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노래로 이봄을 맞으리

이관순의 손편지[217]

by 이관순

겨울은 늘 용맹함으로 시작했다가 패잔병처럼 사라져 갑니다. 아직

정월(음력)인 데도 여기저기서 봄의 옷자락 끌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바위 밑에 남은 잔설을 헤치니 봄의 전령인 복수초가 어느새 꽃눈을

틔웠습니다.


소리 없이 바빠지고 있는 것은 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싱그러운 수액이 오르고, 메말랐던 나뭇가지는 물기를

머금었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차디 찬 땅 속에 내린 뿌리들이 겨울 한철을 어떻게 견뎠을까.

뿌리의 고단한 헌신에서 모성애를 느끼는 것은 혹독한 겨울에도

잠들지 못하고 생명을 품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막 식물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많은 뿌리를 깊이 내립니다.

이에 비해 수생식물은 뿌리라고 할 것도 없을 만큼 빈약합니다.

콩나물을 키워보면 알 수 있습니다.


물이 넉넉하면 곁뿌리가 적고, 부족하면 잔뿌리만 키웁니다. ‘뿌리가

깊어야 가뭄을 타지 않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근원이 깊고

튼실해야 어떤 시련도 견뎌낼 수 있다는 뜻이 함축돼 있습니다.


모든 것에는 근본이란 게 있습니다. 개인과 집안, 국가와 민족, 전통과

문화에도 근원이 있는 법이니까요. 오죽하면 ‘물 한 모금을 마실 때도

시원을 생각하라(飮水思源)’고 했을까.


식물학자의 말을 빌리면 땅 위에 드러난 식물의 잎줄기와 땅 속에 내린

뿌리의 생체량은 엇비슷하다고 합니다. 지상의 풀 한 포기, 잘라낸 나무

한 그루의 무게가 지하에 뻗친 원뿌리와 잔뿌리를 합친 것과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식물 뿌리를 ‘숨겨놓은 반쪽’ 이라고도 한답니다. 잔잔한 호숫가

벤치에 앉아서 물 위로 드리운 나무 그림자를 보노라면 수면 저 아래

광맥처럼 뻗혀 있을 뿌리가 궁금해질 때가 있습니다.


이목지신(移木之信)이란 말이 있습니다. 군주는 나무 한 그루를 옮기는

데도 백성을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지만, 나무를 옮겨 심을 때는 믿음을

줘야 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어요. 생명은 그만큼 연약한 것입니다.


옮겨 심는 나무가 클수록 새 땅에 적응하는 기간이 길어져 3년까지는

안심할 수 없다고 합니다. 옛적에, 고향의 어른들이 큰 나무를 이식한

후 막걸리를 둘레에 흠뻑 뿌리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커서야 뿌리를 돌보는 토양세균들의 왕성한 번식을

돕기 위한 배려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원래 자랐던 곳의 흙을 떠 와

섞어주기도 합니다. 익숙한 토양세균과 더불어 새 땅에 잘 적응하게

하려는 정성을 담은 것입니다.


봄기운이 산야의 곳곳을 오르고 있습니다. 주자십회훈(朱子十悔訓)에

“봄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후회한다(春不耕種秋後悔)”고 했어요.

그럼에도 진실과 사실은 달리하는 게 우리네 삶인 것이,


마음은 이미 봄인데 몸은 아직 겨울옷을 두르고 있으니까요. 좌표를

짚어보니 서 있어야 할 자리에서 멀리 쳐져 있는 나를 봅니다.

하지만 깨달음이 있고 갈 길이 남았다는 것은 축복이기도 합니다.


그 마음으로 겨우내 움츠렸던 몸에 기운을 모으고 다시금 신발 끈을

동여매렵니다. 올봄도 텃밭을 작은 수도장으로 삼아 땀을 내는 것으로

시작하렵니다.


언 땅을 뒤집고 드러난 검은 살에 봄볕을 쬐는 일부터 하려고요.

흙살의 감촉과 흙냄새도 맡으면서. 어떤 향수가 언 땅 속살에서 나오는

흙냄새만 한 것이 있을까.


마른 마음밭(心田)에도 생기를 불어넣고 정성껏 씨를 뿌려야겠습니다.

뱀이 허물을 벗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성장하려면 피부를

찢어내야만 합니다.


매번 같은 패턴으로 피부를 벗지만 새로워지는 뱀처럼, 나도 낡은 옷을

벗고 새 노래로 봄을 맞으리라. 텃밭에다, 심전에다, 씨앗을 뿌리면서

한없이 봄 길을 걸어보리라.

글 이관순 소설가/ks81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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