉각 관에 넣어 곡성 하지

말고 화장하라 “고 썼지요. 그는 생전에 한 기고 글에서 ”어쩌다 캐비닛

문을 열다가 흰 봉투를 발견하면 아차, 이러면 안 되지 아직도 뭘 그리

억척을 떠나 깨닫게 돼 정신 수양에 도움이 된다”라고 했습니다.


유언장을 써놓은 것이 반대로 악착같은 삶의 의지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어요. IMF 사태로 경제가 공황 상태이던 때 ‘유언장 닷컴’을 운영한

분의 얘기입니다. 공장 부도로 매일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다가,


무작정 차를 몰아 자유로를 시속 180km로 달렸습니다. ‘손목을 살짝

돌리면 고통 없는 곳으로 가겠다’는 충동에 치받칩니다. 그 순간

책장에 은밀히 보관해둔 유언장이 떠올랐습니다.


차를 길가에 세우고 눈을 감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아버지는 누구보다 열심히 성실히 살았다. 네게

자랑스러운 아버지로 기억됐으면 좋겠다”는 자신이 쓴 유언장 글귀가

발목을 잡았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길을 정리하는 글에는 유언이든 유서든 쓴 사람의 성격,

삶에 대한 태도 등이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특히 평생을 함께 살다 홀로

남는 반려의 입장에서는 어떤 말을 남겼을까 관심이 클 수밖에요.


셰익스피어는 9살 연상의 아내와 금슬이 좋지 않았습니다. 유언장에는

소장품 그릇 하나하나까지 상속자를 정하고, 친구와 이웃에게도 온정을

잊지 않았지만 배우자에겐 야박했어요. ‘내 아내에게는 두 번째로 좋은

침대를 준다’는 달랑 한 구절을 남겼습니다.


이 시기 또 한 분의 가상 유언이 화제가 됐었죠. 우리가 잘 아는 작곡가

고 황병기 교수의 아내인 소설가 한말숙 선생이 “너희 아빠의 재혼은 안

된다”라고 못 박았답니다. 에둘러 남편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것이지요.


또 한 시인은 감성 깊은 유언장을 남겼습니다. “세상에 두 번 태어나서

행복하게 살다가 떠나오. 어머님으로부터 태어나 반평생을 살고, 당신을

만나 반평생 복락을 누렸소”라고.


그즈음 어느 카드사에서 중년 남성들을 대상으로 ‘아내에게 남기고 싶은

유언 한마디’를 물었는데 1위가 ‘미안하다’, 2위가 ‘사랑한다’로 나왔어요.

‘재혼하라’, ‘재혼하지 마라’ 보다 배 이상 많았습니다.

실제 상황에서는 어떻게 나타날까? 2001년 <9.11 테러>로 여객기가 뉴욕

무역센터 빌딩에 충돌하는, 그 급박한 상황에서 핸드폰에 찍힌 문자는

모두 ‘미안하다’ ‘사랑한다’였습니다.


2015년 1월, 사망한 사우디아라비아 전 국왕 압둘라 빈 압둘 아지즈

시신이 리야드 공동묘지에 묻히는 걸 보았습니다. 작은 자갈과 흙더미에

덮인 무덤은 무덤 사이를 구분하는 작은 돌기둥 하나만 세워졌을 뿐,

세상에서 누린 어떤 글귀도 없었어요.


19조 원의 거부인 국왕이 공동묘지에 묻히는 걸 보면서 “죽음은 그저

흙더미 한 점이 바닷물에 씻겨 나가는 것”이라는 시 구절을

떠올렸습니다.


어떠신가요? 중요한 것은 오늘의 삶이니, 생전에 미리 유언장을 써봄도

실없는 일은 아니겠지요.

진지한 삶의 태도를 갖기 위해.

-글 이관순 소설가/ ks81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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