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에 가장 소중한 날

이관순의 손편지[18-15]

by 이관순


아버지 기일을 찾아 대전으로 내려가는 기차를 탔습니다. 창밖의 잿빛

세상을 보면서 저무는 해와 가당찮은 내 나이와, 헐렁해진 시간의 밀도

속을 헤집는 바람소릴 듣다가 뜬금없는 의문 하나를 건졌습니다.

그날 아버지가 만족하셨을까?


희수(77세) 연이 열린 어느 해 봄날, 아내를 5년 앞서 보낸 아버지는 혼자

상을 받으셨지요. 자식들은 아버지께 기쁨이 되고자 많은 친구 분을

초대해 정성껏 모셨습니다.


모두 기꺼워하셨고 당신도 흡족하셨는지 직접 자손을 소개도 해주셨지요.

그런데 27년이 지난 지금 왜 그 생각이 든 걸까? 물론 그때도 어머니의

빈자리가 크고 아쉬웠지만 아버지 심중에 이는 댓바람 소리는 미처

듣지 못했습니다.


‘부부 해로’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습니다. 옆에서 배우자 잃는 모습을 보며

‘짝’과 ‘외짝’이 얼마나 큰 행복과 불행의 요소인지를 알게 됩니다. “부부가

같이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 일인가?” 수년째

아내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있는 친구의 절절함이 밴 말입니다.


예전엔 그저 화사한 수사려니 했는데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살자’라는

말의 참뜻이 심금에 와 닿습니다. 요즘의 세태에서 ‘파뿌리’는 이미 고전이

된 지 오래입니다. 그만큼 부부 개념도 달라졌으니까.


요즘은 아이들 생일이 대세입니다. “애가 무신 생일 이누.” 그런 소리를

듣던 게 엊그제 일 같은데. 지금은 돌만 지나면 깨치는 게 ‘생일’이고 입에

달고 있는 말이 ‘생파’입니다.


애들 생일잔치가 더 요란해졌지요. ‘생파’라고 친구들을 초청하고, 친구

생파라고 선물 싸들고 다니는 또래들을 보노라면 이 나라가 생일 문화

하나만큼은 흥왕 했구나 하는 격세지감마저 갖게 합니다.


해가 바뀔 때마다 새 달력을 걸기 전에 써놓는 것이 있습니다. 가족들

생일부터 기록해 두는 것입니다. 누구로부터 축하를 받는 것은 즐겁고

행복한 일입니다.


외로운 인생끼리 날을 기억해 주고 “오늘은 당신의 날이야, 네가 세상의

주인공이야.” 하고 축하해주니 때론 감격스럽기도 하고 가족들이 부르는

축복송이 눈물겹기도 하지요.


아버지 기일에 새롭게 눈뜬 ‘결혼기념일’. 최근 모임에서 고등학교 후배가

결혼 30주년 기념일이어서 먼저 일어나야겠다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그 말에 덥석 그의 손부터 잡았습니다.


“야, 자네 부인이 훌륭하시네. 30년을 데리고 살아주셨군. 잘 모시게.”

진반농반의 축하였지만 말에 진심을 담았습니다. 갈수록 쉽지 않은 일이

될 것 같아서죠.


앞으로 결혼 30년? 40년? 된다는 것이 흔치 않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빠른 결혼에, 이혼은 언감생심이라 살았다 하면 은혼식, 금혼식은 보통이고

60주년 회혼식을 맞는 어른도 많아 동네잔치가 됐었지요.


이제는 ‘전설 따라 3천 리’ 에나 나올 법한 얘기로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나이 40을 넘겨 어렵게 결혼하고도 이혼은 그리 쉽게 잘하는지, 경력이

될 일도 아닐 텐데, 툭하면 이혼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이젠 어른들도

가세해 황혼 이혼이니 연금 이혼이니 사전에도 없는 말이 생겼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두 집 건너 하나씩 노총각 노처녀가 있지요. 부모들

마음은 녹아내리는데 정작 당사자는 이대로가 좋다고 태연합니다. 그래서

자식에게 결혼 얘기는 묻지도 꺼내지도 말라는 금기 영역이 돼버렸습니다.


이런 세태 속에서 진정으로 축하를 받을 사람은 1년에 하나씩 나이테를

늘려가는 부부들입니다. 거친 세파에도 꿋꿋이 부부의 자리를 지키는

아내와 남편, 엄마와 아빠가 있을 때, 가정은 보금자리로 빛납니다.


나 홀로 팔순, 구순 잔치가 무슨 의미이며 큰 기쁨일까. 그보다 살아서

부부가 맞는 결혼 30주년이 소중하고, 40주년 50주년으로 이어간다면

이만한 복도 없을 것입니다. 하늘이 내린 축복으로 반길만한 일이죠.


생일잔치보다 해로 잔치가 더 성대했으면 합니다. 연말에 큰 기업의

창업주와 만난 자리에서 말했지요. 생일도 좋지만 회사가 결혼기념일을

챙기는 문화를 만들면 좋겠다고.


석혼식(10년), 은혼식(25년), 진주혼식(30년) 등, 어렵게 결혼하고 쉽게

도장 찍고 돌아서는 이 불편한 시류에, 가정의 연륜을 소중히 가꾸는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보금자리 인증’ 하나 만들어 주면

좋지 않을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