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순의 손편지[213]
소꿉놀이하며 사는 인생
은퇴한 지 7년 만에 친구가 시골에 집을 마련해 내려갔습니다. 그는
시골생활에서 두 가지를 꿈꾸었는데, 하나는 세계문학전집을 다시 읽는
것이고 하나는 나무를 심고 키우는 재미에 푹 빠지고 싶다했어요.
이사 한 달 뒤, 괴산으로 그의 시골집을 찾았습니다. 미처 정리가 안 된
탓이지만, 비었던 집을 사람 온기로 채우기엔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였습니다. 200평의 너른 텃밭은 풀과 나무들로 어지러웠죠.
“정신 사납지? 살면서 궁리해 보려고.” 친구가 내 입막음부터 합니다.
하긴 남의 집에 손 댈 필요는 없겠지요. 연로한 집 주인이 서울 아들네로
합치면서 팔리지 않자 전세를 놓은 집입니다.
을씨년스럽던 집안이 갈 때마다 변화가 보입니다. 2년 뒤 찾았을 때는
마당과 텃밭 뒤란까지 반듯하게 정리돼 있었지요. 시골생활이 싫다던
아내가 내려오고 집도 매입하면서 시골생활이 정갈해 보였습니다.
친구는 가을마다 나무를 심었습니다. 감나무, 밤나무, 배나무, 대추나무
부터 심더군요. 제사상에 쓰이는 과일을 직접 재배해 올리려는 알뜰한
조상 숭모의 마음이 은연 중 드러납니다.
이어, 계절마다 꽃과 열매를 보려고 매화, 명자, 매실, 살구, 백일홍에
배롱나무, 단풍나무 등을 텃밭에 심었어요. 이주 6년이 되자 그의 집엔
아직 굵지 않은 대추나무에 꽃이 지면서 콩만 한 열매가 달렸어요.
비바람 속에 열매들이 여물어가는 걸 보노라면 생명의 경이도 놀랍지만
모진 세월을 견딘 여린 열매가 대견합니다. 대추나무는 피는 꽃마다
열매를 맺는 속성 때문에 자손 번창을 기원하는 의미로 일찌감치
제사상 과일로 택함을 받았지요.
그의 말처럼 나무를 심는 것만큼 윤리적 생명관에 부합한 일도 없겠죠.
그 과정에서 몸에 기생하고 있는 미움과 증오, 화기를 누그러뜨리고
아픔을 주었던 사람들을 용서하는 마음을 키웁니다.
자식들이 배우자를 따라 새 삶을 찾아 떠나자 덩그러니 두 내외만 남은
건 친구나 나나 같지요. 내 인생은 살뜰하지 못했어도 아이들이
늠름하게 자라 제 길을 가는 게 무척 대견스럽다는 마음도 같습니다.
“사실 사람도 나무처럼 스스로 크는 것이거든. 부모는 그저 걱정할 뿐이고.”
집안에 온기를 찾으려고 들인 누렁이가 그 사이 새끼를 낳고, 새끼가
새끼를 낳고 낳아 젖을 물려 살뜰히 기르는 걸 봅니다. 몸에 생명을
품고 낳아 다음 세대로 잇는 건 생명체의 숭고한 본분입니다.
‘자식농사 반타작이면 잘 한다’던 시절이 있었죠. 전란으로, 질병으로,
사고로 자식을 앞세웠던 아픔들. 모든 것이 열악했던
그리 멀지도 않은 시절의 얘기랍니다.
생명은 다 비슷한 삶을 살아요.
나무도 운명이 있는지 살고 죽는 게 각각입니다. 어떤 나무는 심었으나
한 겨울을 못 넘기고 죽고, 영양제 링거까지 놔주며 정성을 쏟는데도
살지 못하는 나무가 있습니다. 열을 심으면 서넛은 그렇게 죽어요.
나무는 제가 선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수행자와 같은 시련을 견디며
열매를 얻지요. 모든 걸 바쳐 구한 열매들입니다. 그것이 시련을 견뎌낸
보람일 테고, 열매나무의 소명입니다.
2월임에도 울안에는 이름 없는 들풀이 숨죽인 채 봄기운을 머금었어요.
자연생도 있지만 이집 마님이 여기저기서 분양받아 온 야초도 많습니다.
약이 없던 시절엔 다 비상약으로 쓰이던 것들이죠.
채 녹지 않은 눈이 쌓인 집에는 봄의 전령사들이 곳곳에 숨어있어요.
눈을 헤치니 밟아도 죽지 않는다는 질경이가 모진 생명을 키우고, 돌 틈
사이로 싹을 보인 쑥이며 민들레가 벌써 봄 마중에 나섰습니다.
“자연은 생각지 않은 선물을 안겨요. 좀 있으면 텃밭은 약초밭이 되죠,
자라는 모습에서 행복감을 느껴요.” 말하는 아내가 친구보다 더 자연에
심취돼 보입니다. 무조건 뽑아내던 풀들이 다 친구가 되었답니다.
오늘은 아무렇게 자란 질경이를 뿌리부터 씨까지 그대로 말렸다며,
생강과 대추를 넣고 우려낸 차를 내옵니다. “토종 허브 차에 맛 들리니
싸놓고 마시던 커피며 다른 차들은 다 뒷전으로 밀렸어요.”
“우리 이렇게 소꿉장난하며 산다네.”
그 말에 모두 함박웃음을 짓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소꿉놀이 한다는 친구 말이 그렇게 고울 수 없고
또 서늘한 것이, 소꿉놀이하다 엄마가 부르면 다 내려놓고 가야하는
인생 같아서. 순박한 친구 얼굴이 차창 밖 저녁노을 속에 흔들립니다.
-글 이관순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ks812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