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순의 손편지[295]
신록은 꽃철에서 시작합니다. 꽃철은 아이들을 산으로 불러냅니다.
살아난 산들이 골짝마다 화사한 옷으로 갈아입고, 딱히 갈 데 없는
가난한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꽃동산을 열어줍니다.
진달래 철쭉 아카시아 등 색색으로 피어난 봄꽃들이 능선과 골짝을
물들이고, 흥에 겨운 아이들이 쉬지 않고 꽃을 찾아다니던 풍경 속엔
아이들만의 또 다른 즐거움이 있습니다.
“야, 여기! 이리 와!” 또래 형이 소리치면 아이들은 소리 난 곳을 향해
우르르 비탈을 내달리죠. “와~!” 아이들이 지르는 탄성엔 아름다움보다
‘많다’는 데 방점이 찍힙니다. 봄꽃은 곧 먹는 꽃이니까요.
아이들은 그때가 보릿고개란 것을 모릅니다. 쫄쫄 배를 골아도 사는 게
그러려니 할 뿐. 또래들의 관심은 늘 노는 데만 정신을 팔지요. 그러다
허기를 느끼면 또래 형이 소리칩니다. “야, 산에 가자!”.
뒷산에서 삘기를 뽑아 먹고, 붉은 진달래를 따서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습니다. 쌉쌀한 맛이지만 모두들 입술이 물 들도록 꽃잎을 따 먹고
집으로 향할 때면 입술마다 보랏빛에 물들었죠.
음식으로 치자면 요즘 한창인 이팝나무꽃이 더 살갑습니다. 나뭇가지를
뒤덮은 하얀 꽃이 마치 ‘이밥(쌀밥)’ 같다고 붙여진 이름입니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 핀다고 입하 목(立夏木)으로도 불립니다.
이팝이 꽃을 피울 때가 공교롭게도 보릿고개와 겹쳤습니다. 보릿고개를
넘던 옛 조상들 눈에는 가지마다 다닥다닥 붙은 꽃이 쌀밥으로 보였나
뵵니다. 이팝꽃이 주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환영입니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압권인 장면은 정적을 깨는 팝콘 판타지입니다.
국군, 인민군, 연합군이 마을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만들어낸 우리
민족의 아픈 서사를 더 저리게 했던 그 장면….
수류탄이 마을 옥수수 창고로 굴러들어가 터지면서 옥수수가 팝콘으로
튀겨져 하늘 높이 솟아오를 때, 사람들 얼굴마다 온기가 살아나고,
팝콘이 밤하늘에서 흰 눈송이가 돼 내릴 때, 모두를 잠시나마 선한
얼굴로 되돌려 함박웃음을 짓게 했던 팝콘 판타지….
어제 들린 서울 현충원에도 이팝나무마다 흰 눈이 소복소복 쌓였습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충혼의 넋을 위로하는 지금은, 저보다 맞춤한 꽃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새 정부가 국민 품으로 돌려준 청와대에도 이팝나무 꽃이 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정치를 시작한 대구 달성에서 가져와 심었다는데,
올해는 더 많은 꽃장을 열어 ‘웰컴 투 청와대’의 한 자리를 밝힙니다.
언젠가부터 은행나무를 대체해 가로수로 각광을 받더니 청계천에도
가로수에서 흰 팝콘을 터트립니다. 전주 팔복동 철길, 함평 양재리에도
그 소박한 꽃송이가 밥사발 가득 흰쌀밥을 얹었습니다.
조선 왕조 때에는 벼슬을 해야 이씨가 주는 귀한 밥을 먹을 수 있다고
해 ‘이(李)밥나무’로 불렸다는 꽃. 전라도에서는 ‘밥태기’, 경기도에서는
‘쌀나무’로도 불리지만 이미지는 다 흰쌀밥이죠.
나무에 무슨 귀족이 있고 서민이 있을까만 굳이 따진다면 이팝나무는
배고픔의 고통을 아는 서민 나무의 대표라 할 것입니다.
군락을 이루어 피는 벚꽃, 배꽃, 지금이 한창인 이팝꽃, 아카시아꽃처럼
흰꽃만큼 우리 눈을 환하게 열어주는 꽃도 없습니다. 지금은 산하마다
아카시아가 제철입니다.
오늘도 워커힐을 지나 집으로 가는 아차산로에는 산에서 내려오는
아카시아 향기로 진동합니다. 사시사철 내게 넓은 품을 열어준 아차산은
지금, 하얀 꽃무리가 구름꽃이 되어 녹색 숲을 덮고 있습니다.
밤에 창을 열면, 베란다를 지나 서재로 들이친 고혹한 향기가 절로
깊은 들숨부터 쉬게 합니다. 아카시아는 서러움의 꽃입니다. 가난 했던
옛 시절, 아이들이 밥 대신 따먹던 꽃이었으니까요.
또한 그리움의 꽃입니다. 이해인 시인의 시 ‘아카시아’가 그렇습니다.
❝..내가 철이 없어/ 너무 많이 엎질러 놓은
젊은날의 그리움이/ 일제히 숲으로 들어가/
꽃이 된 것만 같은/ 아카시아꽃❞
아카시아 향이 멀어지고 그 자리로 찝찔한 밤꽃이 피면, 여름이 온다는
신호입니다. 벌써 봄이 저물다니, 야속한 건 부리나케 폈다 떠나는
봄꽃의 속성입니다. 어쩜 성질머리가 봄을 저리도 빼닮았을까?
삶을 그리웁게 하는 건 배불리 먹고 잘 놀던 기억이 아니고, 힘든 때를
함께 한 사람들과의 기억입니다. 봄꽃은 그래서 애잔하고, 지울 수 없는
얼룩이고, 정겨운 내 기억의 문신이죠.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충혼의 넋을 위로하는 서울 동작동 현충원에 핀 이팝나무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