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관순 Apr 10. 2022

이어령, 그의 딸 민아

이관순의 손편지[290]

이어령 선생이 지상의 언어를 내려놓고 세상을 뜨면서 세간의 입에

오른 것이 그의 딸 이민아 목사입니다. 아버지보다 10년 앞서간 딸이

다시금 사람들 기억에서 되살아난 것입니다.

      

부녀 사이지만 서로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딸의 간절한 기도는

무신론자 아버지를 ‘지성에서 영성으로’ 쉽지 않은 변화를 이끌었습니다.

성경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했던 아버지를.  

      

“내가 노아라면 혼자 살기 위해 방주를 짓지 않았을 것”이며, “신(神)은

“6.25 전쟁 때 무엇을 하고 있었나?” 반문하던 아버지의 견고한 이성을

무너뜨린 것은 딸의 영성이었습니다.

      

사랑했던 딸이 망막박리로 눈이 멀었다는 사실을 알면서 이어령은 처음

신에게 기도했습니다. “내 딸에게서 빛을 거두어 가지 않으신다면 남은

저의 생을 주님께 바치겠습니다.”

    

2007년 이어령이 세례를 받기 위해 지성의 높은 탑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습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낯선 영성의 길을 찾아 기독교에

귀의한 것입니다. 그리고 7개월 뒤 딸이 눈을 떴습니다.   

  

딸의 실명이 아버지의 회심을 불렀다면, 딸의 회심에는 아들의 죽음이

있습니다. 딸은 1981년 김한길 전 의원과 결혼해 첫아들을 낳고 아기와

처음 눈 맞춤 한 순간을 생애 최고의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그렇게 엄마의 기쁨이었던 아들 유진이 허망하게 죽습니다. 버클리대

음대생이던 아들이, 가출한 친구들을 집에 데려다 보살폈던 착한 아들이,

쓰러져 혼수가 되고 19일 만에 눈을 감은 것입니다.    

   

비극의 출발은 결혼이었습니다. 딸은 첫사랑 남자인 김한길에서 아버지와

닮은 지적 분위기를 느꼈고, 아버지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딸은 아버지의 반대에도 결혼하고 미국 유학을 떠났습니다.   

   

스물둘의 어린 딸이 흑인 동네에 살며 밤에는 주유소, 낮엔 햄버거

가게에서 일하면서 공부하는 고단한 인생을 살아야 했지요. 서울 집에는

모든 사실을 숨긴 채 아이 낳고 공부하고 돈을 벌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성격 차란 이유로 5년 만에 헤어지고, 미국인과 재혼

했지만 둘 사이에서 특수 자폐아가 태어납니다. 딸은 그 아이를 데리고

초등학교만 다섯 번 옮기고, 중학교는 1년 만에 쫓겨났습니다.  

    

이대 영문과를 3년 만에 마친 후 미국 로스쿨을 졸업한 딸은 캘리포니아

주 검사로, 다시 변호사로 변신을 계속했지만, 그녀의 내면적인 삶은

비운으로 얼룩졌습니다.  

       

두 번의 이혼과 큰아들과의 사별, 자폐아를 둔 엄마, 암세포와 싸우는

암환자, 망막 박리로 시력까지 잃는 등 이어령의 딸로는 어울리지 않게

파란만장했습니다.  

    

아들을 잃고 1년을 매일같이 울며 신을 원망했습니다. “성경에 부모를

공경하면 장수한다고 쓰여 있는데, 그 아이보다 부모를 사랑한 아이가

있으면 대보 시라”라며 대들었습니다.

    

평안이 없던 그녀에게 기적이 찾아옵니다. 하와이 크리스천스쿨로 옮긴

지 1년 만에 아들의 자폐 증상이 안개처럼 걷힌 겁니다. 큰 아들의 죽음,

둘째의 자폐를 겪으며 소명으로 받아들인 것이 청소년 사역입니다.

      

그로부터 ‘유진 엄마’는 ‘땅끝의 아이들’ 엄마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녀가 돌 본 서른 명의 아이들은 그녀를 ‘마마 미나’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2009년 목사가 되면서 서원했습니다.  

    

“유진이가 엄마 아빠 이혼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며 흘렸던 눈물을 씻어

주시고, 잘 길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아이 대신 부모 사랑을 못 받고

하나님 모르는 아이들에게 저를 보내주시면, 그들을 섬기겠습니다.”   

     

목사가 된 그녀는 미국, 아프리카, 중국 등지를 돌며 술과 마약에 빠진

청소년 구제 활동을 펼치다 암이 재발한 걸 알았습니다. 병원에 갔을

때는 암세포가 위에서 난소로 뼈까지 퍼져 있었습니다.  

   

암이 내게 주는 메시지는 무얼까? 그녀가  2011년 두 번째 위암을

판정받고 스치는 첫 생각이었습니다. 차분하게 물었습니다. 저에게

무엇을 원하시나요? 갑상선암 치료 때와 같이.  

    

결혼생활에서 받은 상처가 암세포가 된 건 아닐까. 모든 걸 용서한다고

했지만, 정작 결혼으로 인한 아픔은 뼛속에 눌어붙어 떨어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죠. 비로소 그녀의 상처에 딱지가 앉았습니다.   

    

그로부터 그녀는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3~4시간씩 이어진 집회 일정을

다 소화했습니다. 암 환자가 다른 암환자의 머리에 일일이 손을 얹고

기도하던 이민아 목사는, 2012년 봄 하늘의 부름을 받습니다.

       

딸은 생전에 쓴 책 ‘땅끝의 아이들’에서 아버지에 대한 서운한 마음을

드러냈었죠. “자기 전에 인사를 드리기 위해 예쁜 잠옷을 입고 아버지

서재 문을 두드렸다. 아빠가 ‘굿 나잇’ 해주길 기대했는데 쳐다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손만 흔들어 보였다.”  

    

아버지는 딸이 떠난 후 수필집 ‘딸에게 보내는 굿 나잇 키스’를 통해

아비의 미안함과 사랑을 전했습니다. 하나뿐인 딸에게 마음에도 없는

냉정한 아비로 비추어졌을까. 때늦은 후회의 편지를 담았습니다.  

    

아버지는 죽기 전, 딸 10주기에 맞춰 시집 ‘헌팅턴 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출간을 준비했습니다. 세상을 뜨기 며칠 전엔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시집 서문을 불러줬습니다.

     

“네가 간 길을 내가 간다/ 그곳은 아마 너도 나도 모르는 영혼의 길일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지 우리의 것은 아니다”라고.   

       

풍파 많은 삶으로 세상을 울리고 간 딸을 이어령은 어떻게 보았을까.

딸을 보내고 그리움에 살던 아버지는…. 딸을 보낸 지 꼭 10년 만에

아비도 딸을 따라 영원한 영성의 길을 떠났습니다.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작가의 이전글 죽음도 관찰한 이어령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