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순의 손편지[300]
늙은 아버지와 늦둥이 아들이 따뜻한 봄날, 햇발이 잘 드는 대청마루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아버지는 우두커니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았고,
10대 아들은 아버지가 새로 사준 게임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마침 앞집 감나무 가지에 참새떼가 앉는 것을 보고 아버지가 물으셨다.
“얘야, 저게 무어지?”
“참새잖아요.”
아들 입에서 시큰둥한 대답이 나왔다.
말없이 고개를 주억대던 아버지가 새떼가 요란하게 우짖으며 날고 앉기를
거듭하자 재차 물으셨다.
"얘야, 저게 다 무어냐?"
“참새라고 했잖아요.”
아들 대답이 처음보다 퉁명스러웠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웃기만 하셨다. 아버지는 5분 있다 또 물었고, 10분
있다가 똑같은 질문을 재차 하셨다.
“얘야, 저 것이 무어냐?”
“벌써 네 번째예요! 참새라고요!”
거듭된 질문에 언짢아하던 아들이 갑자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버지를
살폈다. 머릿속에 휘익 별통별 하나가 스쳐갔다. 노인의 불치병이라는
‘치매’라는 단어가 떠오른 것이다. 아버지가 혹시?
“아빠, 괜찮으신 거죠?”
“뭐가, 나?”
“기억이 없고 그런 건 아니죠?”
아버지는 웃으며 아들을 바라보았다. 걱정이 역력한 어린 아들의 낯빛을
읽은 아버지의 눈빛이 봄 햇살만큼 따스하고 포근히 아들의 얼굴 구석
구석을 어루만졌다.
그날 아들은 아버지의 거듭된 질문에 짜증을 냈다. “아무래도 병원에
가보셔야겠다”라는 토까지 달면서… 그럼에도 아버지는 그러는 아들이
밉지가 않다는 표정으로 웃기만 하셨다.
짜증이 머리까지 뻗힌 아들은 역정을 내며 벌떡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부자간 대화는 여기서 토막이 났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아들이
떠난 빈자리를 향해 빙그레 웃고 계셨다.
그 후 아들이 성장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한 뒤 2년쯤 되었을 때,
아버지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장례 의례를 다 마치고 차분히
유품을 정리하는 데, 나온 것이 아버지의 일기장이었다.
일기장에는 오래전 그날에 아버지와 주고받은 대화가 아들 눈앞에서 날
생선처럼 펄떡이며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막내가 참새를 모른다고 면박을 주었지만 싫지 않았다. 숨기지 않고
속마음을 드러내는 아들이 사랑스러웠다. 막내의 어릴 때 생각이 난다.
마침 우물가 느티나무에서 깍 깍 까치가 울고 있었다. 그때 막둥이가
네댓 살쯤 되었을 것이다.
어린 눈에 계속 우짖는 까치가 신기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었나 보다.
고사리 새순처럼 고운 손가락으로 나무를 가리키며 내게 물었다.
“아빠, 저 새는 이름이 뭐야?”
“어, 저 새는 까치란 새다. 아침에 까치가 울면 집에 귀한 손님이 온단다.
우리 막둥이한테 오늘 무슨 좋은 일이 있으려나?”
아들은 까치가 한 번 울 때마다 계속해서 물었다. “아빠 까치는 왜 울어?”
“엄마가 없는 거야?” “친구들은 어디 갔어?” 나는 막둥이가 물을 때마다
꼬박꼬박 설명을 곁들여 일러주었다.
그럴수록 호기심 덩어리로 반짝거리는 어린 녀석의 눈망울과 천진한
얼굴이 어찌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두 팔을 펴 꼭 안아주었다.
그날 나는 아이의 같은 질문에 열댓 번은 족히 대답한 것 같다.
그것이 내겐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컸다고 아비 치매 걱정을 다
하네. 내가 늙긴 늙었나 보다. 어린것이 걱정하는 걸 보면.❞
끝내 아들은 아버지 일기장에 닭똥 같은 눈물을 한 방울 툭 떨구었다.
일기장에 쓰인 아버지 마음을 읽으면서였다. 아들도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욱하는 마음에 역정을 냈지만, 두고두고 걸렸던 모양이다.
단지 쑥스러워 아버지에게 입을 열지 못했을 뿐. 잊은 것은 아니었다.
아들은 마지막 문장 앞에서 오열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아버지에게
죄송스러웠다.
“아비가 말이 어눌해서 사랑을 표현한다는 것이 늘 그런 식이 구나.
그것이 늘 아들한테 미안했다….”
*..‘부자간 대화’에는 무심한 아들에 대한 표현력이 없는 아버지의 사랑이 깔려 있다. 자식과의 소통에 갈증을 느끼는 아버지…. 화술은 부족한데 대화는 해야겠고, 그러다 나온 것이 이런 질문이리라. “얘야, 저게 뭐지?”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손편지가 300회를 맞았습니다. 스쳐간 것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매주 한 통씩 우체통에 편지를 넣기 시작한 지 어언 3년이 돼 갑니다.
300회를 맞아, 포맷에 변화를 주기로 했습니다. 기존의 ‘손편지’에 ‘미니멀 소설’을 더하는 형태입니다. 새로 시작하는 미니멀 소설은 세 단어 ‘minimal+life+novel'의 합성어로, 스마트 시대에 부응하는 생활 속 이야기로, 짧고 빠르고 간결하게 구성한 작은 이야기 그릇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