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 소설[306] 22. 08. 01(월)
췌장암 4기 판정을 받았다. 말로만 듣던 그 말종 암이다. 길어야 1년이라는 예단된 수명. 태산이 눈앞을 가로막고 선 느낌이 이런 걸까. 사람의 어리석음은 잃고 나서야 깨닫는 데 있고, 더 안타까운 것은 기회를 다 놓친 후 눈물짓는 일이다. 그 말이 현실로 찾아왔다. 신기루 같은 삶을 좇다가 때가 저물어서야 헛된 인생을 살았다는 자각이, 아프게 뼛속을 찔렀다.
그로부터 하루하루 내 세포를 갉아먹고 사는 암세포와의 불편한 동거가 이어졌다. 출렁이는 마음을 다잡으려고, ‘죽어갈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라며 불굴의 투혼을 불사른 헤밍웨이의 소설을 읽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게리 쿠퍼와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전쟁과 사랑 영화쯤으로 알다가 반도 읽지 못하고 주체할 수 없는 눈물 때문에 결국 책장을 덮고 말았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다름 아닌 나를 향한 종소리였기에…
헤밍웨이가 소설 제목으로 인용했다는 성공회 신부 존 던이 쓴 기도문을 세 번째 읽을 때, 종탑 계단을 밟는 종지기의 발자국 소리가 가슴에서 공명을 일으켰다. 당시 영국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교회의 종을 치는 관습이 있었다. 하인은 종소리가 들리면 누가 죽었나를 알아다 주인에게 고해야 했다. 왜 그런 수고를 이어간 것일까?
세상 어느 누구도 온전한 섬이 아니다
누구의 죽음이든 나를 줄어들게 한다
그러니 저 소리가 누구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인지 알려고 사람을 보내지 마라
그것은 그대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이니
죽음은 우리 모두의 일이니 깊이 애도하라는 메시지처럼 종소리가 들렸다. 헤밍웨이도 작품에서 생명의 연대를 강조하려고 이 문구를 제목으로 차용했나 보다. 참혹한 전쟁의 광기 앞에 죽어가는 생명들. 질병으로 죽든, 사고로 죽든, 그때마다 종소리가 울려 퍼졌을 것이다. 나도 죽으면 누군가가 종을 쳐 줄까?
하지만 지금은 죽음의 연대감을 기대할 수 없다. 누가 죽든 종소리는커녕, 궁금해하지 않는 세상이니까. 인생은 한순간이다. 우물쭈물하다가 날 저무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맞을 뿐이다. 왜 생명이 코에 있음을 일찍이 몰랐을까. 주야장천 호흡을 하면서도 코에 달린 호흡이 죽음을 자각하라는 신호임을 좀 더 진작 알지 못했을까.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 열 달, 아니 여섯 달?… 그러한 내게 시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생겼다. 어디서 어떻게 죽음을 맞아야 하나? 인생의 끝자락에 섰을 때 무슨 말을 준비해야 할까? 다시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 15년 만의 일이다. 목사님이 지난주는 세 번이나 나를 찾아와 기도해 주셨다. 사그라드는 젊음이 불쌍했을 것이다. 혹시 목사님이 나의 죽음을 연대해 주시는 걸까?
오늘은 위로가 될 것이라며 내게 적합한 찬송가를 선곡해 담았다는 USB를 놓고 가셨다. 친절하게도 첫 곡을 설명한 글도 함께. A4용지 한 장에 또박또박 손으로 쓴 글이었다. 오후 내내 1번 곡을 리플레이하면서 목사님이 주신 글을 읽고 또 읽었다. 1912년 타이타닉호 침몰이 임박한 순간에 승선했던 모든 사람들이 함께 불렀고, 2009년 네덜란드 항공기 추락사고 현장에 울려 퍼졌다는 노래…
비극의 현장뿐 아니라, 축제의 현장에서도 불려졌다고 했다.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연주되었고, 유럽축구 FA컵 결승전에 관중이 모두 일어나 합창한다는 노래… 환호와 환희의 순간에도 죽음을 잊지 말라는 뜻인가? 힌두교 국가인 인도에서 조차 국경일인 공화국의 날에 이 곡을 연주한다니 더욱 놀랍다. 인도의 아버지 마하트마 간디가 애창한 노래라고도 메모돼 있다.
ABIDE WITH ME
나와 함께 하소서
무겁고 장중한 노래가 시공을 초월해 불리는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의 기도일까? 아니면 영광의 순간에도 일몰의 순간을 상기하라는 뜻일까? 소프라노 찬양곡이 마음을 숙연하게 했다. 교회에서 불리는 찬송가의 쓰임새가 이렇게 다양한 줄은 몰랐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독여주는 한 편의 시가곡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영국 국가(여왕을 지켜주소서)’ ‘독일 국가(독일인의 노래)’가 찬송으로 번안돼 있고, 베토벤의 교향곡 9번 4악장 ‘환희의 송가’도 많은 사람이 찬양하는 곡이다.
눈가에 이슬이 촉촉하게 맺힌 건 찬송이 탄생한 배경을 알면서였다. 100년 전부터 불려진 ‘abide with me(찬송가 481장)’는 헨리 라이트 성공회 신부가 병이 깊은 선배 신부를 병문안하며 만들어졌다. 젊은 사제는 병상의 늙은 신부로부터 절절한 신앙 고백을 들었다. 임종을 앞둔 신부는 성경 말씀대로 신실하지 못했다고 눈물 흘리며 회개했다. 그러면서 계속 한 문장을 반복해 되뇌다 숨을 거두었다.
ABIDE WITH ME ABIDE WITH ME…
세월이 흘러 헨리 사제도 늙어 요양을 떠나게 되었다. 시인이던 사제는 떠나면서 딸에게 시 한 편을 건넸다. 아버지가 선종한 뒤 딸은 시를 들고 작곡가 윌리엄 몽크를 찾아갔다. 공교롭게도 몽크 또한 어린 딸을 여의고 깊은 슬픔에 젖어있었다. 노래는 이러한 배경 아래 탄생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격정의 순간에도 찰나의 삶을 살피라는 자기 성찰을 담아 국경과 종교를 넘어 전파되었다. 일출처럼 장엄하게 떠오르는 인생 같지만, 한 순간 서산 그림자로 사라지는 것이 인생임을 안다면,. 그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인생이 쇠락해질 때, 더는 사람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될 때… 타고 있는 배가 침몰할 때라 서야, 병상에서 임종을 앞두고 서야, 자식을 잃고 참척의 아픔을 느낄 때라 서야 사람들은 신의 은총을 희구한다. 멀리서 희미하게 종소리가 울리는 것 같다. 나를 위한 종소리가 울리나 보다. 종지기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때가 가까워지고 있나 보다. 조금씩 조금씩 가까이 더 가까이서…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