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효(孝)’가 되는 말법

이관순의 손편지[301] / 미니멀소설

by 이관순

‘효(孝)’가 되는 말법


그녀는 ‘효사친(효를 사랑하는 친구들)’의 방장이다. 일본에 ‘충(忠)’이 있다면, 한국에는 ‘효(孝)’가 있다고 거품을 문다. 풍화가 됐다곤 해도 ‘효의 가치는 여전히 한국인 심성을 관통하는 원류라면서. 그녀가 오랜만에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의 반가움이 까치발을 든 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엄마는 먼저 전화하는 법이 없다. 딸이 하는일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될까 봐 금기하는 딸 바보다.

.

그러한 엄마가 이날은 의외의 말을 꺼냈다.

“네 의견을 듣고 싶었어. 엄마도 주식투자란 걸 할 수 있을까?”

“주식? 엄마가 주식하려고?”

“왜? 나는 하면 안 돼?”

주식이란 말에 딸이 깜짝 놀라자, 엄마의 대답이 바람 새는 풍선처럼 움츠러드는 걸 느꼈다. 그제사 아빠가 세상을 떠난 뒤로, 엄마가 생각 이상으로 외로움을 타시는구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난번 엄마를 모시고 식당에서 점심을 하던 날이 떠올랐다. 유난히 꽃무늬 블라우스가 화려해 보였다. 히라마쓰 루이의 책 ‘노년 부모를 이해하는 16가지 방법’을 읽고 난 후여서일까. 예전에 없던 것에 관심을 키우는 것은 당연했던 것들과의 이별을 뜻하는 것이다.


꽃무늬 옷에 관심을 갖는다는 건 엄마의 꽃의 시간이 졌다는 뜻이고, 건강에 관심을 높이는 것은 건강이 엄마 곁을 떠나고 있다는 시그널로 느껴졌다. 식사하면서, 차를 마시면서, 늙어가는 엄마에 대한 쓸쓸한 상념이 떠나지 않았다. 저도 몰래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미안함에 켕긴 딸이 생각을 바꾸어 먹었다. 외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화투를 끼고 사셨다는데, 노년에 취미 하나 만드는 것도 좋아 보였다.

“그래, 울 엄마라고 못할 것 없지. 작게 작게 시작해봐.”

“고마워. 우리 딸이 그럴 줄 알았다. 찬성해 줄 것이라 생각은 했지.”

딸이 응원하자 녹음을 하겠다며 주식투자 방법을 차근차근 알려 달라는 것이다. 어떻게 그 얘길 전화로 다 하냐고, 나중에 집에 가서 차근차근 설명을 드리겠다는 데도 엄마는 막무가내 서두르는 것이었다.


투자 재원은 칠순에 들어온 축하금으로 하겠단다. 몇 달째 알토란 같은 돈을 은행에 묵혀두고 있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일었던 모양이다. 딸은 엄마의 따분한 일상이 이해되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책한 딸이 그날 한 시간 넘게 엄마와 통화를 하면서 주식 거래에 필요한 기초지식을 전수했다. 앱을 까는 것부터 계좌 만들기, 매입 매도 방법, 그리고 몇 가지 추천 종목도 알려주었다.


자주 전화할 테니 궁금한 것은 그때그때 물으시라고 했다. 그 말이 좋았나 보다. 엄마의 목소리가 하이톤으로 바뀌었다. 그날 이후 주식을 매개로 한 모녀간 통화가 부쩍 늘었다. 안부 묻는 것이 고작이던 전 보다, 확실한 대화 주제가 생긴 후로는 엄마가 재미를 느끼는 모양이다. 하루가 금세 지나간다는 것이다. 딸은 마음이 뿌듯했고, 엄마는 딸과의 통화가 즐거웠다.


그러다 딸이 두 달간 유럽 본사로 장기 출장을 떠나면서 한 동안 통화가 어렵게 되었다. 엄마는 딸이 출국한 지 한 달도 안 돼 달력에 'X표'를 긋기 시작했다. 남편이 군 제대를 앞두고 했다는 그 'X표'를. 두 달이 지나 귀국한 딸이 엄마에게 전화를 드렸다. 그런데 엄마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얘기인 즉 매도 시점을 놓친 것이 분하다는 것이다. 밥맛까지 잃었다고 한다.

“왜, 가격 좋을 때 한 번 팔아보지 그랬어?”

“네 말 듣고 하려고 그냥 묻어뒀지 뭐. 지금 팔면 원금도 못 건져.”

실제 손해를 본 것도 아닌데, 매도 시기를 놓친 것이 그렇게 서운한 모양이다. ‘이러다 울 엄마 주식 때문에 병나겠다’라고 농담을 던졌지만, 혼자 끌탕을 했을 엄마를 생각하니 죄송했다. 골치 아파하면서도 엄마는 여전히 주식에 매력을 느끼시는 것 같았다. 장기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엄마 인생에 도움이 될까? 생각을 굴린

딸이 용기를 냈다. 엄마의 노년에 활력이 된다면 적극 도와야겠다고.

“엄마, 걱정하지 마. 다 그렇게 배우는 거야. 내가 옆에서 도와줄게.

힘내. 알았지 엄마?”

“정말, 그래 줄래? 고맙다 우리 딸! 최고야!”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처음 주식을 시작할 때의 달뜬 목소리로 금세 돌아왔다. 이후 딸과 통화가 늘면서 엄마의 주식 수다도 따라 늘었다. 작전주가 어쩌고 전문 주식 용어까지 섞으면서 딸과의 대화를 즐기는 것이었다. 단골 유튜브 채널도 생겼단다.

“엄마 30만 원 손해 봤다며? 속 많이 쓰린 것 아냐?”

“그 정도에 속 쓰리면 그만둬야지. 잃을 때가 있으면 딸 때도 있겠지.”

“울 엄마 이제 맷집도 생겼네. 엄마 통장에 100만 원 넣었어. 엄마한테

투자하는 거야.”

“나한테 투자? 정말?”

“응. 소질이 있어 보여서. 장기투자야 원금 보장 없는 조건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단타로 조금씩, 재밌게, 알았지? 울 엄마 파이팅! 호호”

“고마워 우리 딸! 호호”


그녀는 오늘도 카페에 글을 올렸다. “한국문화는 ‘기(氣)·흥(興)·정(情)’의 세계다. 세계 사람들이 왜 K 문화에 열광하는 줄 아는가? 한국인의 효에서 발효되고 숙성된 맛과 멋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람들의 원초적 본능을 자극한 것이다. 갈수록 ‘K 콘텐츠’는 다양화되고 진화할 것이다. 세계로 수출하는 수많은 한국 제품이나 서비스는 또 어떤가? 그곳에도 기본적으로 ‘효’의 기품이 녹아져 있다”라고.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